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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7 텃밭 일기 3] 진딧물 가고 탄저 오다

by 낮달2018 2021.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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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7.20.)에 들른 우리 고추밭. 장마 이후에 잎이 무성해지면서 밭은 제대로 꼴을 갖추었다.
▲ 밭 가장자리에 심은 옥수수.  옥수수 농사는 처음이다.
▲ 고추는 많이 달렸는데 진딧물에 이어 고추밭 곳곳에서 곰팡이병 탄저가 발견되었다.

텃밭 고추에 탄저(炭疽)가 온 것은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다. 눈 밝은 아내가 고추를 따다가 탄저가 온 고추를 따 보이며 혀를 찼을 때, 나는 진딧물에 이어 온 이 병충해가 시원찮은 얼치기 농부의 생산의욕을 반감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진딧물로 고심하다가 결국 농약을 사 치고 나서도 나는 마음이 내내 개운치 않았다. 약을 쳤는데도 진딧물은 번지지만 않을 뿐 숙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무렵 만난 선배 교사와 고추 농사 얘기를 하다가 들은 얘기가 마음에 밟히기도 했다.

 

집 마당에 텃밭을 가꾸는 이 선배는 부지런한데다가 농사의 문리를 아는 이다. 내가 어쩔까 망설이다가 내 먹을 건데 뭐, 하고 약을 쳐 버렸다고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무개처럼 큰돈을 들여서 농사를 짓는 이들은 도리가 없다. 어떤 식으로든 투자한 걸 회수해야 하니까. 그러나 텃밭에 짓는 농사, 되는 대로 지켜봐도 된다. 병충해가 와도 좀 여문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병들어 죽는다. 그래도 털면 먹을 건 나온다. 그리 생각하는 게 좋다…….”

 

나는 무슨 유기농을 신념으로 삼거나 ‘무농약주의자’도 물론 아니다. 그래도 고작 제 먹을, 손바닥만 한 농사지으면서 섣부르게 농약을 치는 걸 부끄러워하는 마음이야 없을 수 있겠는가. 그의 얘기를 듣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뒤늦게 농약의 효과가 나타난 건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진딧물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고 고추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면서 밭은 검푸르게 짙어졌다. 그런데 지지난 주부터 여기저기서 탄저가 발견된 것이었다. 아직 수확을 하기엔 한참 이른 시기에 느닷없이 탄저라니 나는 방심하다가 된통 당한 느낌이었다.

 

▲ 탄저로 썩어가고 있는 고추. 탄저는 고온다습하고 빗물이 과실에 직접 닿으면서 생기고 번창한다고 한다.

2010년에 안동에서 고추농사를 지을 때는 거의 수확기가 다 돼서 탄저가 왔었다. 풋고추 잘 따 먹고 수확할 무렵에 찾아온 탄저, 곱게 붉어진 고추의 선홍색 살결에 번진 병충해의 흔적은 참혹했다. 그러나 그땐 낙심했지만 성한 놈을 따고 나머지는 뿌리째 뽑는 걸로 농사를 마쳤다.[관련 글 : 거둠과 이삭(2)]

 

농약 방제의 윤리학(?)

 

그런데 아직 7월인데, 고추가 겨우 하나둘 빨갛게 익어가는 시기에 탄저라니. 나는 하는 수 없다고, 견디는 놈만 살피며 가자고 했지만 아내는 고심 끝에 식초를 물에 타 뿌려주면 좋다고 해 내가 한 번 아내가 한번 그걸 뿌려주었다.

 

우리 같은 얼치기가 병충해에 이리 마음이 아플진대, 생업으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그건 얼마만 한 좌절일지. 우리네야 농사를 망치면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그걸로 삶을 이어가야 할 이들의 농약 방제를 어찌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장마가 왔다. 나중에야 이 곰팡이 병이 고온다습하고 빗물이 과실에 직접 닿으면서 생기고 번창하는 병충해라는 걸 알았다. 비닐하우스로 비 가림을 해 주면 탄저는 발생하지 않는다 했다. 오랜만에 고추 모종을 심으면서 이랑과 이랑을 너무 달게 낸 것도 실수였다. 이랑 간격을 넓게 하여 통풍이 잘 되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전혀 몰랐었다.

