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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조선>·<동아>, 청소년을 ‘좌파’로 내모는가

by 낮달2018 2021.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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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 운동조차  ‘좌파’로 모는 보수 족벌 신문들

▲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취임식 뒤에 베풀어진 ‘깨소금 토크쇼’. ⓒ <오마이뉴스> 유성호

그예 이 땅의 청소년들은 ‘좌파’로 내몰릴 지경이 되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으로 자칫하면 10대 학생들이 ‘특정 이념 세력의 홍위병’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잠을 설친 이들은 <동아>·<조선>의 논설위원들이다. 이들의 눈물겨운 ‘우국충정’은 나라의 ‘미래’인 청소년들에게 ‘좌파’의 딱지를 붙인 것이다.

 

어쩌면 그리 두 신문은 닮은꼴일까. <조선일보>는 7월 2일과 3일에 걸쳐 “학생인권조례로 ‘촛불 홍위병’ 키워보겠다는 건가”와 “새 교육감에게 “시험 없애 달라”고 한 학생들을 보며”라는 제목의 사설로 학생인권조례와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취임식 관련 사설을 보냈다.

 

학생들이 ‘좌파’, ‘특정 이념 세력의 홍위병’이라고?

 

거기 화답이라도 하듯,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에 “어린 학생을 성인처럼 방임하자는 인권 포퓰리즘”(7.2.)과 “자기 자식이라도 ‘피켓시위’ 보고만 있겠나”를 내보냈다. ‘촛불 홍위병’과 ‘인권 포퓰리즘’, 기사가 학생 인권선언에 대한 거부 정서를 정면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뒤의 기사는 ‘일제고사 폐지’에 대한 학생들의 발언을 학부모의 정서에 기대면서 비난하고 있다.

 

두 신문이 낸 사설의 근거는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닮았다. 이들은 ‘2008년도 촛불’이 ‘인터넷의 괴소문’, ‘유언비어’(<조선>)로 말미암은 우발적 사건인 것처럼 이해하거나 학생들을 ‘거짓 선동’에 속았다(<동아>)고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근거 없는 소문에 휩쓸려 자제력을 잃고 집단행동을 하기 쉽다. 2년 전 광우병 파동으로 촛불시위가 처음 일어났을 때 참가자의 80% 이상이 중·고생이었다. 이들은 병든 소가 주저앉고 고꾸라지는 PD수첩의 선정적 장면과 분유·치즈·라면을 먹어도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인터넷 괴소문에 이끌려 “이제 열다섯 살인데 벌써 죽기는 싫어요.”라며 청계천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10대들은 이번 천안함 폭침 때도 미군 오폭설·좌초설·내부 파괴설 같은 인터넷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이며 또 다른 유언비어를 만들고 퍼뜨렸다.”

- <조선일보>(7.2.)

 

“광우병 촛불시위 때 일부 청소년이 거짓 선동에 속아 거리로 뛰쳐나온 사태를 이렇게 미화할 일인가. 교육계 전체가 반성의 재료로 삼아야 한다.” <동아일보>(7. 2)

 

한국 사회에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은 아니다. ‘2008년 촛불’은 바로 그러한 완전히 상반된 인식을 파생시킨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촛불’로 드러난 시민들의 집단행동은 검역 주권까지 포기하면서 미국과의 통상협정에 매달린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촉발된 것이었다.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설(7월 2일) ⓒ <미디어 오늘>에서 재인용

그러나 발생 2년이 지났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갈라져 있다. 그 한쪽에 정치권력과 행정부, 기득권에 집착하는 보수진영, 그리고 그들의 이해를 ‘국민의 이해’인 양 포장하며 여론과 사회적 의제를 왜곡하는 보수언론이 있다. 이들의 시각은 단순 명료하다. 그것은 ‘선량한 다수 시민’과 이들을 ‘선동하는 악의적 소수’라는 공식이고, 이들은 이 공식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는지 모른다. 이들의 입론(立論)은 늘 비슷하다. 정부와 권력은 기본적으로 선하다. 이 선의를 왜곡하고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집단과 개인은 어디든지 있다. 이들의 선동은 다수의 선량한 대중들을 기만하고 오도한다. ‘촛불’에 관한 한 방송조차도 그 악의적 선동에 동조, 가담했다.

 

국민이나 아이들은 조종되는 ‘로봇’이 아니다

 

MBC의 ‘PD수첩’이 그 좋은 예다. 나쁜 방송의 왜곡과 선동에 속은 수백만의 대중들이 한밤에 거리에 몰려 나와 무려 100일 가까이 거리를 밝혔다. 검찰은 ‘다양한 편집 기술과 왜곡 방법을 동원해 실제 취재한 내용이나 객관적 사실과는 다른 허위 방송을 했다’며 이들 ‘좌파 방송인’들을 기소했다.

 

‘피디수첩’이 허위 방송을 통해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명예를 훼손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판매업체의 업무를 방해했다는 혐의다. 이 ‘청부’ 수사에 언론의 정부 비판이라는 원론과 상식이 낄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무죄 판결’로 상식과 원칙을 환기해 주었다.

 

‘촛불’을 선동과 왜곡의 결과로 바라보는 시각에 따르면 모든 국민 대중은 ‘졸’이다. 이들은 마치 로봇처럼 조종된다. 2008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의 함성은 전적으로 악의적 선동에 속아 넘어간 선량한 시민의 꼭두각시놀음이다. 촛불과 관련해 ‘아무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이러한 사고와 인식체계의 한 정점을 이룬다.

