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합창단원 해고 소식에 그는
<오마이뉴스)> E노트에 오른 기사 가운데 세계 최정상급 지휘자로 명성을 얻고 있는 정명훈에 관한 기사가 유독 관심을 끌었다. <레디앙> 블로그에 오른 그 글은 파리에 사는 진보신당 당원이 쓴 글로 보이는데 세계적 음악가인 정명훈에 대해 유쾌하지 않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상당한 장문의 기사를 요약하는 건 쉽지 않은데, 골자만 따면 이렇다. 파리의 진보신당 당원들은 ‘전원 해고된 한국의 국립오페라단 합창단 소식’을 듣고 그들의 복직을 위한 연대활동을 벌이는 있다. 이들은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정명훈을 만나 지지 서명을 요청했는데, 정명훈은 뜻밖에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며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쾌한 반응의 수준이 사뭇 다르다. 파리의 공연예술노조 위원장, 파리 오페라 합창단 단원들, 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 단원들 등이 연대와 지지의 뜻을 즉각 표한 것과 달리 어렵사리 만난 그는 매우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정명훈은 '지지 서명'을 거부했다
“도대체 이게 뭐예요. 이게 뭐 하자는 일이에요?”
“이 합창단이 없어졌다고, 그 합창단을 살려야 되겠다고 지금 여기 와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에. 그 사람들을 꼭 구해야 돼요?”
“도대체 얼마나 노래를 잘하기에…….”
“한국은 합창단 해체해도 다음 날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500명 금방 모입니다. 한국에서는 합창단 때문에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대체 왜 해체했다는 겁니까, 이유가 뭐래요?”
“(경영효율, 예산 절감이 이유라니까) 거봐요. 예산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 예산 당신들이 어디서 만들 거예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건데.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봐요. 내가 서울시향에 있는데 거기서 일 년에 5~6명씩 해고당해요. 여기만 해고당하는 사람들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온 나라가 다 그러구 있는데, 합창단 하나 없어졌다고……. 이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그리고, 도대체 나더러 뭘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서명하라구?”
“(6페이지에 빼곡히 담긴 바스티유 오페라단원들의 서명을 보여주고 한국에서 국회의원들이나 정부에서 오로지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서명운동에 촉각을 곤두세운다고 설명하자) 그거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내가 한국 가서 이거 알아볼 거예요. 오페라 단장한테 물어보죠. 어떻게 된 건지.”
“촛불시위, 그게 말이나 됩니까?”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예술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함께 일하는 세상을 위해서 연대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러니까, 당신들이 그 100만 명이나 촛불 들고 거리에서 서서 미국 쇠고기 안 먹는다고 시위하는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죠? 40년 전에는 미국에서 뭐 안 갖다주나 하면서 손 벌리고 있더니, 이제 와서는 미국산 쇠고기 안 먹겠다고 촛불 들고 서 있는 그 사람들.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알았어요. 알았어.”
- <레디앙>의 기사 중에서 발췌. 이하 같음.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저기 아프리카나 가서 도와줘요. 여기서 그러지 말고.”
“도대체 제정신을 좀 차리세요. 공부 좀 하란 말이야. 세상이 그런 게 아니야. 이 계집애들이 말야. 한밤중에 찾아와서…….”
“기도하라구, 기도…….”
정명훈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있으면서 아프리카 아이들과 교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또 그는 여기저기서 불우한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를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같은 음악 일에 종사하고 있는 동료 예술가보다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훨씬 밟혔나 보다. 고매한 인격이라고 해야 하나. ‘무개념’이라고 해야 하나,
‘서울시향에는 일 년에 5~6명씩 해고당하고 있고, 온 나라가 다 그런데, 합창단 하나 없어졌다고’ 설레발을 칠 게 뭐냐는 예술가 정명훈의 예술가적 자질이나 인식 따위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 점은 예의 기사에서 글쓴이가 누누이 강조하고 있으니 자칫하면 이는 한갓진 동어반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합창단원을 집단해고한 이 잘난 정부의 '천박함'은 논외로 치자. 대 예술가 정명훈은 예술의 고장 프랑스 파리에서 보여준 이 일련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밑천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우리는 드러난 대로 정명훈을 이해하면 그뿐이다. 나는 오히려 그가 던졌다는 마지막 충고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는 ‘기도하라’고 말했다
그는 ‘기도하라’고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그것은 19세기 산업혁명 당시에 노동 착취에 시달리던 선량한 노동자들에게 던진 기독교의 격려였고, 70년대 근대화의 주역이면서 살인적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을 위로하던 주류사회의 위무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필경 모모한 권력자들이 출석하는 모모한 대형교회의 연단에서 들려오는 소리고, 그것이 모든 축복의 원천이라고 믿는 일단의 정교일치 주의자(?)들의 언어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땅에서 모든 권력과 통하는 든든한 통로이기도 하다.
