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늦은 오후, 네 시가 넘어서 사진기를 들고 봄을 찾아 나섰다. 최남선이 수필 ‘심춘순례(尋春巡禮)’에서 쓴 표현을 빌리면 ‘심춘’이다. ‘심춘’은 일간지 ‘심인(尋人)’ 광고에서와 마찬가지로 ‘찾을 심(尋)’ 자를 썼으니 직역하면 ‘봄 찾기’다.
최남선의 수필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국토를 돈 기록이니 ‘순례’가 제격이지만, 동네 뒷산으로 꽃소식을 찾아 나선 길을 ‘봄 찾기’라 쓰는 것은 좀 무겁기는 하다. 그러나 봄이 와도 한참 전에 와 있어야 할 시절인데 유난히 늦은 꽃소식에 좀이 쑤셔 집을 나섰으니 ‘봄 찾기’가 지나치지는 않겠다.
인근 대구에는 개나리가 만개했다는데 안동의 봄은 여전히 을씨년스럽다. 기온도 기온이려니와 사방의 빛깔은 아직도 우중충한 잿빛이다. 반짝하는 봄기운에 서둘러 피기라도 했을 법하건만 날마다 주변을 살펴봐도 꽃소식은 여전히 멀다.
꽃소식이 아쉽다고 했지만, 내가 지역의 골골샅샅을 훑어보고 다닌 건 아니니, 내가 말하는 꽃소식은 내 일상의 반경 안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어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산 밑, 담벼락 아래에 꽃이 피어 있었다고 한들, 내가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진기에 필름 카메라에 쓰던 표준 단렌즈를 물려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언젠가 내가 쓴 글에, ‘안동에 가장 먼저 봄이 오는 곳’이라 규정한 말구리길 부근의 야산이다. ‘가장 먼저 봄이 온다’라고 한 것은 거기가 이 땅에서 내가 처음으로 매화를 만난 곳이기 때문이다.
말구리길 부근의 낡고 퇴락한, 지붕 낮은 집들 사이로 야산을 오르는데 입구에 성급히 피다 만 개나리 몇 송이가 꽃잎을 닫고 있었다. 역시 이 산등성이에 봄이 좀 이른 것일까. 비탈진 밭 가장자리에 선 두 그루의 매화나무에 달린 꽃봉오리가 오종종하다. 개화한 놈은 그중 한 2, 3할쯤이나 될까.
매화는 사군자의 으뜸으로 눈 속에서 피어나는 속성을 기려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 매화를 보면서 그런 ‘고상한’ 평가를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꽃에 대한 편견 탓일까, 나는 매화의 외양에서 ‘절조(節操)’를 읽어낼 만한 눈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매화는 꽃송이 자체만으로는 매우 고결한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백매의 경우, 다섯 장의 꽃잎 속 노란 꽃술이 연출하는 안정감은 차분하고 그윽하다. 그러나 나무가 온몸으로 드러내는 느낌은 그리 시원하거나 담백하지 않다.
우선 가지에 꽃이 너무 많이 핀다. 조그만 가지에 다닥다닥 붙은 꽃봉오리는 ‘오종종하다’란 표현이 적실할 정도다. 한눈에 들어오는 매화꽃의 느낌은 여느 꽃과 거의 다르지 않다. 꽃과 잎, 가지와 줄기가 어우러져 풍기는 느낌은 흔히 말하는 ‘아우라’와는 거리가 멀다. 빽빽하게 핀 조그만 꽃잎이 어지러우니 의연하다고도 고고하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수동의 단렌즈로 피사체를 담는 건 쉽지 않다. 눈어림으로 거리를 재어 거리를 맞추고 사진기를 움직여서 더 세밀하게 초점을 맞추지만, 흔들림을 넘기는 쉽지 않다. 흔들림 방지 기능이 있는 기계지만 기계적 메커니즘이 그걸 완벽히 보장하지는 못한다. 실패할까 봐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기실 건지는 것은 몇 장 되지 않는다. 매화 송이를 담은 사진들 가운데 제대로 초점이 맞은 게 드문 건 그런 까닭이다.
산등성이로 오르는 밋밋한 산길을 오르는 데 아니나 다를까, 그만한 자리에 지난해에도, 지지난해에도 만났던 산수유 어린나무가 틈입자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싹이 나는 볍씨처럼 길쭉한 모양을 한 꽃잎이 선명하다. 아직 핀 지 얼마 안 되는 새 꽃이다. 노란 꽃잎 너머로 빨갛고 파란, 산 아랫마을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산수유 위쪽에 핀, 노란 꽃은 생강나무다. 산수유는 본 가지에서 다시 잔가지가 나와 꽃송이가 달리지만, 생강나무꽃은 보통 본 가지에 바로 꽃이 핀다. 즉 산수유는 꽃자루가 길어서 꽃이 위로 모여 피지만, 생강나무는 가지에 꽃이 붙다시피 해서 피는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아이들에게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이야기해 주는데, 아이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할 뿐, 별 반응이 없다.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의 동백꽃이 바로 생강나무꽃이라면 그제야 아이들은 아, 탄성을 지를 뿐이다. 하긴 우리도 그랬다. 저 시기의 아이들에겐 자신과 무관한 외부에다 시선을 돌릴 정신적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등성이를 마저 올라 지난해 내가 가꾸던 텃밭을 내려다보며 산을 휘돌아 내려왔다. 혹시나, 하고 아파트 화단을 둘러보았더니 명자나무가 빨갛게 꽃봉오리를 맺었다. 단단해 뵈는 회갈색의 가지에 터질 듯 서너 송이씩 맺은 붉은 꽃봉오리가 고혹적이었다.
봄을 찾다 돌아왔지만, 여전히 사방은 잿빛이다. 이 풍경에 초록이 스미려면 아직도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숨어 있는 봄이란 그런 것, 어느 날 갑자기 봄은 기정사실이 되고, 꽃소식이 줄을 이을 것이다. 미처 챙기지 못한 사이에 명자꽃이 화단을 빨갛게 물들이고, 아파트 담장에도 노란 개나리의 행렬이 번져갈 것이다.
2011. 3.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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