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⑦] 광저우 ① 한중 항일연대의 단초 황푸군관학교
2015년 상하이(上海)에서 항저우(杭州)와 전장(鎭江)을 거쳐 난징(南京)에서 마무리한 4박 5일(1.23.~1.27.)간의 1차 임시정부 노정 답사를 이은 2차 답사를 떠난 것은 지난해 1월이었다. 답사의 기억이 바래 가는 5년 만에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느닷없는 코로나19의 기습으로 답사 한 달 뒤부터 나라 밖 여행이 꽁꽁 묶여 버렸기 때문이다.
5박 6일(1.9.~1.14.)간의 2차 답사는 일정상 창사(長沙)를 건너뛰고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하여 류저우(柳州)·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에서 마무리하는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82년 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창사에서 광저우에 이르는 데 사흘이나 걸렸지만, 인천에서 출발한 우리가 광저우 바이윈 국제공항에 닿는 데는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임정의 광저우 시기(1938.7.~1938.10.)
1938년 7월, 임정은 전년 11월부터 머물러 온 후난성(湖南省) 창사를 떠나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로 옮겼다. 적기의 공습이 잦아지고, 중국 기관들도 피난을 떠나는 상황에서 더는 창사에 머물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7월 19일, 후난성 주석 장즈종(張治中)이 내준 기차 한 칸에 오른 요인과 식구들 1백여 명은 창사를 떠나 사흘 만에 광저우에 닿았다. 청사는 둥산보위안(東山栢園)에 두고, 가족들은 근처 아세아여관에 들었다.
광저우는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孫文 1966~1925, 1968 대한민국장)의 고향으로 국민당과 호법(護法) 정부가 출범한 곳이어서 중국 국민혁명의 성지로 불린다. 쑨원 정부는 신해혁명 후 선포한 임시 약법을 중화민국 통치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위안스카이(袁世凱) 등 이를 부정하는 세력으로부터 법을 수호한다고 하여 ‘호법정부’라 이른다.
광저우는 1924년 제1차 국공(國共)합작 직후 쑨원이 설립한 황푸군관학교(아래 황푸군교)와 중산대학이 있던 곳이다. 자신의 혁명을 도와줄 군사 세력의 부재를 아쉬워한 쑨원은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소련 군대의 군사 조직을 본떠 황푸군관학교를 열었다. 쑨원이 국공합작에 동의하는 데는 공산당을 통하여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는 코민테른의 제안이 결정적이었다.
쑨원, 임정에 한인 학생의 중국 군관학교 입교 지원
소련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은 황푸군교의 초대 교장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였고, 저우언라이(周恩來), 왕징웨이(汪精衛)는 정치부 교관, 예젠잉(葉劍英), 쉬샹첸(徐向前)도 한때 교관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의 정신에 따른 것이었지만, 장제스와 군사고문단 간에는 상반된 정치적 입장 때문에 충돌이 잦았다.
‘황푸도(黃埔島)’에 있어 ‘황푸군관학교’로 알려진 군교는 개교 시에는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으나, ‘국민혁명군 중앙군사정치학교’(1926.2.)를 거쳐 국민혁명군 군관학교(1928.9.)로 불리다가 뒤에 난징에 설립된 중앙육군군관학교로 이어졌다. 황포군교는 1925년 쑨원 사후, 국민당의 정권을 잡은 장제스가 점차 우경화하면서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내리막길을 걸었다.
1929년 7기생을 배출한 뒤 1931년 폐쇄될 때까지 황포군교는 ‘국민혁명을 주도할 군사간부’를 다수 배출했다. 군교 출신들은 국민당과 공산당 등의 군사 지도자를 낸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요직에도 나아갔다. 국공 내전 기간에 황포군교 출신 부대장이 피아(彼我)로 갈라져 전투를 벌이는 게 흔한 일이었던 이유다.
임정 외무총장 신규식(1880~1922, 1962 대통령장)이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하고, 한국 학생들의 중국 군관학교 입교 등 임정의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한 것은 1921년 10월이었다. 쑨원은,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그해 10월 우창(武昌) 봉기와 신해혁명에 참여한 혁명 동지 신규식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양군 간 관계를 ‘이와 입술’로 비유했다.