 

▲ 지난주(7. 20.)의 첫 수확물.  소량이지만 지난 몇 달 노동의 결과는 오롯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다. 우리 내외는 착잡한 마음을 가누며 익은 고추와 가지, 오이, 호박,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지은 옥수수 몇 개를 수확해 돌아왔다. 소량이지만 광주리에 담긴 사랑스런 수확물이 주는 기쁨은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아내는 돌아오자 고추 말리는 데 골몰했다. 광주리에 담은 고추를 아파트 마당의 지하주차장 환기구 위에다 내놓았다가 찔끔찔끔 내리는 여우비에 거두어들이기도 여러 번이었다. 나중엔 소형 음식물 건조기를 밤새 돌려서 고추를 얼마간 건조해 냈다.

 

▲ 밭에 이랑의 간격을 넉넉히 해 두어 통풍이 잘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미련하게 너무 달게 고추를 심었다.
▲ 빽빽하게 달린 고추를 보면서 우리는 마치 부자가 된 것처럼 겨웠다.
▲ 담밑에 심었던 가지. 열매는 왕성하게 달리는데 빛이 부족해서일까 .  빛깔이 좀 허어멀겋다.
▲ 빨갛게 익어가고 있는 고추 .  크기는 마땅찮아도 실하고 곱다 .  탄저만 피하면 제대로 수확할 텐데...

장마가 얼추 끝난 듯해 오늘 새벽에 우리는 서둘러 텃밭으로 갔다. 일주일 만인데 밭은 더 무성해졌고, 지난번과는 확연히 다르게 고추가 익어가고 있었다. 우선 성한 고추부터 따내고 탄저로 썩어가고 있는 포기는 아예 잘라내 버렸다.

 

'고추 말리기'도 여간 일이 아니다

 

고추는 그리 크지는 않아도 포기마다 빽빽하게 달렸고, 곱게도 익었다. 양쪽 밭에서 고추를 따면서 우리 내외는 처음으로 농사꾼 꼴을 갖추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를 향해 졸지에 부자가 된 기분인데, 하고 소리쳤더니 아내는 당신이 농사를 잘 지었수, 하고 화답해 주었다.

 

고추를 따내고 나는 아내가 들고 온 식초 반병을 분무기에 붓고 물을 타 다시 양쪽 밭에다 그걸 살포했다. 다행히 탄저는 많이 번지지 않아서 두어 군데 외엔 드러나게 상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번에 들를 때까지 이 녀석들이 더 이상 번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 담을 타고 감나무 가지에까지 덩굴을 뻗은 호박이 큼지막하게 달렸다.
▲ 오늘의 수확물을 집 뜰 위에 늘어놓았다. 제법 구색을 갖춘 수확물을 들여다보며 우리는 부자가 된 듯했다.

밭 가장자리에 심었던 호박 농사는 영 시원찮다고 그간 불평해 쌓았는데, 오늘 그 덩굴 속에 숨어 있던 호박 세 덩이를 발견했다. 어럽쇼, 눈길을 돌리니 담을 타고 감나무 가지를 감고 오른 호박 덩굴 끝에 제법 덩실한 호박이 하나 허공에 달려 있었다. 하난가 했더니 한 개가 더 있었다.

 

내외는 감읍해 마지않았다. 덩굴 속에 숨어 있었던 호박덩이는 겉이 미끈하지 않고 우둘투둘하다. 무슨 병이 든 것일까. 담 밑에 심었던 가지는 잔뜩 열매를 달았지만, 햇볕을 못 봐서 그랬는지 빛깔이 진한 보랏빛이 아니라 허여멀겋다. 그래도 그걸 따서 돌아오는 마음은 자못 만족스러웠다.

 

아내는 돌아오자마자 고추 말릴 생각에 걱정이 늘어졌다.

 

“장마 끝난 거유?”

“아니, 이번 주말까지는 오락가락한다는데?”

“어떡하나, 날만 맑으면 환기구 위에다 며칠 말리면 좋겠는데…….”

“말려, 까짓것. 비 오면 들이지 뭐.”

“내려가면 이미 다 젖어버리는데?”

“하긴…….”

 

아내는 올겨울 김장하고 우리 집 양념으로 쓸 고추 열 근을 밭에서 수확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글쎄, 탄저가 더 이상 번지지 않고, 나머지 고추를 잘 갈무리할 수 있다면 아니 될 일도 없겠다. 대신 밭으로 발걸음이 더 잦아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초에 밭에 가기로 우리는 약조를 했다.

 

 

2017. 7.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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