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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림녹화(愛林綠化), 식목일 부역의 추억

by 낮달2018 2024.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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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애림녹화, 식목일 부역

▲ 식목일에 나무를 심는 사람들 ⓒ 국가기록원

식목일 아침이다. 오늘은 청명(淸明)과 한식(寒食)날이기도 하다. 공휴일에서 제외된 지 오래여서 일요일이란 사실도 심상하다. ‘국민식수(國民植樹)에 의한 애림 사상을 높이고 산지의 자원화를 위하여 제정된 날’이라는 백과사전의 기술이 낯설다. 세상이 많이 바뀐 탓이다.

 

예전 같으면 민둥산 천지였을 터이지만, 요즘 산은 우거진 수풀 탓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얼마나 제대로 된 숲인가는 모르겠으나 산은 대부분 실한 숲을 이루었다. 땔감을 구하는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덕분이다.

 

식목일은 1949년에 공휴일에 지정되었다가 1960년 폐지되면서 3월 15일의 ‘사방(砂防)의 날’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식목의 중요성에 대두되면서 공휴일로 부활하였다. 식목일이 공휴일로 명운을 다한 때는 1990년이다. 18년이 지났는데, 그새 세월이 그렇게 지났는가 싶다.

 

식목일 하면 떠오르는 건 이른바 ‘사방 부역(賦役)’이다. 6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면사무소 등의 관공서의 문 앞에는 으레 ‘애림녹화(愛林綠化)’라는 구호가 붙어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전 국토 애림녹화 사업’을 매우 적극적으로 폈다. 대통령의 주 관심사다 보니 ‘군관민’이 대대적으로 식목일 행사를 추진했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일 인당 수십 그루씩 심게 했었다.

 

그런데 내겐 학교에서의 식목 행사는 별로 기억에 없다. 대신 주말이면 거의 한 달 내내 시행된 사방사업에 동원된 기억이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때는 ‘부역’이란 무상노동도 있었다

 

남녀 노유를 불문하고 집집이 한 사람씩 나와 인근 산등성이를 돌면서 묘목을 심는 부역이었다. 일렬횡대로 서서 뒷걸음질을 쳐가면서 마치 모를 내듯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를 심었는데 힘들지는 않았지만, 재미가 너무 없었다.

 

나는 늘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괭이를 들고 그 부역에 참여했다. 참가자는 대부분 장정이었지만, 개중에는 나처럼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고교생도 있었고, 가끔 젊은 부인네들이나 안노인들도 남편을 대신해 참석하기도 했다.

 

그 전근대적 형태의 동원 노동이 어떤 법률적 근거에 의해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에는 나무를 심거나 도로를 보수하는 등, 일 년에 몇 차례씩 부역에 참여해야 했다. 거기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참 가정이 어떤 불이익을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백과사전에서는 ‘부역’(statute labour)은 ‘국가 또는 개인이 법률에 의거해 제공하는 무상노동’이라 규정한다. 이는 ‘벌칙이나 처벌이 아닌 합법적인 의무라는 점에서 강제노동과 다르다.’ 부역은 공동경작·관개 사업과 같이 공동의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던 공동체의 사회적 작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봉건 왕조시대에는 부역은 국민의 의무이며, 수취제도의 하나로서 기능했다. 부역은 역사 발전과 함께 국가권력의 개별적·인신적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농민의 저항 등으로 변화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그러나 불과 40여 년 전에도 이 땅에는 그런 오래된 형식의 동원 노동이 존재했었다.

 

왕조시대와 달리 부역 불참이 무슨 물리적인 벌칙을 졌던 것은 아니다. 불참한 가정에서는 시골 공동체의 ‘울력’에 힘을 보태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가끔 선친께서는 불참한 대가로 사람들에게 막걸리 말이나 내신 것이다.

▲ 애림녹화 우표 (1966)

그 당시 내가 어른들 꽁무니에 붙어 다니며 소나무를 심었던 산등성이가 어디쯤이었는지는 모호하다. 그새 새마을운동이 지나간 마을의 원 형태도 무척이나 바뀌었고, 허술했던 산도 나무로 빽빽해진 탓이다. 무엇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내내 고향을 떠나 있었던 탓도 크다.

 

중학교 2·3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마을 앞을 지나는 경부고속도로를 내려다보는 산등성이에 우리는 부역으로 아까시나무를 심었다. 하필이면 왜 아까시나무였는지는 모르겠다. 척박한 산기슭에 심을 만한 마땅한 수종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 나무는 쑥쑥 자랐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산기슭 아래에 도로가 넓혀지면서 그 부분은 뭉텅 잘려 나가 버렸다. 지금은 아마 제대로 된 돌 축대가 그 산등성이를 떠받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어쩌다 고향에 들러도, 그곳을 무심히 스쳐 지나와 버린다.

▲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된 전북 남원시 향교동 산림녹화탑.

애림녹화 사업이 헐벗은 산을 나무로 빽빽한 숲으로 바꾸고, 공휴일이 폐지되면서 식목일은 이제 형식만 남은 듯하다. 국가 차원의 행사는 따로 없고, 산림청이나 지방 자치단체에서 벌이는 행사로 이날을 넘기는 모양이다. 오히려 봄철 산불 예방이 더 큰 과제가 된 듯한 느낌마저 있다.

 

산림청에서는 식목일에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주제로 전국에서 7만 명이 나무 심기 행사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전국 511헥타르(ha)에 백합나무와 상수리나무·금강소나무 등 경제수와 영산홍, 야생화 등 꽃나무 천만 그루를 심게 된다고 한다.

 

군부독재 시대의 최고 권력자의 주도로 이루어진 ‘애림녹화’ 사업은 이제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시대적 트렌드로 갈아입은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덥기보다는 잘 포장된 구호에 그칠 것이라는 매서운 여론의 평가 앞에 직면해 있다. 40여 년 전의 기억과 함께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과제는 개발독재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우울하게 환기해 주는 듯하다.

 

 

2009. 4.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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