“한중 양국은 본래 동문동종(同文同種)으로 형제의 나라이고 오랜 역사 관계가 있어서 보거상의(輔車相依)하고 순치상의(脣齒相依) 하여 잠시도 분리될 수 없으니, 마치 서방의 영미와 같습니다. 한국의 복국(復國) 운동에 대하여 중국은 마땅히 원조할 의무가 있음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저우에 황푸군교와 중산대학(당시엔 광둥대학)에 세워진다는 소식은 전국의 젊은이들은 물론, 일제와의 독립투쟁을 꿈꾼 숱한 한인 독립운동가를 불러들였다. 김성숙(1982 독립장)과 이육사는 중산대학에, <아리랑>(님 웨일스)의 주인공 김산(장지락, 2005 애국장)은 황푸군교에 각각 들어갔다.
한인들의 황푸군교 입교는 상하이에서 모집활동을 주관한 국민당 정부의 실력자 천궈푸(陳果夫, 1966 대한민국장)를 통해 조소앙 등 임정 요인들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황푸군교에는 1927년 임정에서 파견된 채원개(1968 독립장)가 교관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여운형(2008 대한민국장)도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 정부 주요 인물들과의 유대를 고리로 한인의 입교를 도왔다.
한편 국공합작의 성립을 계기로 김원봉의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대중투쟁 노선으로 전환하기로 하면서 개별 단원의 ‘자기혁신’을 과제로 제시했다. 1926년 봄, 김원봉과 김성숙이 황포군교 장제스(1953 대한민국장) 교장을 방문하고, 의열단원들의 황포군교 입교와 학비 면제를 승낙받은 것도 자기혁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한인 생도 200명 이상이 공부한 황푸군교
1927년까지만 해도 많은 한인이 교관과 생도·입오생(入伍生, 예비생)으로 입교하였고, 교도단(敎導團) 등 예하 각급 군사시설에도 한인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정확한 숫자와 신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이들은 한중 이중국적으로 입교했고, 출신 지역을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등으로 위장했기 때문이다. 또 일제 정보망에 알려지거나 그로 말미암은 국제 다툼을 피하고자 가명을 써, <황포군교동학록(同學錄)>(학생·교직원 명부)에 김원봉은 최림(崔林)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황포군교에 적을 두었던 한인 생도는 200명이 넘은 것은 분명하다.
4기생 입교 때 교장 장제스가 북벌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서 학교 운영과 교육은 중국공산당원 교관들에게 맡겨졌다. 생도들이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특히 중국공산당 간부들이 포진한 우한분교에서는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한 정치교육이 강화되면서 생도의 정치적 성향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현상을 우려한 국민당 정부는 한인 입교 우대 조처를 철회하고 만주사변(1931)이 일어날 때까지 중국군에 복무하는 한인 장교를 일선 부대장에 임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황포군교에 입교하면서 청년들은 군 지휘관으로 성장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다지지만, 그들이 꿈꾼 미래는 반드시 밝지만은 않았다. 어떤 형식으로든 전투에 나가 싸우는 것은 자신들의 꿈을 향해 한발 더 나아가는 일이었지만, 그 과정까지도 이르지 못한 젊은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광저우에서 가장 먼저 찾은 ‘동정진망열사묘원(東征陳亡烈士墓園)’에 잠든 한국 청년 둘이 그런 경우였다. 묘원은 1925년 중국국민당이 쑨원의 북벌에 저항하며 반란을 일으킨 광둥 지역의 군벌 천중밍(陳炯明)을 토벌한 동정(東征)에서 희생된 ‘교군(校軍)’, 즉 ‘동정진망열사’의 묘원이다. 훈련받은 황푸군교 출신 ‘교군’의 전투력이 발휘된 이 전쟁에서의 대승 이후 국민당 정부는 제2차 동정을 벌여 광둥성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열사묘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학생묘군(墓群)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66기의 묘비 가운데 두 기의 주인이 한인 생도, 평북 정주 출신의 1904년생 김근제와 충북 괴산 출신의 1899년생 안태다. 이들은 1926년에 입교한 생도여서 동정에서 전사한 게 아니라, 당시 발생한 크고 작은 전쟁이나 시위에 동원되어 희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국땅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조국광복을 그린 망국의 젊은이들이 채 꿈도 피워내지 못하고 스러진 것은 그들의 불운이면서 동시에 임정의 아픈 손실이기도 했다.
