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가지치기, 혹은 거름과 물 주기

by 낮달2018 2019. 2. 16.
728x90

졸업식, 아이들을 보내며

 

▲ 학부모의 참기름 선물

학년 말이다. 한 해 농사를 다 지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 농사는 사람 농산데, 요즘 이 농사꾼은 고단하다. 이 작물은 제멋대로 자라는 성질이 있어서 농사꾼은 제풀에 지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을 기르는 이 농사꾼 중에 으뜸은(말하자면 ) ‘담임이다. ‘생살여탈권에 준하는 권한을 무제한 행사했던 옛날과는 다르지만,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밀한 교감 같은 것도 가능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3년을 내리 쉬고 지난해 3, 스스로 원해서 3학년 담임을 맡았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비담임으로 지내면 몸의 평화정신의 이완을 맞바꾸어야 한다. ·종례에서 해방되고 반쯤은 강시처럼살아도 된다. 종이 울리면 무조건 반사로 교실에 들어가고 다시 종이 울리면 교무실로 돌아오는 그 간략한 동선에 길들다 보면 짜장 자신이 선생인지 샐러리맨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학급 담임,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약하리라”

 

태평성대는 그래서 내겐 마친 마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완벽한 보온이 흐리멍덩한 생각으로 이어지는 걸 꺼려 한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는 편이니 그걸 뽕 맞은 거로 비유하는 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 이태쯤 비담임으로 낭창대다보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자못 비감한 심정이 되기도 하는데, 지난해 담임을 자청하면서 든 기분이 꼭 그랬다.

 

늘 그렇듯이 첫 시작은 거창하다. 학급운영과 관련한 온갖 아이디어가 머리를 어지럽혀 가끔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그러나 만만찮은 업무와 수업에 시달리고 아이들과 나를 가로막는 게 단순히 서른 몇 해의 시차(時差)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등 근본적 차이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서 나머지 시간을, 요리조리 주무르던 계획과 욕심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으로 쓰게 된다. 그야말로 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네 끝은 미약하리라.’.

 

담임의 역할은 아이들 일상의 통제자가 아니라 조력자(도우미)’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1995년 방영된 김운경의 드라마 옥이 이모에서 여주인공을 가르친 초등학교 선생님(그 배역의 탤런트 이름은 잘 모르겠다. 하여간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 이다.)은 굉장한 철학자였다. 그이가 맡은 반의 급훈은 꽃들아, 너희 맘대로 피어라!’.

 

복직한 이듬해였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 전율을 느꼈다. “너거 맘대로 피라꼬! 저 시절(드라마의 시대적 배경은 60년대쯤이었다.)에 이미 저런 생각을 한 꼰대가 있었다고!” 30년쯤 후 정년을 맞은 예의 선생님은 자신을 초청한 옛 제자들에게 고백한다. “여러분과 함께한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때, 10년을 이미 넘긴 밥그릇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몸이 잔뜩 졸아붙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좋은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은 그래도 난 나쁜 교사는 아닐 거야쯤으로 어물쩍 후퇴하고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보다는 옛날과는 너무 달라진 요새 아이들을 핑계로 아이들과의 사이에 시나브로 자라고 있는 벽과 틈 앞에서 손을 털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 모델로 상정한 교사상이 시간의 흐름 속에 닳아 그 형체가 흐릿해질 때쯤 드디어 노틀의 문턱을 슬그머니 넘는 것이다.

 

‘좋은 교사’ 되기의 어려움


솔직히 담임을 맡을 때만 하여도, 나는 여전히 싱싱하거나, 적어도 상하지는 않았다고 착각했고, ‘현실과 열정을 혼동하지 않으며, 스무 해를 넘긴 만만찮은(!) 관록이 여러 문제를 충분히 풀어갈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할 수 있는 일할 수 없는 일의 경계에서 헤맬 만큼 어리석지 않은, 아주 노회한 접장이라고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변화는 당연하다.’ 시절도 다르고, 그 시대를 관통하는 공기도 다르다. 당연히 고정된, 정형화된 학생관()에 기대어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안이하고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때로 아이들의 변화는 교사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깊이 그리고 빨리 다가오는 것이다.

 

▲ 내용은 허술, 포장만 그럴듯한 문집.

예의가 없다거나 자기표현에 지나치게 솔직하다거나(관심을 두는 교사에게 그냥 내비둬 주세요.”라고 항변하는 아이들을 한 번만 만나보면 싸가지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는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아이들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회의다.

