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시인의 시편 ‘봄’을 읽으며
유난히 지난겨울은 추웠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하는 게 맞지만 고단하게 살아가는 헐벗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난겨울 추위는 혹독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상의 기온을 회복하긴 했지만, 여전히 바깥바람은 차고 맵다. 입춘 지나 어저께가 우수, 그래도 절기는 아는지 어느새 한파는 고즈넉이 물러나고 있는 낌새다.
아직 봄을 느끼기에는 이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는 ‘지난겨울’을 이야기하고 있다. 겨울의 막바지에 서 있지만 우리는 정작 이날을 겨울로 느끼지 않으며, 우리가 서둘러 온 이른 봄 가운데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계절 가운데 ‘봄’만큼 다양한 비유나 상징으로 쓰이는 게 또 있을까. 일찍이 이 땅에서 ‘봄’은 빛과 희망이었고, 해방과 독립이었다. 상화(尙火,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노래한 것도 봄이었고,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절정)라고 노래했을 때 육사가 그린 것도 봄이었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한 이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셸리다. 그러나 그의 봄은 상화나 육사의 그것처럼 비장하지 않다. 식민지 질곡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격동의 현대사, 수십 년의 군부독재 시대를 넘어야 했던 시인들에게 봄은 얼마나 비장했던지……. 그것은 쉬 오지 않는,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었고 희망이었으므로.
1970년대를 노래하고 있는 이성부(1942~ )의 시 ‘봄’은 그 간절한 ‘기다림’을 형상화하고 있다. 기다리는 봄이 오지 않는 상황은 ‘뻘밭 구석’과 ‘썩은 물웅덩이’로 비유된다. 그러나 봄은, ‘더디게 더디게’ 올 것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오는 봄은 자연의 필연적 순환이다.
그렇게 ‘더디게 더디게’ 오는 봄이지만, 그 봄을 맞는 일은 ‘눈부’시고 벅차, 소리마저 ‘굳’게 만든다. ‘자연의 순환’으로서의 봄이 인간의 삶과 이어지는 대목이다. 시인이 기다리는 봄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회복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봄,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
그리 힘들게 맞이하는 봄이다. 눈부셔 눈 감게 하고 입 얼게 하는 황홀한 봄을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너’는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 된다. 그 빛나는 봄의 자태는 ‘이기고 돌아온 사람’의 지위로도 모자랄지 모른다.
지난겨울은 결식아동 7만 명에게는 ‘더 추웠던 방학’이었다던가. 복지부가 재정 부담을 이유로 기준을 까다롭게 바꾸면서 여름방학 때보다 급식 지원을 받는 아동들이 7만 명이나 준 것이다. 그런데도 권력 주변에선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이라고 강변하는 시절이다. 방학 내내 점심을 굶거나 간식으로 끼니를 때웠던 아이들에게 봄은 ‘밥’이 되는 셈인가.
‘사실상 백수 4백만 시대의 도래’와 ‘올해 청년 취업자 25만 개 격감’, ‘환란 후 최악의 실업률’ 따위가 신문의 1면을 장식하는 시대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신용불량자’로 ‘실업자’로 전락하는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봄은 역시 ‘밥’이거나 ‘일자리’거나 최소한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꿈’인가.
YTN과 KBS에 대통령의 언론특보 출신 사장이 선임된 이래 그예 MBC에도 집권 세력의 의중이 관철되면서 이에 반발하는 노조의 총파업 투표가 압도적으로 가결되었다. ‘PD수첩’과 일련의 시국사건 재판 결과에 수구 세력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집권당은 ‘야간 집회·시위를 금하는 집시법 개정안’의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문화예술 진흥사업 활동 지원을 위해 설립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반문화, 반예술적 운영으로 문화계의 지탄받고, 작가들은 ‘시위 불참 확인서’ 제출을 요구받는 시대다. “MB 정부 2년, 민주주의 후퇴했다”라는 시민사회단체의 평가가 한갓지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쌔고 쌨다.
봄은 ‘밥’이고, ‘민주주의’고 ‘희망’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2010년,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 ‘민주주의’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이고, ‘밥’이고 ‘일자리’다. 지울 수 없는 ‘희망’이다. 그것은 이 어둡고 우울한 세상을 서성이며 바라보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희망의 단서다.
봄은 늘 꽃소식[화신(花信)]과 함께 오는 것. 그러나 아무리 주변을 눈여겨 둘러봐도 꽃소식은 아직 멀다. 며칠 전에는 도시 외곽을 무심히 한 바퀴 돌았다. 눈에 띄는 것은 여전히 무채색의 풍경이다. 어디 눈뜬 버들강아지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시냇가로 내려가니 얼음이 풀려 기운차게 흘러가는 냇물 아래 세상에, 파랗게 돋아난 풀이 물살에 부대끼고 있었다. 그렇다. 그렇게 봄은 얼음장 밑을 흐르는 냇물처럼 다가올 계절을 예비하고 있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실낱같은 온기로 시작한 봄은 이 완강한 겨울의 추위를 일거에 뒤집는다.
어쨌든 봄은 ‘빼도 박도 못할’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시구에서만 만나는 한갓진 미사여구로만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하여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찾아오는 이 황홀한 봄의 귀환 앞에서 우리 가슴 속에서 저 ‘불임의 봄’을 몰아내어야 할 터이다.
2010. 2.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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