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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대선’, 보수 영남의 선택

by 낮달2018 2021. 5. 8.

▲ 영남 유권자들이 지역주의와 색깔론에 따른 정치적 선택을 한다면 촛불의 교훈은 무화될 수밖에.

조바심과 불안의 ‘근원’

 

대통령선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5월에 흐드러지게 피는 꽃 이름을 따 ‘장미대선’이란다. 그러나 사실은 지난 겨우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밝힌 촛불로 말미암아 치르게 된 선거이니 ‘촛불 대선’이 훨씬 제대로 된 이름이다.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 결정 이후 두 달여의 시간이 꿈결같이 흘렀다. ‘꿈결같이’라고 쓴 까닭은 고작 두 달에 미치지 못하는 시간인데도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보내온 듯한 착시 때문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 의결과 헌재의 탄핵 심판 결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이를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지켜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드러난 사유만으로도 너끈히 이루어져야 마땅한 일이라고 확신하는 것과 실제 그것이 관철되는 것이 별개일 수 있다는 불안 탓이다. ‘상식’이 상식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정치적 질서의 왜곡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막상 탄핵 심판에 이어 박근혜의 구속까지 이루어진 뒤에 이어진 대선 국면도 어긋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촛불의 민의가 수렴되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깐, 시민들을 광장으로 불러낸 집권당의 이합집산이 어지러웠다. 한 차례 당명을 바꾸고, 쪼개지더니 어느 날 아침에 그들은 다시 ‘보수’를 핑계로 이전의 상태로 기꺼이 돌아갔다.

 

어쨌든 정권교체는 가능하겠다 싶더니 판세가 출렁일 때 지인들과 함께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되지 않겠냐는 우려를 나누기도 했다. 대선을 앞두고 올만큼 판세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우기는 난생처음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문득 옅은 불안을 느낀 것은 앞서 말한 상식이 관철되지 못하는 뒤틀린 정치 질서 탓이었다.

 

거의 매일 판세를 돌아보고, 거의 걸음을 하지 않던 유튜브를 드나들며 관련 영상이나 팟캐스트를 구독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최근에는 후보들의 유세 중계방송도 더러 들여다볼 정도까지 되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당선한 15대와 16대 대선에서도 나는 평상심을 유지했었다. 요즘처럼 미디어가 백화제방인 때는 아니었지만 그때도 거기 몰입한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나는 비교적 무심했었다. 관심을 기울이고는 있었지만, 조바심을 느낄 만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어느 날, 거기 일희일비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벗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김대중, 노무현 때도 무심했는데, 요즘 내가 왜 이리 이런 소식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어. 벗들의 진단은 그랬다.

 

“자네가 늙어서 그런 거지, 뭘…….”

“시간이 너무 많아서야. 관심을 둘 만한 다른 일이 없어서 말야…….”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네, 하고 얼버무렸지만 어쩐지 스스로 겉늙은 듯한 느낌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경우야 다르겠지만, 어쩌면 나도 ‘대선 과몰입 증후군’을 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떨떠름한 기분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지난 5일에 가족 모두가 함께 사전투표를 했다. 전체적으로 굳어진 판세에 이변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하지만 여전히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조바심과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다. 탄핵 소추 결의 때도 그랬고, 헌재 탄핵 심판 때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아니, 나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선거의 과정에서 흔들리고 초조해하고 지속적인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러다가 나는 내가 기다렸던 것은 김대중과 노무현이 각각 15, 16대 대선을 통해 이루어낸 승리의 재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기다린 것은 이명박 5년, 박근혜 4년 동안 상처 입은 민주주의와 공동체, 자유와 인권이 촛불혁명으로 이룬 이번 대선의 승리를 통하여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이었다. 나는 또 간절하게 바랐다.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린 이 땅의 수구 보수 세력들의 성채를 허물고 광장에 쏟아져 나온 공민들이 열어젖히는 민주주의의 새날을.

 

▲ 이 만평이 말하는 바는 너무 익숙해서 식상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거기 있다. ⓒ 한겨레 그림판 (5.4.)

지금까지 공표된 여론조사 결과로 미루어보면 정권교체는 이루어질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찜찜하다. 그 찜찜함의 정체도 이내 드러났다. 선거가 정점에 이를수록 되살아나는 수구 퇴행의 조짐들이 심상치 않다. 그것들이 새 정권에서도 갈등과 대립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겨우내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지역주의와 편 가르기에 기대어 ‘묻지 마’ 지지로 선출한 함량 미달의 권력과 정파들이 망가뜨린 나라를 재건하고자 촛불을 밝혔다. 그런데 그 촛불혁명의 결과로 치러지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는 이 선거판에 다시 망국적 지역주의의 망령들이 좀비처럼 되살아나고 있는 것 아닌가.

 

영남 유권자의 익숙한 선택과 민주공화국의 내일

 

박근혜의 국정농단이 국민에게 선사한 단 하나의 기여는 단시간에 확실하게 민주주의와 정치를 교육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환기한 것이지만, 그것이 탄핵 국면을 넘어 대선까지 치닫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탄핵까지였다. 본격적인 선거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보수세력의 위기의식에 지역민들이 편승하면서 촛불이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민심의 굴절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남의 보수 유권자들은 반문재인의 기치 아래 대안으로 홍준표를 상정했다.

 

처음에는 ‘보수의 품격’을 이야기하는 등 옥석을 가리는 듯한 시늉을 하긴 했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홍준표의 선동적 발언에 아닌 척하고 끌려가기 시작했다. 보수지만 다소 결을 달리하는 유승민을 ‘배신자’라 낙인찍고 대중은 ‘보수대결집’이란 구호 아래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다.

 

적어도 지난 반세기 이상을 지배했던 이 땅의 보수정권들은 지역주의와 색깔론이라는 몽혼의 미약으로 대중을 지배해 왔고 그것은 일정 이상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시골의 무지렁이 농부들조차 ‘종북’과 ‘빨갱이’론과 극우적 냉전주의의 전사로 만들어낸 것은 가히 신공이라 할 만하다.

 

지역주의와 안보 몰이에 취한 대중들은 이제 ‘품격’ 따위는 잊었다. 그러나 촛불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익숙한 정치적 선택에 매몰된 지역 대중들의 결집은 절대 아름답지 않다. 대중들이 지역주의와 색깔론에 근거한 배제의 선택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이라는 블랙홀 속에 빠지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유세가 이루어지는 대통령 선거일 전날, 선거 소식을 들여다보다 말고 우울해지는 심사를 달랜다. 더는 촛불의 가르침, 그 묵시의 교훈을 돌아보지 않는 주권자에게 주어지는 민주공화국의 내일을 나는 지금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다.

 

 

2017. 5.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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