 

 

교사 앞에서 껌 봉지와 과자봉지를 천연덕스럽게 버려 놓고도 눈살을 찌푸리는 교사를 향해, 뭐가 문제냐며 눈을 말똥하게 치뜨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얘들에게 공공의 가치공공선에 대해 얘기하는 건 부질없다는 생각이 앞선다. 물론 잘못은 아이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것도 가르치지 않았거나, 가르침을 무화하는 습관성 범칙몸으로 가르친교사를 포함한 어른들에게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1학기를 마치고, ‘아이들 소리를 무기명으로 받아 보고 나는 내가 이미 삐딱길로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이들은 내가 가끔 해 대는 훈계를 잔소리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내가 다가간 거리의 반쯤도 내게 곁을 주지 않았던 듯하다. 전적으로 내 부덕의 소치겠지만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사무적인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나란 존재는, 절대 짧지 않은 각급의 학교에서 만나는, 하고많은 담임 중의 하나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일 것이었다.

 

‘교감’과 모둠일기, 문집 펴내기 과제

 

2학기 들면서 나와 아이들 관계는 훨씬 부드럽고 친밀해졌다. 그제야 기본적 이해와 신뢰가 생긴 듯했다.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내 개똥철학이 거푸 피력되었고, 긴가민가하던 아이들도 조금씩 머리를 주억거리는 것 같았다. 가장 경직되어 있던 우리 반 수업이 가장 부드러운 시간으로 바뀐 것도 2학기 들어서였다. 내가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이른바 교감(交感)’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학년 초에 딴에는 명쾌하게 펼쳐 보인 내 학급운영 계획에는 모둠일기 쓰기문집 펴내기가 가장 굵직한 주제였다. 6명씩으로 짠 모둠별로 쓰는 모둠일기는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이면서 동시에 사제 간 커뮤니케이션의 통로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돌아가며 쓰는 공동일기를 쓰게 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얘들은 듬성듬성’, ‘괴발개발일기를 썼는데, 계집아이들이 그나마 애살스럽게 글을 쓰는 데 반해 사내아이들의 글은 거의 ㅋㅋㅠㅠ로 일관하는 서너 줄짜리 일기가 고작이었다.

 

▲ 한 여자아이가 건네준 꽃다발.

12월 중순께 고교 입시 전형이 끝났을 때, 나는 내 계획이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학년 말에 문집을 내려면, 1학기부터 편집위원을 정하고 편집계획을 세워 원고를 모아 놓았어야 했는데, 차일피일하다 보니 모둠일기를 빼면 준비된 글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서둘러 몇 편의 원고를 받긴 했지만, 제대로 문집의 꼴을 갖추려면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겨울방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방심하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따귀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문집 편집을 시작했다.

 

약 일주일가량의 편집 기간 동안, 나는 거의 무시로 작업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그러나 자신의 태만으로 아이들과의 약속을 파기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 몇과 두어 차례의 모임을 가지면서 간신히 펴낸 문집의 이름은 내가 임의로 2005, 희망일기라 붙였다. 전임교에서처럼 아이들에게 문집 이름을 공모하는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고작 76쪽에 그친 두께는 마땅히 두 배가 되어도 성이 차지 않을 터였다.

 

나는 변명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나태와 준비 부족 탓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했다. 3년 만에 돌아온 담임 노릇은 결국 절반의 성공에 그친 셈이다. 앞서 얘기하였듯이 담임의 역할이 자라는 나무의 바른 성장을 돕는 가지치기라면 내 전지(剪枝)는 얼마만큼 제대로 된 것인지 자신하기 어렵다.

 

학부모의 ‘참기름선물

 

오늘 아이들은 졸업식을 치르고 학교를 떠났다. 단지 의례적인 절차일 뿐인 의식은 소란 속에서 끝났고, 불도 피우지 않은 교실에서 마지막 종례를 했다. 한 녀석씩 졸업장을 전해 주면서 나는 짧은 덕담을 건넸는데, 이 순진한 녀석들은 조금 수줍어하는 듯, 쑥스러워하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마지막 인사로 문집에 실은 인사말을 되풀이했다.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기날은 빛나고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흐르는 물을 바다를 만난다고 합니다땀 흘려 일구어 빛나는 쟁기날이 되고쉼 없이 흘러 큰 바다를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 내가 만든 문집들. 처음 만든 때가 1995년, 복직 이듬해였는데, 5월쯤에 임신한 여교사를 대신하여 계모가 되었다.

쇠귀 신영복 선생의 글귀다아이들이 이 글귀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할지는 알 수 없다아이들이 한 10년쯤 지난 성년의 어느 길목에서 문집을 펴고거기 담긴 열여섯 살의 사계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거기 곁들여 마음과 몸의 공조가 부실했던 한 교사를 기억해 준다면 더욱 좋겠다.