 

이들의 이러한 뒤틀린 대중관은 학교 사회를 바라보는 데서도 그대로 관철된다. 전당대회에 출마해 “전교조는 우리나라 전체 좌파 세력의 보육원 구실을 하고 있다”고 발언한 ‘저격수’ 조전혁의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듯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보수 우익들은 교사의 ‘세뇌’에 따라 아이들은 ‘좌파’로 ‘홍위병’으로 자란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셈법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그들 자신도 그걸 믿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전교조 20돌을 맞은 이 땅은 이미 좌파의 천국이 되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스스로조차 믿지 않는 사실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효율적인 ‘선동’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터이다.

 

국민대중도 청소년들도 선량하지만, 선동에 따라 춤추는 바보는 결코 아니다. 아주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이해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은 나름의 균형과 슬기로 꽉 차 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부 여당이 의도한 ‘북풍’이 정작 천안함 침몰의 본고장인 인천에서조차 거꾸로 분 것은 그 좋은 보기였다.

▲ 아이들이 떠난 빈 교실. 아이들은 하루의 14시간 이상을 여기서 머문다.

두 보수언론은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의 과정에 시비를 걸고 있다. 이들은 일견, 체벌 금지, 두발과 복장의 자유, 야간 자율학습 선택권, 수업 시간 외 교내 집회의 자유, 교육정책 결정에 학생참여 보장 등 학생 인권과 관련된 사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척한다. 그러나 결국은 이들은 학생들이 ‘정치의 주체’로 길러야 한다는 논의 앞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인터넷 선동과 유언비어에 휩쓸리기 쉬운 10대를 ‘정치 주체’로 키우려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육정책 결정에 참여하게 하면 학생은 정치꾼, 학교는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 <조선(7.2.)>

 

“더구나 인권조례를 통해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나 학교 운영 참여권, 정규 교과 외 학습 선택권을 허용하는 것은 훨씬 심각한 정치적, 이념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동아(7.2.)>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마저 외면

 

이들 논의는 학생들의 ‘미성숙’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결국 이들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인권’이라는 화두다. 구미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제도로 운영되던 독립기관 ‘국가인권위원회’를 마치 반신불수처럼 만들어 버린 이유는 불문가지다. 다른 모든 이유를 떠나서 ‘인권은 보편적 가치’라는 사실을 이들은 외면하고 있다.

 

여섯 개 지방자치단체에서 진보 교육감이 당선된 점을 고까워하던 이들 보수언론은 진보 교육감들이 내세웠던 정책 의제들에 대해서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6개 시·도 진보 교육감들은 무상급식과 학용품 공짜 지원을 비롯해 평준화 확대, 외고의 일반고 전환 검토, 고교선택제 재검토, 전국 학력평가 반대, 교원 평가제 재검토 같은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국가의 미래 경쟁력을 고민했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당장 학부모·교사·학생들이 좋아하겠는가 하는 점을 앞세운 아이디어들이다.” <조선(7.3.)>

 

“청소년 인권 보장을 주장하는 청소년단체 소속 청소년들은 ‘인권조례 ○’ ‘무상교육 ○’ ‘일제고사 ×’ ‘교원평가 ×’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참석했다. 취임식장이 온통 ‘전교조 구호’로 채워지다시피 했다.” <동아(7.3.)>

 

▲ 일제고사는 폐지가 대세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보편적 복지의 일환인 ‘무상급식’ 등의 의제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중요한 교육정책 의제도 ‘포퓰리즘’이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본다. 이번 선거에서 핵심적인 공약 노릇을 해 온 ‘무상교육’, ‘일제고사’ 등의 의제들도 ‘전교조 구호’라는 형식으로 평가 절하해 버린다.

 

일제고사가 불러온 비교육적 파행사례는 심각할 정도다. 초중고 학생들은 문제풀이식 보충수업에 내몰리고 밤 9시까지 보충수업을 하는 초등학교도 있다. 성적이 낮은 학생에게는 전학을 강요하거나 이들을 특수반에 배치하는 비교육적 처사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다.

 

심지어 경쟁을 유발하기 위해 상금이나 상품권을 거는 예도 있는데 학력 향상 중점학교로 지정된 천안의 모 초등학교에서는 무려 6천만 원을 걸었단다. 해외토픽에나 오를 이런 가십이 통용되는 것은 전적으로 일제고사 3년이 가져온 눈부신 ‘성과’다. 그런 ‘성과’를 ‘거양(擧揚)’하기 위해서 학교가 골몰하고 있는 동안 성적이 낮은 아이들은 이런 심각한 ‘비교육적 차별’에 상처받고 있다.

 

“학생들에겐 인성 교육도 필요하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치열한 경쟁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학습이 더 중요하다.” <동아(7. 3)>

 

이들 보수언론이 지향하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들의 정의와 그들의 진리는 왜 세상의 낮은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보통 사람들의 접근을 제한하는 기득권과 강자들의 거룩한 성채에 지나지 않을까.

 

‘경쟁에 이겨라, 그것이 삶이다.’?

 

그들의 속내는 아주 단순 명료하다. ‘경쟁에 이겨라, 그것이 삶이다.’이다. 그 경쟁이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가, 경쟁에 뒤처지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적 배려가 있는가, 부모의 경제력이 아니라 국가의 공적 부조가 어떻게 아이들을 도와야 하는가는 거기에 없다. 더구나 ‘협동’ 따위가 설 자리는 애당초 없는 것이다.

 

종일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급식소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밤 10시까지 야간자습에 들어가는 아이들의 어깨는 무겁다. 아이들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경쟁과 희생을 말없이 받아들인다. 받아들이도록 잘 훈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현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권리에 대해 말하는 순간, 그들은 ‘좌파’가 되고, 특정 이념 세력의 ‘홍위병’이 될 수도 있다. 그게 백만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는 이 땅의 유수한 언론, <조선>과 <동아>의 ‘대단한’ ‘현실 읽기’다.

 

 

2010. 7.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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