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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21 텃밭 농사 ⑤] 마침내 고추가 익기 시작했다

by 낮달2018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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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제(防除), 방제, 방제……(7월 10일, 13일)

▲ 보라. 이렇게 실하게 자라고 있는 우리 밭 고추를. 이들이 병들어 시드는 걸 보고 무심히 넘길 주인은 아무도 없다.(7.10.)
▲ 고추밭은 나날이 꼴을 갖추어간다. 빽빽하게 열매를 단 고추 행렬이 의젓하다. (7.13.)

“반풍수(半風水) 집안 망친다”라고 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병충해 핑계를 자꾸 댄 뜻은 일종의 알리바이를 위해서다. 약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을 시시콜콜 이야기함으로써, 방제는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의성서 농사를 짓는 내 친구는 내가 농약을 치는 걸 심상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그뿐 아니라 아무도 내가 농약을 치는 걸 따로 지적하거나 비난한 이는 없다. 그런데도 알리바이 운운하는 것은 한편으로 텃밭 농사에 굳이 방제까지 하려는 게 지나친 욕심이면서, 농약에 대한 이해나 인식의 부족 탓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음을 의식한 결과다.

 

7월 3일에 약을 치고 왔는데 일주일 후에 들렀더니 상태는 더 나빠져 있었다. 아내가 밭을 돌아다니며 따낸 벌레 먹고 병든 고추가 조그만 바가지 하나에 가득했다. 안 되겠어, 약 쳐야 해. 아내는 단호했고, 나는 거기 딴지를 걸 엄두도 못 냈다.

 

텃밭 농사 '방제'의 암묵적 윤리

 

제대로 자라 인물 좋은(!) 고추를 한순간에 일그러뜨린 병충해에 대적하는 방법은 적어도 약을 치는 거 말고는 따로 없어 보인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는 우리가 그러할진대 환금성 작물로 고추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말해 무엇할까. 우리야 비록 벌레 먹고 병드는 현상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게 다지만,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농민들에게 병충해는 도둑이나 강도에 진배없지 않은가 말이다.

▲ 아내가 밭에서 따낸 병들고 시든 고추들. 고추가 이래 병든 모습을 보면 주인의 마음도 아프긴 일반이다. (7.10.)
▲ 사흘 후에 와도 역시 이만큼 따냈다. 병충해는 우리가 정면 대결하기 어려운 재해다. (7.13.)
▲ 묵은 밭 가장자리에 예전부터 심고 가꾸었던 부추를 아내가 베어냈다. 이놈은 한동안 부침개로 우리를 즐겁게 해 줄 것이다. (7.13.)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방제에 대한 변명을 준비하는 마음은 껄끄럽다. 어차피 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먹을 건데, 농약으로 병충해 방제하여 좀 성한 고추를 먹으려는 게 무어 그리 나쁘냐고 되물을 수 있긴 하다. 그러나 농약이나 화학비료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 농민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것과 달리, 텃밭 농사엔 암묵적 윤리가 작동한다.

 

그것은 생계가 걸려 있지 않은 텃밭 농가에서나마 농약을 치지 않고, 화학비료에 의존하지 않는 농사로 그간 독한 농약과 비료에 지친 땅심을 돋워 주어야 한다는 묵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이상이라면, 잘 자라던 고추가 병충해로 비실비실 말라죽거나, 껍질에 구멍이 뚫리고, 표면이 썩어들어가는 상황에 맞닥뜨린 텃밭 농가로서는 손쉽게 농약의 힘을 빌리려는 것을 대놓고 비난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어쨌든 나는 분무기에다 약 칠 준비를 해 주었고, 아내가 분무기를 메고 방제에 들어갔다. 어깨도 아프고, 여기저기 근골격이 시원찮은 아내에게 방제를 맡기고 구경만 하는 것도 민망하다. 내 알레르기가 농약과 실제 어떤 영향을 받기나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 년 너머 병을 앓고 있으니 아내가 배려하지 않을 도리도 없는 형편이다.

▲ 장독대(경상도 말로 장꼬방) 옆에서 박덩이가 익어가고 있다. 이놈을 따서 우리는 박나물로 호사를 했다. (7.10.)
▲ 먹으려고 딴 고추와 가지. 올해 가지는 척박한 땅에 심어서 그런지 영 부실하다. (7.10.)
▲ 상하고 병든 고추로 속이 상하다가도 이렇게 기운차게 자라고 있는 고추 덕분에 우리는 위로받는다. (7.13.)
▲ 장독대 옆의 박을 따고, 담장 아래 호박 두 덩이를 땄다. 오른쪽은 쪄서 쌈 사먹는다고 딴 호박잎이다. (7.13.)