 

아이들의 졸업을 보러 온 부모님들 가운데 몇 분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선물이 든 종이가방을 건넸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받았는데, 넥타이 하나, 우황청심환 한 통, 그리고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몹시 정성 들여 포장한 병 한 개였다. 얼핏 무슨 술인가 했는데, 은박지를 떼어내자, 나타난 맥주병에 찰랑찰랑 담긴 것은 세상에, 참기름이었다.

 

20여 년 가까이 시골 학교를 돌아다녔지만, 정작 전설로만 전하는 참기름 선물은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정작 도회지에 들어와서 그걸 받은 것이다. 물론 그걸 주신 분은 농사와는 전혀 관련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분이다. 시골에서 보내온 진짜, , 참기름을 아이의 담임에게 한 병쯤 선물하자고 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참기름병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잠깐 매우 행복했다. 그런 순간에는 엉터리 가지치기나 물과 거름주기 따위의 허물도 잊어버리는 법이다.

 

2006. 2. 16. 돛과 닻

 

 

 꼭 1년이 흘렀다굳이 삼세판이어서는 아니고 한 해 더 졸업반 아이들을 맡았다지난해 아쉬웠고 찝찝했던 부분들을 만회하리라는좀 의뭉스러운 속셈도 없지 않아 있었다해가 바뀌고 아이들도 바뀌었다동료들은 내가 뽑은(편성된 여덟 학급의 명단을 학년을 맡게 된 교사들이 무작위로 제비 뽑는다아이들이 참 괜찮다고 추천해 주었다.

 

▲ 2006학년도 우리 반 문집.

 괜찮은 아이들이었다. (하기야 안 괜찮은 아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안 괜찮은 이는 아이들이 아니라 교사들이다). 지난해의 아이들보다 애살스러워서 무슨 일이든지 애착을 갖고 달려드는 데가 있었고, 감정 표현도 솔직했고 서투르게나마 인정을 낼 줄 아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담임을 닮는가 보다. 나는 내기나 승부 같은 데 진득하게 매달리는 데는 맹탕인 사람이다. 리더십을 가지거나 다혈질인 아이들 몇몇을 빼면 나머지는 심드렁하게 그러나 보다.”, 매사를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아이들이었다. 오죽하면 저희들끼리도 우리 반의 특징이 특징 없는 게 특징이고 개념 없는 반이라 그러겠는가. 문집의 제호에 미완을 넣은 이유가 거기 있다.

 

 지난해의 게으름을 벌충할 셈으로 벌여놓은 학급문집은 그나마 작년보다 조금 두께가 늘어나는 데서 위안 삼는다. 쓸거리가 없다고 구시렁대면서도 얘들이 열심히 써 준 모둠일기가 제일 영양가가 높았다. 녀석들이 죽지 못해 써 놓은 일기를 읽으며 아이들의 마음의 속살을 엿보는 듯해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넋두리를 늘어놓다 보니 싸가지를 들먹이고, ‘공공선이나 공공의 가치 운운하였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마음은 여리고 순결하다. 저마다 제가 다 컸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아직은 어리고 그래서 세상을 이해하고 거기 대응하는 마땅한 방식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얘들에게 필요한 것은 매서운 훈육이 아니라 부드러운 이해와 교감이라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된다.

 

▲ 학급 마무리 잔치에서 아이들이 내게 준 낙서판과 부직포로 만든 하트, 그리고 케이크.

 가르치면서 매를 놓은 지 꽤 된다. ‘체벌이 더는 훈육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은 우열반이 있었던 남학교에서였다. 일 년 내내 끊임없이 말썽을 부리고 매 맞는 게 일상이었던 열등반 아이들이 내 스승이었던 셈이다. 어쩌다 그 금기를 순간적으로 깨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했지만, 원칙을 나름대로 지켜왔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 와서야 그게 순전히 내 착각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

 

 아이들을 툭툭 치거나 눈이 쑥 둘러 빠지게 호통을 치면서 나는 거기 애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이들은 그걸 넓은 의미의 폭력으로, 상처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가능하면 아이들의 자존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쓴다고 했지만, 때로 감정과 말은 이성적 통제를 쉽게 벗어나곤 하니까.

 

 교직에 머문 세월이 오랠수록 지은 죄가 많다는 역설은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다. 자신을 괜찮은 교사로 자리매김하면서 눈 감고 귀 막은 아이들의 항변과 원망은 얼마나 될는지……. 내일 졸업식을 마치면 아이들은 총총히 그들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별일 없으면 나는 곧 새로운 임지를 지정받게 될 게고 3월이면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문집을 나누면서 나는 이게 내 마지막 문집이라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를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마음속 일순의 회오리 같은 열정으로 대하기엔 가르친다는 것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으니 말이다.

 

 

2007. 2. 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