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춘신(春信), 봄소식을 기다리며

by 낮달2018 2021. 3. 13.

좀 무심하게 2011학년도를 시작했다. 담임을 맡지 않게 되면서 3층 1학년 교무실에서 1층의 본 교무실로 내려왔다. 학년 교무실에 비기면 두 배는 넘을 널따란 교무실은 지난해 수천만 원을 들인 인테리어 공사로 쾌적해졌다. 사방 내벽을 원목으로 처리해서인지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는 걸 느낀다.

 

배정받은 자리도 마음에 든다. 교감 옆자린데, 지난해 학년을 같이 한 동료들 셋이 옹기종기 모였다. 왼편으로 개수대와 정수기, 출입문 등이 모두 가깝고, 뒤쪽의 수납공간도 마음에 든다. 창을 등지고 앉으니 실내가 한눈에 들어와 시원하다. 드나드는 아이들로 부산한 학년 교무실과 같은 활기는 없지만, ‘절간’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도 좋다.

 

수업 시수는 지난해와 같은데 보충 시간이 줄면서 네 시쯤에 수업이 끝나는 날이 이틀이나 된다. 지난주에 처음으로 정시 퇴근을 하면서 나는 이 ‘기적’ 같은 일상에 감격했다. 정규 수업 전의 이른바 0교시 보충수업도 이틀밖에 없다. 토요일에도 수업이 한 시간 있었는데 수업계의 요청으로 이를 월요일로 옮기면서 수업이 없어져 버렸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맡지 않게 되면서 얻게 되는 ‘여유’는 적지 않다. 출근하자마자 학급을 돌아보지 않아도, 쉬는 시간에도 부러 교실을 한 번씩 기웃거리지 않아도 된다. 학년 초에 담임에게 쏟아지는 이것저것 소소한 일거리로부터 놓여나고, 수업 이외의 시간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 물론 이 ‘여유’는 아이들로부터 해방되면서 감내해야 할 ‘무소속의 외로움과 소외’를 대신해 얻는 것이다.

 

올해도 새로 만날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여전히 설레었다. 입학식을 앞두고 미리 머리를 깎고 목욕을 했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올 2월에 헤어진 아이들에게 남은 ‘미련’과 이어져 있다. 첫 시간에 나는 아이들에게 저희 선배들 얘기를 하면서 일 년 동안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자고 말했다. 아이들은 알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그렇게 느껴서인지 아이들은 지난해 아이들과는 달리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무관하게 화들짝 웃음을 터뜨린다든지 별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 대범해 보이는 면마저 엿보였다. 아이들에게 미리 주눅이 들어 있는 건가, 하고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 년 중 가장 긴 3월 둘째 주가 지났다.

 

내 책꽂이 위에 네모난 화분 하나가 놓였다. 옆자리의 동료 건데 지난해부터 내 책상 앞에 놓여 있었던 놈이다. 나팔꽃잎을 닮은 넓고 시원한 잎사귀, 아이비(ivy)라 불리는 두릅나뭇과의 늘푸른 덩굴나무다. 이사를 오면서 이 녀석이 새잎 하나를 피워냈다. 맨 위 왼편에 새로 돋아난 연록빛의 잎이 그거다.

 

“내려오더니 훨씬 싱싱하게 잘 자랐어요. 아무래도 여기가 환경이 나은가 봐요.”

동료가 지르는 탄성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나도 좋은 걸 느끼는데 예민한 풀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연록 빛 새잎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직도 미처 이르지 못한 ‘봄’을 생각한다. 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 나는 처음으로 봄을 간절히 기다렸다.

 

추위보다 더 맵고 찬 것은 세상살이다. 구제역의 터널은 아직도 끝이 보이질 않고 다락같이 오른 물가 앞에서 서민들은 넋을 잃었다. 때맞춰 찾아온 듯한 전세대란은 헌법에 있다는 ‘행복추구권’을 무색하게 만든다. 여전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3월인 것이다.

 

오늘 오후엔 비 소식이 있고, 이어 꽃샘추위가 다시 찾아오리라고 한다. 3월 추위는 그러나 아이들의 ‘발랄’과 ‘생기’를 덮을 수는 없다. 가슴팍에다 자기 동아리를 알리는 커다란 이름표를 달고 1학년 교실을 순회하는 2학년 아이들의 들뜬 얼굴 너머에 봄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어쨌든 교사 출입문에 어지럽게 붙어 있는 동아리 회원모집 포스터가 3월과 새 학년도를 분명하게 환기해 준다. 꽃샘추위를 예비하고 있지만, 오늘 오후의 햇살은 넉넉하고 따뜻하다.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는데 불현듯 이 고장 출신 김종길 시인의 시 한 편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춘니(春泥)’, ‘봄의 진흙’이라는 뜻이겠는데, ‘니’의 어감이 싱싱하게 살아 있다. 그뿐인가. 나는 탱탱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는 새봄의 활기를 이처럼 명료하게 그려낸 시를 따로 알지 못한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과 “연식 정구의 흰 공 퉁기는 소리”의 감각은 바야흐로 언 땅이 녹기 시작하는 3월의 생생한 묘사다.

 

출근길에 날마다 눈여겨 둘러보건만, 아직도 주변의 산수유는 잠잠하다. 기다리는 봄은 더디고 이웃 나라를 덮친 대지진과 핵발전소 폭발 등 궂은 소식만 들려온다. 하기야 봄이 아니 온 것은 아닐 터이다. 이미 봄은 왔으나 세상이 그 봄을 맞기에 아직 차고 어두운 것일 뿐이다.

 

2011. 3. 14. 낮달

댓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