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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퇴직’의 길목에서

by 낮달2018 2021.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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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몸이 채근하기도 한다

▲ 7월의 교정. 폭염 가운데서도 아이들은 땡볕에 운동장에서 공을 찬다. 그게 아이들의 젊음이다.

올 2월에 수학 교사 한 분이 정년이 되어 학교를 떠났다. 마주 보고 있어서 간간이 이야기도 나누곤 하는 사이였다. 수학에는 나름 일가를 이룬 분이라고 알려졌지만 짬이 날 때마다 문제 풀이에 골몰하던 분이었다. 학교장이 고등학교와 대학 동기여서 승진파와 이른바 ‘교포(교감 포기)’의 살아 있는 보기가 아니었나 싶다.

멈춰진 ‘퇴임 시계’

술과 담배를 꾸준히 하면서도 금오산을 쉬지 않고 오를 수 있는 노익장이었다. 그분은 퇴임하면서 어떤 행사도 마다하고 친목회에서 마련한 회식에서 꽃다발 하나 받고, 마지막 인사말도 기어코 사양하고 떠났다.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있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정년을 채우고 떠났지만, 그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는 말이다.

“먼저 가십시오. 곧 따라가겠습니다.”

나는 우정 그렇게 인사했다. 내 시계는 원래 2014년 2월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그 시계는 시방 멈추어져 있다. 나는 공식적으로 ‘기소 중’이다. 명퇴 신청은커녕 사표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국가공무원법에다 정당법, 거기다 정치자금법 위반까지 내 혐의(?)는 내가 봐도 무시무시하다. 2000년대 중반 어느 시기에 한 진보정당에다 후원금을 낸 죄다.

우리 지역에서 이 건으로 기소된 100여 명의 현직 교사들과 나는 목을 빼고 가물에 콩 나듯 열리는 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2심 결심을 앞둔 재판은 벌써 반년도 넘게 연기 중이다. 이게 내 퇴임 시계가 멈춰진 까닭이다. 얼마 전 이루어진 내년도 명퇴 희망자 조사에도 나는 응하지 못했다.

“왜? 나와서 뭘 하려고? 인생은 60부터라는데…….”
“웬만하면 정년까지 하시지요. 명퇴는 무슨…….”

정년 전에 학교를 떠나겠다고 이야기하면 동료나 제자들, 친구들은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들의 그 같은 반응에 담긴 생각은 두 가지 같다. 정년 연장이 다시 논의될 만한 사회적 상황이라는 게 하나고 아직 건강한데 왜 그만두냐는 것이 둘이다.

“지겨워서.”

그런 주변의 반응에 대한 내 답변은 대체로 같았다. 나는 굳이 설명하려 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지겹다’고 말하는 것은 어쨌든 거시기하다. 습관적으로 수업을 들고 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업 자체가 싫지는 않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 학교라는 시스템이 강제하는 숨 막히는 일상들, 학교 현장에서 거듭 이루어지는 비교육적 관행들과 그것을 추인하는 교사 집단의 무력감, 경쟁과 효율만을 지상 과제로 여기는 전도된 가치관…….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나는 활기를 잃은 학교 체제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다시 살인적 입시 체제로 완벽하게 되돌아간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무망한 일이었다. 20여 년 가까이 참여했던 교육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학교로 돌아오자, 나는 내가 더 이상 이 체제와 어우러질 수 없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한 차례 해직으로 말미암아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데 필요한 시간은 20년이었다. 1994년 복직했으니 내년 2월이 꼭 20년째다. 연금법이 개정되고 난 몇 해 전에 나는 일단 빚을 내어 1989년까지의 근무 기간을 재직기간에 합산하는 신청을 했다. 형식적으로는 나는 아무 때나 교직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재판은 대구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재판 소식을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지만, 여전히 소식은 없다. 미루어 짐작하기론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판인데, 어느 지역에서 먼저 판결을 내는 것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겨워서’라고 줄이긴 했지만, 교직을 떠날 이유는 적지 않다. 나는 정년이 무슨 벼슬도 아닌데도 기어코 정년을 채우는 건 ‘민폐’라고 말해 왔다. 예순을 앞두게 되면 대체로 신체적 기능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기능도 예전 같지 않아진다.

