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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방송고 체육대회, ‘가불’해 누리는 ‘대학생활’?

by 낮달2018 2021.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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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학생들과 치르는 체육대회

▲ 어제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방송고 한마음 체육대회'가 베풀어졌다.

어제(5월 20일) 방송고등학교 ‘한마음 체육대회’가 열렸다. 전적으로 학생회 자치로 꾸려가는 행사다. 아침에 출근하니 운동장에 천막 8동이 가지런히 쳐져 있다. 아, 이게 예사 행사가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이내 몇 통의 전화가 잇따른다. 오늘 부득이 행사에 참가할 수 없는 사람들의 전화다. 일단 등교일 25일 가운데 하루이니 출석관리가 엄격할 수밖에 없다. 조퇴를 하더라도 등교해서 허락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체육대회라지만 평상시와 다를 게 없다. 일요일이니 집안을 이끌고 있는 이들로서는 각종 경조사 참석은 물론이거니와 생업에도 바쁘다. 수업이 있을 경우에는 수업을 우선할 수밖에 없지만 행사일 경우에는 아무래도 참여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은숙 씨와 규항 씨는 모내기 때문에 학교에 나왔다가 이내 들어갔다. 이런 행사 정말 좋아하는데요, 너무 아쉬워요……. 남편과 함께 짓는 농사가 거의 백 마지기가 넘는다는 은숙 씨, 모야 기계가 내지만, 일꾼들 참과 밥을 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고. 규항 씨는 이웃 반에 재학 중인 마나님만 남기고 일찌감치 다시 들로 나갔다.

▲ 천막마다 음식이 푸짐했다. 음식들을 나누며 사제와 선후배들의 정의도 두터워졌으리라 .
▲배구 경기 . 운동복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은 선수들이 벌이는 배구는 묘기 (?) 가 이어졌다 .
▲ 풍선 터뜨리기 게임 . 풍선을 터뜨리려 잔뜩 애를 쓰는 선수를 사람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
▲ 교사 학생이 함께한 계주. 장화를 신고 빨간 팬티를 입고 뛰어야 하는 경기에는 교사들도 뛰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들쑥날쑥했다. 조금 늦게 나오는 친구, 정오를 넘기면서 바쁘게 돌아가는 친구들……. 그러나 그것과 무관하게 학생회 간부들로 꾸려진 진행요원들의 헌신으로 행사는 좀 느슨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날씨가 문제다. 올들어 가장 뜨거운 날이었다. 천막 아래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후끈한 열기가 천막 밑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러니 땡볕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은 오죽했을까. 행사 준비는 백전노장답게 아주 진국이었다. 한쪽 주방에선 큰 솥 가득 다슬기를 푼 시래깃국이 끓고 있었고 천막마다 각종 음식으로 푸짐했다.

 

행사를 맡은 진행요원들은 대부분 50대다. 2, 30대 젊은 친구들은 기껏해야 보조일 뿐이고, 행사의 큰 줄기는 모두 장년에서 맡는다. 지난 3년간 맞추어 온 사이들이라 내부 소통도 순조로운 듯했다. 무엇보다 이들의 활동은 헌신적이다. 자기가 맡은 궂은일을 기꺼이 처리하면서 이들은 매우 즐거워 보였다.

 

가끔 아이스박스에서 꺼내오는 냉장된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바지런히 행사를 꾸려가는 이들을 누가 고교생이라 할 것인가. 이들은 지금 대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캠퍼스 생활을 미리 가불해 즐기는 것이라 해도 좋은 것이었다. 제각기 경제활동을 하는 처지라 씀씀이는 대학생과 비길 바가 아니다. 이들은 지금 뒤늦은 고교 시절을 최상의 조건으로 통과하고 있는 셈이다.

▲ 상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즐겁다.
▲우승컵을 들고 포즈를 취한 학생회장과 학년 학생장들 . 백전노장의 포스 (?) 가 엿보인다 .

체육대회는 학년 대항 경기로 진행되었다. 각 학년이 쓰는 천막에 붙은 구호도 썩 의미 깊다. 1학년은 ‘설렘’이고, 2학년은 ‘기쁨’이고 3학년은 ‘사랑’이다. 배구와 족구, 피구와 400m 계주, 풍선 터뜨리기 등으로 짜인 경기는 2학년이 종합우승으로 상금 70만 원을 받으며 막을 내렸다.

 

모두가 몸을 아끼지 않고 행사에 참여했지만, ‘장화를 신고 빨간 여성용 팬티를 입고’ 뛰어야 하는 계주에 참여한 교사들도 한몫을 거들었다. 운동복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고 막무가내로 경기를 치른 나이 먹은 학생들과 젊은 친구들 간에 격의도 많이 준 것도 소득이다.

 

행사는 오후 4시께 모두 끝났다. 어지러운 운동장까지 말끔하게 청소하고 나서야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고마운 것으로 치면 되레 그들이 아닌가. 모두 수고했다고 나는 끝까지 남은 우리 반의 임원과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두 주 후에는 ‘부산’ 연합체전!

 

두 주 후 영남권 연합체육대회는 부산에서 베풀어진다. 전세버스로 이동해서 또 한 차례 행사를 치러야 하는데 사실은 교사들의 걱정이 많다. 당일은 견딘다 쳐도 이튿날 정규 수업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구를 이끌고도 쉬지 않고 운동장을 누비던 늙다리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이 아닌가.

 

 

2012. 5.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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