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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사과밭 열매솎기’

by 낮달2018 2021.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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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한 농가 봉사활동

▲ 길안에서의 사과 열매솎기 봉사활동. 아이들은 금방 일을 익혔다.

우리 학교에는 동아리가 꽤 많다. 연극, 영상, 요리, 과학, 역사, 문학, 미술, 풍물, 방송, 봉사 등 각 영역별 동아리가 순전히 저희 힘으로 꾸려지고 있다. 학교에서는 찔끔 예산을 지원하고, 지도교사를 배정하는 게 다인데도 아이들은 학교 축제 말고도 매년 한두 차례씩 발표회나 전시회를 빼먹지 않고 치러낸다.

 

봉사동아리를 맡다

 

연극 동아리를 한 해 맡아보고 난 이후, 나는 동아리 지도교사 노릇을 사양해 왔다. 동아리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선후배끼리 가르치고 배우는 체제다 보니 활동의 형식과 내용이 손댈 수 없을 만큼 굳어져 있는 동아리가 많다. 그런 걸 섣불리 고치겠다고 덤비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다. 공부는 바쁘고 활동 시간은 적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내용은 채워야 하는 체제에서 아이들의 굳어진 관행 바꾸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올해 시 동아리의 아이들이 지도교사로 모시겠다고 했을 때, 나는 간단히 그것을 거절했다. 거절의 변은 간단하다. 미안하다. 나는 맡으면 고쳐야 돼. 그러나 고칠 자신이 없어. 들러리나 서는 그런 지도교사 노릇은 안 하기로 했거든.

 

그런데 나는 뒤늦게 봉사동아리 위드(with)의 지도교사를 자청했다. 올해 내가 맡은 업무가 동아리 활동인데 이 아이들이 지도교사를 모시지 못해 안달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봉사 동아리니 지도 교사가 해야 할 일이 뭐 있겠냐, ‘기본’이나 하면 되지 않겠나 하는 계산도 했다.

 

그러나 타고 난 성정은 어쩔 수 없다. 뚜렷한 연간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던 아이들은 매년 이웃 남학교 동아리와 연합하여 시설에 서너 차례 다녀오는 형식으로 활동했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이 봉사활동을 통해 스스로 성숙해지고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한창 농번기인 5월 말에 농촌 일손 돕기를 가자고 제안했다. 인근 농촌에 반나절쯤 일손을 거들고 곁들여 농촌 이야기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농민회를 통해 길안면의 사과밭 적과(摘果) 작업을 소개받고, 봉사활동 확인은 경북청소년지원센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교사가 주도하는 봉사활동이 흥미로웠던가, 아이들은 스무 명 가운데 열여섯 명이 참여하겠다고 했다. 일요일 오전 8시를 전후해 길안으로 가는 28번 버스에서 만나기로 하면서 나는 절대 차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5월의 마지막 일요일(29일) 아침,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까지 버스에 탄 녀석은 단 아홉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늦잠을 자거나 우물쭈물하다가 차를 놓친 것이었다. 마중 나온 농민 김천동 씨 앞에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 열심히 일하는 아이들은 아름답다. 나는 날이 갈수록 아이들이 더 예뻐 보이기만 한다.
▲ 사과밭 주인 김천동 씨(43). 그는 시종 유쾌하고 친절하게 아이들의 작업을 도와주었다.
▲ 비빔밥 한 그릇씩을 뚝딱 비운 점심시간. 아이들은 농촌 이야기도 들었다.
▲ 참 시간에 잠깐 찍은 사진. 아이들은 뜻깊고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농촌체험 봉사활동, 사과밭 적과 작업

 

그러나 아이들은 저희끼리 계속 통화를 하더니 불참한 일곱 중에 여섯이 다른 차편으로 곧 도착한다고 알려왔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내 저희 아버지나, 할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승용차편으로 현지에 도착했다.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절인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믿는 구석’이 결국 자기 통제력을 약화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봉사활동만큼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거듭 환기하고, 다음에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 따로 참여하는 사람은 봉사활동에 참여시키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김천동 씨의 과수원은 길안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적과하는 방법을 간단히 교육받고 목장갑과 전지가위를 받아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천동 씨는 사과 농사를 꽤 많이 짓는데 아이들이 일하기 수월할 것 같아서 여기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사과 적과는 ‘열매 솎아내기’이다. 나무에는 열매가 꽤 총총 달리는데 충실한 열매만 남겨두고 간격을 잘 맞춰서 적당하게 솎아주어야만 나머지 열매들이 제대로 잘 자란다는 것이다. 적과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하는데 적절한 시기에 맞추어서 해 주어야 풍작을 기대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이내 몇 명씩 짝을 지어 작업에 들어갔다. 사과나무에 손이 닿는 부분만 작업하다 보니 작업은 힘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요령도 늘면서 작업이 재미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도 연신 손을 놀렸다.

 

나도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작업을 같이했다. 천동 씨도 옆에서 작업을 거들면서 이것저것 도와주었다. 작업이 손에 붙자, 천동 씨는 아이들이 금방 적과 요령을 익혔다며 아이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9시쯤 시작한 작업은 10시 반쯤 참을 먹기 위해 쉬었다. 아이들은 과수원 저온 창고 앞에 플라스틱 사과 상자를 깔고 앉아서 빵과 우유를 먹었고, 나는 천동 씨가 꺼내온 막걸리 몇 잔을 마셨다. 길안농민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그는 40대 초반의 아주 성실한 농민이었다. 초면이었는데도 어렵지 않게 우리는 구제역과 농업을 주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을 먹고 다시 시작한 작업은 정오가 한참 지나서야 끝났다. 내내 흐리던 날씨가 큰 부조를 했다. 햇볕은 작업을 끝낼 때쯤부터 쨍쨍하게 내리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근 식당에서 배달해 온 점심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적당히 시장해 있었고 밥은 아주 맛이 있었다. 아이들은 밥 한 그릇씩을 뚝딱 해치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그에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그는 간추려 농촌의 어려움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FTA 등 농촌의 위기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했는데 아이들은 그걸 얼마나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사과 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늘 후회를 합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좀 더 열심히 할 걸 하고 말이지요.

여러분들은 공부를 하니 나중에 좀 더 열심히 할 걸 하고 나처럼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별로 힘이 들지 않았기에 나는 폐만 끼친 게 아니냐고 했더니 천동 씨는 아니라고,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인근을 지날 때, 적과한 사과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가 들여다보아도 좋다고, 가을에 사과 딸 때 또 오라고 말했다.

▲ 만휴정 다리 위에서(위), 시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
▲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아이들은 5월의 싱그러운 풀빛을 닮았다.

우리는 그의 트럭에 타고 인근 16세기의 정자, 만휴정(晩休亭) 앞까지 가서 그와 헤어졌다.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아이들에게 만휴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은 만휴정 따위엔 별 관심이 없이, 물장구치는 데 열중했다. 그럴 나이다. 아이들이 정색하고 유적을 바라보려면 적어도 십수 년은 지나야 할 것이었다.

 

우리는 3시 버스를 타고 안동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즐거웠고, 아주 귀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들이 좀 더 힘이 들었어도 좋지 않았나 생각했다. 글쎄, 가능하면 가을에 다시 천동 씨의 과수원에 들러서 자기가 솎아준 사과가 무르익은 걸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2011. 6.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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