물론 남다른 건강과 열정으로 젊은 교사들 못지않은 열정과 자세로 교직을 마무리하는 훌륭한 선배 교사도 적지 않다. 그러나 본인이 자신을 건강하다고,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다고 여기는 것과 아이들이 교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동료 교사들에게 주는 부담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본인이야 늘 열정적으로 젊은 감각을 유지하고 아이들 눈높이를 살피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과 상대가 그것을 같은 무게와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50대 초반에 일찌감치 퇴직한 동료 교사가 있었는데 그의 퇴임의 변 앞에서 나는 자신을 돌아보며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교직을 떠나는 이유는 하나. 더 이상 아이들의 눈높이를 따라갈 수도, 그럴 자신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학기를 나는 매우 힘겹게 보냈다. 학교를 옮기고 적응하는 과정이라서 이렇게 힘든 거라고 나는 우정 자신을 위로했다. 정규수업도 2개 학년에 걸친 데다, 주당 8시간 이상의 보충수업에 내몰리면서 거의 숨이 턱에 닿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게 적응기의 어려움이 아니라, 내 신체 기능이 과중한 수업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 탓이라는 깨달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내 수업의 교재들. 교과서도 있고, 문제집도 있다. 문제집 풀이는 정말 싫다.

그렇다. 3, 40대 교사에 비길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잘 견뎌내고 있다는 생각은 내 희망 사항이거나 주관적 믿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2학기 들면서 양 수업이 모두 줄면서 겨우 숨을 돌렸다. 올해는 수업이 지난 학기와 비슷해 큰 어려움 없이 여름방학을 맞게 되었다.

몸이 자신을 ‘방어’한다

행사나 시험 따위로 수업이 빠질 때마다 기뻐하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다. 수업 부담이 줄 때마다 즐거워하는 것은 교사들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침에 하루 수업을 가늠해 보고 일희일비하는 날이 계속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에너지가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엔간히 피곤해도 나는 학교에서 눈을 잘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올들어 방송고의 작은 교무실에 오면서 저도 몰래, 또는 청해서 잠깐씩 선잠을 자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여름 들어 폭염이 계속되면서 몸의 균형이 다소 무너진 느낌이 있었다. 학교에선 의자에 앉은 채로 일이십 분씩 눈을 붙이는데 자주 코도 고는 모양이다.

퇴근해서도 간밤의 잠이 모자라지 않았는데도 초저녁부터 자리에 들면 죽은 듯이 새벽까지 내처 잔다. 어느 날, 몸에 어디 이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는 깨달았다. 그게 어디 몸에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폭염 속의 근무 부담에 내 몸이 자신을 지키고자 작동한 방어기제라는 걸 말이다.

2학기는 어떨까, 미리부터 다가올 날을 저어하기 시작한다. 다소 부담이 커지더라도 수능시험 이후에는 3학년 수업의 부담이 주니 또 그렇게 견딜 만은 하겠다는 생각에 안도한다. 다시 새해는 어떻게 하나. 재판이 조만간 마무리된다고 하더라도 내년 2월로 잡은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할 듯하다.

이래저래 마음이 무거워진다. 지난 주말에는 2장 1박, 친구들과 모처럼 어울렸다. 의성의 산골에서 농사를 짓느라고 햇볕에 탄 얼굴의 친구 장은 무척 건강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제 어느덧 농사꾼의 풍모를 갖추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주변에서 가장 행복하고, 팔자 편하게 사는 사람인 것이다.

친구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그나마 이번 여름방학에는 예년의 반밖에 되지 않는 수업을 받아서 모처럼 좀 여유롭게 방학을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아 있는 기간에는 건강 때문에 아이들과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면서.

이형기의 시 ‘낙화’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하고 노래한다. ‘때’를 아는 것으로부터 세대의 교체나 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것은 작게는 한 세대의, 크게는 한 시대 질서를 재편하는 조건이다. 나의 ‘때’는 이제 시나브로 초읽기를 시작한 것은 아닐까.

 

2013. 7.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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