아내는 더위 속에서도 바지런히 몸을 놀려 묵은 밭 앞쪽의 부추를 좀 베었고, 담장 근처에서 호박 두 개를 땄다. 병든 고추 말고, 집에서 먹으려고 한 바가지가량의 고추를 따 챙겼다. 아내는 자신이 쳐 놓고도 정작 그 농약을 덮어썼던 고추가 켕기는 모양이다. 나는 아서, 그동안 사 먹을 땐 이보다 훨씬 심한 농약 세례를 받은 놈들도 우린 잘도 먹었잖아? 하고 눙치고 말았다.

 

2. 지지대 보완하기(7월 16일)

▲ 이랑 가장자리에 커다랗게 박은 놓은 새 지지대. 나중에 필요할 때 새로 끈으로 묶기로 했다. (7.16.)

아내가 웃자란 고춧대를 보고, 이전에 쳐둔 지지대와 끈이 힘을 받기 어렵다며, 좀 긴 지지대를 마련해야겠다고 했다. 그래도 10년 넘게 지은 고추 농사라, 한 번씩 사들인 지지대가 거의 이백여 개에 이른다. 그러나 긴 게 1.2m, 짧은 건 1m짜리인데, 치고 뽑아내는 일을 여러 해 이으면서 뿌리 쪽이 굽었다가 삭아서 부러지곤 해서 쓰기 곤란한 놈도 드문드문 있다.

 

긴 놈을 원하니 1.5m짜리를 사야 했는데, 그중 가격이 제일 높았으나 인터넷인지라 개당 가격이 500원에 미치지 않는다. 다음날 바로 도착한 지지대 40개를 차에 싣고 다시 텃밭을 찾았다. 장마라고 했지만, 바람이 크게 불지 않아서인지 쓰러진 놈은 보이지 않았다.

▲ 오늘은 병든 놈이 지난 번의 반도 안 되어 한결 다행스럽다. 썩은 놈은 탄저다.

일단,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곳에다 지지대를 박아주면서 돌아다니는데 섭씨 35도의 날씨가 끔찍했다. 거의 어깨높이로 팔을 올려 망치질을 하려니 그것도 적잖이 힘이 들었다. 아내는 우선 위태해 보이는 데만 새 줄을 묶어두고 주변을 살펴보는 거로 일을 마쳤다.

 

사진기를 빠뜨리고 갔으므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화소 수나 전문가 기능 등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 못잖은 사양을 갖추었지만, 폰 사진은 폰 사진일 뿐이다. 배경을 뭉개주는 이른바 아웃포커스 기능은 카메라보다 더 세련되게 표현하기도 하지만, 한계가 분명한 게 폰 사진이라고 믿는 나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전화기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3. 우리 고추가 마침내 익기 시작했다(7월 16일)

▲ 아직 빨갛게 익은 고추는 별로 는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를 바라보는 주인의 맘은 푸근하다. (7.16.)

며칠 전만 해도 아내는 고추가 익을 때가 되었는데,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익을 때 되면 익겠지, 하고 무심히 나는 답했다. 나는 그저 곁다리로 농사를 지을 뿐, 아내만 한 애착이 없다. 그래도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고추밭을 주욱 훑어보았다.

 

“익은 놈이 있네!”

“그러게. 좀 늦었네요.”

 

우리는 이미 좀 느긋해져 있다. 익은 고추는 몇몇 이랑에 한 개씩 눈에 띌 뿐, 아직 본격적으로 익는 시기는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큼지막한 고추가 빨갛게 익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벌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다. 크고 실하게 익은 고추가 빨갛게 익으면 그 두꺼운 껍질이 고스란히 고운 고춧가루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7월도 중순, 바야흐로 고추가 익는 계절이 온 것이다. 장마도 얼추 끝나고, 남은 것은 불볕더위뿐이다. 뉴스에서는 올해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더위를 겪게 될지 모른다고 을러대지만, 어떤 여름도 작물은 이겨내고, 소담스레 열매를 맺고 익어가는 것이다. 비록 말 못 하는 작물이지만, 그걸 기르면서 인간도 이래저래 배우면서 늙어간다.

 

한 닷새 뒤쯤 다시 들르기로 하고, 우리는 땀을 씻으며 텃밭을 떠났다.

 

 

2021. 7.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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