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늦깎이 학생들의 ‘비밀’, 혹은 ‘진실’

by 낮달2018 2021. 7. 1.
728x90

방송통신고의 만학도들의 ‘비밀’과 진실

▲ 올 2월의 졸업식. 이들에게 세 해는 단순히 75일의 시간만은 아니었으리라. 사진은 일부러 흐리게 처리했다.

올해부턴 방송통신고등학교의 신입생 가운데 20대의 비중이 예년보다 높아졌다.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정규과정을 거치지 못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들이 감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추세이긴 하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바라보는 교사들의 시선은 좀 착잡하다. 20대의 비율이 높아지고 4~50대 시니어들이 준다는 것은 교수-학습의 풍경이 달라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늦깎이 학생들이 줄어들고 있다

 

4·50대 시니어들은 본질적인 의미의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겐 거의 외계어나 다름없는 영어나 수학 시간에도 안간힘을 다해 수업을 견디어낸다(!). 고단한 삶을 살아오면서 ‘참을 인’자라면 여러 번 삭인 사람들이다. 과연 알아듣기는 할까 싶은 수업을 하다가 그들의 그런 태도를 확인하면서 가끔은 등허리가 서늘해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20대는 다르다. 대체로 이들은 4, 5년 전쯤에 대체로 ‘부적응’이나 말썽 때문에 정규과정을 그만둔 아이들이다. 그래도 20대 후반은 좀 낫지만 스물을 갓 넘긴 아이들은 철딱서니가 없기로는 10대나 다르지 않다. 이들은 교과서도 펴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잠을 자거나 시간 내내 스마트폰이나 주물럭거릴 뿐이다. 어쩌다 교사가 나무라기라도 하면 휑하니 교실을 나가버리기도 하는 수준이니 말다했다.

 

학년별로 ‘출석 미달’로 제적되는, 십여 명 안팎의 아이들은 모두 이들 10대에서 20대들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4·50대 시니어들이 가진 절박감이나 ‘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감정 따위는 없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이 마치지 못한 고교 과정을 가장 손쉽게 이수할 수 있는 제도로 방송고를 선택했다. 시니어들이 이 과정을 일종의 ‘한풀이’의 과정처럼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이들에게 학교는 단지 맞춤한 제도와 기능에 불과한 것이다.

 

‘연령순’으로 학생을 모집하는 대구의 방송고와는 달리 경북 지역의 방송고는 모두 ‘선착순’ 모집이다. 그러니 이런 추세는 시간이 갈수록 뚜렷해질 것이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마치 무슨 성스러운 과정처럼 수업에 열중하는 시니어들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도 그들에게 문학을, 화법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삶과 공부에 공감하며 동시대인으로서의 일종의 연대 감정마저 갖게 된 것을 나는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방송고도 정해진 ‘교육과정’이 있다. 늦깎이 학생들이라고 해서 중학교 저학년 수준의 수업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수업에 들어가 보면 교과서로 수업을 하는 게 도로일 뿐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다. 학습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중학교 졸업 후, 20년, 30년의 공백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수업의 방법은 이해가 가능한 부분까지만 수업하고 나머지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다. 언어 예절이라든가, 틀리기 쉬운 일상 어법 따위를 가지고 대화해 보면 정작 이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다는 걸 확인한다. 이들은 그 연륜에 걸맞은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놓친 ‘사춘기의 삶과 공부’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이 정규과정을 놓친 사춘기 무렵의 삶이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해에도 몇몇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짬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이 7시간에다 5시쯤 일과를 마치면 이들도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50대 학생들이 정규과정을 놓친 것은 대체로 ‘가난’ 때문으로 보면 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로 이내 진학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던 70년대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탓에 성급하게 고교 진학을 포기한 예도 적지 않다. 경우는 달라도 이들이 학업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한 것 같다.

 

또 하나 흥미로운 일은 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늦깎이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올 2월에 졸업, 예순의 나이에 4년제 대학에 진학한 종수 씨(가명)도 그랬다. 가족 이외엔 아무도 그가 3년이나 격주로 구미를 왕래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굳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새삼스레 자랑할 일도 아니라고 했다.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의 경우는 더 예민한 구석이 있다. 지난 6월 초의 연합체육대회 때 일이다. 천막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여학생 하나가 모자에다가 얼굴을 죄다 가린 수건을 쓴 채 설거지를 하고 있어서 누군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했다. 수건을 들추어 얼굴을 보여주면서 여학생이 그랬다.

 

“여기가 우리 지역이거든요. 누구라도 얼굴을 알아보면 그래서요…….”

 

두말할 것도 없이 주변에 늦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경우다. 이웃에게 숨기는 것은 양반이다. 아예 가족에게조차 숨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숨긴다’는 표현이 부정적이라면 ‘알리지 않는다’고 해도 좋겠다.

 

그날 교정에서 만난 50대 중반의 2학년 여학생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자신의 옛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인근 여학교 장학생으로 입학하기로 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바로 밑의 남동생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저는 학업을 포기해야 했지요. 그리고 바로 회사에 취직해서 남동생의 학비를 댔고요…….

