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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퇴직일기

‘자유인’으로 첫발 내딛기

by 낮달2018 202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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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자유인으로 출발

 

어쨌든 2월 한 달은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마음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마다 두서가 없어서 몸과 마음이 두루 어정쩡하고 애매했다. 딱 부러지게 어떻다고 하지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지도 못하는 요령부득의 시간이 속절없었다.

 

3월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는 새날을 맞을 준비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 일요일 오후엔 머리를 깎았고 다음날 아침엔 공중목욕탕을 다녀왔다. 해마다 새 학년도를 앞두고 만날 아이들을 그리면서 준비하던 일상을 나는 자유인으로 맞이할 날에 고스란히 되풀이한 것이다.

 

금오산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마지막 토요일엔 금오산 어귀를 찾았다. 얼음 사이에서 봄을 부르는 꽃, 흔히들 복수초(福壽草)라 부르는 얼음새꽃을 찾아서였다. 이 꽃을 검색하다가 경북 환경연수원 화단에 피었다는 몇 해 전 지방신문 기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 금오산 경북 환경연수원 탐방로에서 만난 산수유 . 이제 막 봉오리가 벙글기 시작하는 등 산속의 봄은 더디다 .

얼음새꽃을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지라 조금은 설레는 마음이었다. 꽃이 피었는지 알아보자고 전화를 넣었지만, 휴무여서 연수원에선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연수원 건물 몇 동의 화단을 죽 살펴보았지만, 얼음새꽃은커녕 아직 산속은 겨울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나오는 길에 이제 막 벙글기 시작한 산수유를 만난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터지는 망울의 연노랑을 빼면 봄의 조짐으로 보기에는 남루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상간에 산수유는 활짝 꽃잎을 터뜨릴 거였다. 그게 봄이, 봄날이 펼치는 기적이니까.

 

그런데 꽃소식은 정작 엉뚱한 데서 만났다. 29일에 다시 꽃샘추위가 닥쳤다. 설마 하고 나갔더니 살갗에 닿는 바람이 바늘같이 매서웠다. 저녁에 옛 동료들과의 약속 장소에 간다고 마을 뒷산을 휘돌아가는데 그 산 중턱에 활짝 핀 매화 두 그루를 만난 것이었다. 망연해져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매화를 바라보기만 했다.

 

삼일절에는 아침 일찍 서둘러 역으로 나갔다. 지역 참여연대 회원들의 나들이에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독감을 앓고 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고 나는 살그머니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열차를 타러 나온 이들은 서른 명이 넘었다. 그러나 날씨는 여전했다.

 

대구 국채보상공원의 홍매화

▲ 대구 국채보상기념공원에서 만난 홍매화. 쌀쌀한 날씨에 피어난 꽃들은 봄을 증언하고 있었다.

대구역 대합실에서 그날 이른바 ‘대구 근대 투어’의 길라잡이로 나선 초석을 만났다. 날씨 부조가 전혀 안 되는 날이었다. 오전 내내 추위가 계속되었고, 오후 들어 볕이 나면서 겨우 날이 풀렸다. 8시 반부터 시작되어 오후 4시 반까지 가쁘게 진행된 답삿길은 삼만 보가 넘는 강행군이었다.

 

칠성바위부터 출발한 이 답삿길에서 나는 두 가지를 발견했다. 하나는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10년을 넘게 머물렀지만, 내가 알던 도시의 얼개란 게 기실 보잘것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 대구의 발견이다. 다른 하나는 무언가에 꽂히면 집요하게 천착하는 열정에서 비롯한 초석의 답사 갈라잡이로서의 ‘내공’이다. (그날의 답사기는 차근차근 써 볼 작정이다.)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부는 국채보상공원에서 나는 활짝 핀 홍매화를 만났다. 날씨가 아무리 뒤집히고 거꾸로 가도 봄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그 도도하게 피어난 화사한 빛깔이 이미 봄이 기정사실인 것을 넌지시 알리고 있는 듯했다. 경북대 의과대학 화단에선 흔히 청매라고도 부르는 백매화도 만났다.

 

더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의 시작

 

3월 2일은 학교가 2016학년도를 여는 날이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의 시작이었으므로 나는 느긋하게 일어났다. 잠깐 나는 학교에 남은 동료들과 아이들을 상상하다 말았다. 더는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강원도에서 걸려온 후배와 이번에 같이 퇴임한 부안 정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기분이 어떠세요? 글쎄, 좋다고 해야겠지요?

▲ 뒷산 중턱에서 만난 매화. 추위에도 피어나는 게 매화다.

오후에 사진기를 둘러메고 어저께 확인한 매화를 찍으러 갔다. 며칠간의 추위에 얼었다 녹은 듯한 매화를 렌즈에 담고 있는데 잔등에 쏟아져 내리는 볕은 쌀쌀했지만 이미 봄볕이었다. 나는 돌아오면서 여전히 무채색의 어두운 산과 숲의 빛깔을 일별하며 다시금 이미 성큼 다가선 봄을 확인했다.

 

어제(3일)는 며칠간 곤두박질친 수은주가 회복되면서 한껏 쳐 오른 날이었다. 최고 기온이 15도가 넘었다. 북부지방의 선배가 전화를 해 왔고 5년 전에 퇴임한 친구 내외가 집에 들렀다. 어떤가? 그래, 좋긴 한데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그래, 그럴 거야…….

 

내일은 인근 동네 도서관에 들를 생각이다. 등록하고, 정기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방문할 작정이다. 자체 운영 교육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거기에도 참여해 볼 생각이다. 물론 어떠한 상황에도 그게 새로운 구속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말이다.

 

 

2016. 3.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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