위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잠깐, 체 게바라를, 프란츠 파농을 생각하다가 말았다. 굳이 그들을 깨워 이 어처구니없는 장면에 초대할 필요는 없겠다. 처음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명훈은 자신의 계급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구먼, 하고 말이다.
나는 물론 그를 전혀 모른다. 방송이나 지면을 통해 드러난 그의 이력 외에 나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해서 따로 특별히 알고 싶은 점도 전혀 없다. 나는 단지 그가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 계급이고, 사계의 권위자로서 막강한 문화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단순하기 짝이 없는 세계와 현실 인식은 그러한 그의 계급에서부터 비롯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하다. 용산 참사를 보고 분노하고 거기서 권력과 자본의 횡포를 읽는 눈 밝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거기서 철거민들의 도심 테러, 혹은 자살폭탄 테러를 읽는 지엄하신 이 땅의 국회의원들도 있다.
미네르바 구속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대한 침해와 도전이며, 그에게 적용된 허위사실 유포죄의 위헌성을 읽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국가 신인도에 영향을 미쳐 국가 경제를 위험에 빠뜨린 소영웅주의는 처벌받아 마땅하다고 거품을 무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은 부득이한 듯하다. 나는 계층이나 계급과 무관하게 한 시대의 정신과 가치가 두루 공유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싶다. 그러나 이 소박한 바람은 소망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세상은 나날이 사람들을 두 부류로 분명하게 가르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정명훈이 선 자리를 확인하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의 자리와는 다른 곳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그가 100만 명의 촛불을 이야기하면서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가 그 촛불과 무관하게 안전한 육식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지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부유한 강남구 주민들이 아주 영리한 계급투표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한 것과 주류 음악가이자 최고의 문화 권력 향유자인 정명훈이 ‘해고’나 ‘합창단 하나 없어지는 상황’을 무심히 넘기는 것은 절대 다르지 않을 터이다.
‘권력의 방송 장악’을 저지하기 위해 파업에 나선 언론노동자들의 싸움을 바라보며 ‘홍위병들이 권력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해 각 분야에서 저항’하고 있다고 한 작가 이문열의 세계 인식 역시 정명훈의 그것과 하나의 동심원으로 겹친다.
그런 뜻에서라면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억압과 착취에 저항해 싸운 이들, 이를테면 체 게바라나 프란츠 파농을 떠올리다 만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그들을 이 장면에 부르는 것은 그들이 피와 땀으로 이룬 가치에 대한 가늠할 수 없는 모독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정명훈의 부당해고에 바스티유 오페라 노조는 함께 싸워주었다
정명훈이 1994년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했을 때, 그는 노조의 지원을 받아 함께 싸웠고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현재 지휘하고 있는 서울시립합창단에는 노조가 없다. 그가 취임하면서 ‘음악 하는 사람들이 무슨 노조냐’라고 일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스티유에서야 부당해고 당하기도 했지만 여기서라면 정명훈은 끄떡없을 터이다. '그네들의 도시' 서울에서 그가 해고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파리에서 블로거가 전하는 소식의 마지막은 이렇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환멸과 분노로 떨고 있는 것 같다.
“불우한 아이들을 위한 콘서트를 여는 자비를 베풀 수 있을지언정, 수십 명 예술가가 일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아도 채워 넣을 예술가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아무 상관 없다는, 구세계의 모순에 온전히 빠져있는 자기중심의 거룩한 예술가. 어마어마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정녕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단 말인가.”
십 년도 전의 일이다. 사실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명훈은 남다른 학교 경영으로 이름이 높은 경남의 어느 시골 고등학교에 아들을 진학시켰다고 했다. 그때 우리는 그 학교의 명성이 그 같은 명사의 자제들마저 불러들이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의 선택에 대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외국인학교나 국제고 따위에 보내는 게 그의 삶과 품위에 맞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애당초 글을 시작할 때의 마음과는 걸맞지 않게 글은 자꾸만 꽈배기처럼 꼬이기만 한다. 마음은 얼음 같은데 나는 내 더듬대는 언어가 마치 신열을 앓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보여준 행위에 대한 비판이기보다는 잔뜩 꼬인 감정의 분출에 훨씬 가까운 듯하기 때문이다.
좋다. 이 빈정댐과 경멸이 그의 명성과 자존에 털끝만 한 흠집도 내지 못할지도, 우리가 시방 그와 그가 속한 주류의 계급에 보내는 야유가 어정쩡한 자위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그게 우리의 방식이다. 당당하게, 우리가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과 정직하게 교유하는 방식이라는 걸 말하겠다.
2009. 3.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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