 

대학 공부까지 한 동기생이 청혼하여 결혼했고, 아이들 공부에다 출가까지 시키고 난 뒤 지난해야 여기 입학을 했죠. 제가 이렇게 공부하는 걸 남편 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남편만이 내 후원자인 셈이지요…….”

 

“털어놓으면 오히려 따님들이 더 강력한 후원자가 되지 않을까요?”

“안 돼요. 애들은 제가 고등학교는 나온 걸로 알고 있거든요.”

 

지난 중간고사 때 커닝을 적발해 페이퍼를 빼앗아 찢어버린 일이 있었다. 나는 피차 민망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학생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평일인데 교무실에 늙수그레한 여학생 하나가 찾아왔다. 내겐 낯선 얼굴이었는데 여학생은 자신이 커닝을 적발당한 학생이라면서 그 이후 부끄러워서 학교에 다닐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는 것까지 고민했었다고 고백했다.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비밀 공부’

 

나는 그걸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사 그랬다고 해서 뭐하러 마음에 담아두느냐고 위로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이는 자기 남편도 지역에서 알 만한 사람이고 자식들도 유학까지 보냈지만, 자신은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뒤늦게 공부하는 것은 남편조차 모르는 일이라고 고백했다.

▲ 2,30년의 공백을 넘어 교과서의 내용을 소화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나는 이들 여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도, 자신이 낳아 기른 자식들에게도 섣불리 털어놓지 못할 만큼 ‘못 마친 공부’는 이들의 가슴에 묻어둔 응어리일까. 정규과정을 순조롭게 마친 이들에게는 스쳐온 과정에 불과했던 그 3년이 이들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한과 상처였던 걸까.

 

어저께는 우리 반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대놓고 물어보았다. 혹시 가족들에게 학교 다니는 걸 숨기고 있는 사람 있어요? 쉰을 훨씬 넘긴 혜선 씨와 40대 중반의 한수 씨가 손을 들었다. 한수 씨는 대구에서 다니는 자영업자다. 그는 가족들은 알지만, 친구들은 모른다고 하면서 덧붙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데요…….

 

“혜선 씨는 누구에게?”

“아무도 몰라요. 남편조차.”

“왜요?”

“글쎄요. 으레 고등학교를 나온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얘기해요?”

“아니, 결혼할 때 속인 거요?”

“아니요. 속이려고 한 게 아니라, 아예 고등학교를 나온 걸로 치니까 말을 못 한 거지요.”

“아, 그렇구나…….”

 

여기저기서 식구들만 안다, 아이들은 모른다, 굳이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니까, 하는 이야기가 새어나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가난해서든, 철이 없어서든 제때 공부하지 못한 걸 동네방네 자랑할 일은 없겠다. 아이들이든, 남편이든 그리 알고 있는데, 뒤늦게 아니라고 까발릴 일도 역시 없는 게 맞다…….

 

그러고 보면 남편의 후원을 받으며 학업을 마친 지난해 우리 반의 여학생들은 행복한 사람이었던 셈이다. 졸업식 날 꽃과 선물 꾸러미를 사 들고 와서 교실 뒤편을 가득 채웠던 가족들 가운데 남편들도 적지 않았다. 스스로 아무개 남편이라며 내게 인사를 청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에게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축하의 인사를 전했었다.

 

글쎄, 모르긴 해도 뒤늦게 50대 중후반에야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내의 남편들 역시 비슷한 시절을 함께 살아온 이들이다. 형편이 조금 나아 자신은 공부를 제때 마쳤다 하더라도 아내의 못다 한 공부를 어찌 모르랴. 또한, 그런 저간의 사정을 공유하였기에 그들이 함께한 삶은 더욱 깊고 그윽했던 것을.

 

혜선 씨는 대학을 가고 싶어 한다. 그는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같은 계열의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그이를 격려해 주었다. 그이가 만학도로 대학에 입학하면 지금까지 숨기고 살았던 지난 3년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시간이 될까.

 

원하는 건 ‘졸업장’ 아닌 ‘빈 성장기 채우기’

 

공부를 숨긴 이들에게는 지난 3년은 혹시라도 남편이나 가족들이 눈치챌까 전전긍긍하면서 지내 온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여학생이, 또는 남학생들이 무사히 졸업장을 받으면 그 시간은 아름다운 과거사가 될 것이었다. 사춘기의 한 시절, 그 상처와 아픔으로 비어 있던 성장기의 한 시간은 졸업장으로 인해 온전히 채워질 것이었다.

 

정규과정을 제때 거쳐 온 사람들은 쉰을 넘긴 늙다리들이 뒤늦은 공부를 한다고 책을 펴고 앉은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왜 그리 졸업장 한 장에 목을 매는지, 그것을 위해 매월 두 번의 일요일 휴식을 반납하고 먼 길을 달려오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태째 3학년을 맡아 수업을 하면서 나는 이제 조금씩 그들이 마음속에 떨쳐내지 못한 슬픔과 기쁨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게 한 장의 졸업증서가 아니라는 걸. 그들이 진실로 원했던 것은 뒤늦게라도 못다 한 시절을 다시 살면서 자신의 비어 있는 청소년기를 온전히 채우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2013. 7. 1.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