황푸군관학교가 한인 생도들에게 준 것들
황푸군관학교는 1938년 일본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고, 1996년 쑨원 탄생 130주년을 맞아 유적으로 복원되었다. 정문 담벼락에 ‘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革命尙未)’는 쑨원의 유언이 씌어 있었다.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교하면서 한인 청년들은 일제에 맞서 싸우려면 중국 반봉건 혁명이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은 또, 중국도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둔 아군이라고 믿어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황푸군교가 한인 생도들에게 준 것은 군사 지식의 습득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국공 분열의 현장에서 중국 국민혁명의 실상과 허상을 목도”하며 “혁명 세력 내부의 분열 극복과 모순의 해결이 근대 민족운동의 일차 과제임을 자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하게 된 것이었다.
황푸군교는 태생적으로 국공합작의 산물이었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동거 체제로 운영되면서 그 대립과 갈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졸업생들의 진로도 그들의 이념적 선택에 따라 명확하게 갈렸고, 국공합작이 무산되면서 ‘내부 분열의 극복과 모순의 해결’은 미루어졌다. 황푸군교를 졸업하면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했는데, 중국인 졸업생과 달리 한인들의 행로는 다양하게 모색되었다. 북벌(北伐)과 국민혁명이라는 중국의 당면 과제를 따르면서도 동시에 이들은 조국의 항일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인 졸업생들의 행로는 중국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며 한인 독립운동을 지원한 인물, 1920년대 후반기 국내외에서 확산하던 민족 협동전선 운동에 참여한 인물, 그리고 공산주의운동과 아나키즘 운동 등을 선택, 1927년 ‘광둥코뮌’으로 불리기도 하는 ‘광저우 기의(起義)’에 참여한 인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저마다 선택은 달랐어도, 그 궁극적 지향점이 조국광복과 민족해방이라는 점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황푸’ 졸업생들의 진로와 한중 항일 연대
‘황푸’를 졸업한 김원봉은 1926년 의열단 전체 회의를 열어 의열단을 ‘혁명 정당’으로 전환했고, 이듬해 ‘민족 협동전선 운동’을 전개한다고 선언했다. 1927년 서울에서 민족 협동전선 ‘신간회’가 창립되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단체의 단일노선 구축 운동이 전개되자 김성숙(1982 독립장)은 광저우에서, 황포군교 출신의 박건웅(1990 독립장)은 우한에서 각각 한국독립유일당 촉성회를 조직한 것은 그 실천적 성과였다.
이처럼 황푸군관학교는 한국과 중국 현대사에서 반일 혈맹 연대의 원천이자 강력한 기반이었다. 황푸 출신의 한인들은 국민혁명군의 이름으로 중국군과 더불어 일제와 싸웠고, 일부는 장제스의 쿠데타에 맞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광저우 기의에 동참하여 희생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한중(韓中) 연대는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이 한인의 항일투쟁 역량을 새롭게 평가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했다. 국민당 정부는 임정을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 진영을 중국과 연대하여 항일전쟁을 공동으로 수행해 가는 동반자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1934년 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후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소재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이 설치되어, 한인 독립운동가 92명에게 군사교육을 시행한 것도 오롯이 한중 연합의 결과였다.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한인 생도들은 조선민족혁명당과 한국국민당의 주요 역량으로 성장하면서 1930년대 한인 독립운동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또 조선민족혁명당(총서기 김원봉) 당원 중심의 한인 혁명가 90여 명은 장시성(江西省) 싱즈(星子) 소재 싱즈분교와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 소재 후베이분교에서 훈련받았다. 이들은 1938년 3월부터 약 석 달간의 교육훈련을 거쳐, 국민당 정부의 항일전선에 참여하는 한편,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건의 주력이 되었다.
황푸군교 출신들은 졸업 후에도 동문수학의 이력을 고리로, 국민당 군부의 핵심 인물들과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4기생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한인 독립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등의 적극적인 지원이 뒷받침이 있었다.
류저우 이전 7일 전 김원봉, 조선의용대 창설
만주사변(1931) 발발 직후 김원봉의 의열단은 1932년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워 3년간 130여 명의 청년 혁명가를 배출했다. 국민당 정부가 이후 의열단 중심의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의용대를 중점적으로 지원한 것도 황포군관학교 ‘동학(同學)’이라는 인연 덕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38년, 그 전해에 난징을 함락한 뒤 우한(武漢)을 치는 이른바 쉬저우(徐州) 대회전(大會戰)을 전개한 일본군이 우한의 함락을 눈앞에 둔 때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결성한 김원봉은 한커우(漢口)에서 중국 당국과 협의하여 조선의용대를 구성하고 항일전쟁 참전을 선언하였다. 황푸군교 출신의 군관 중심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는 임정의 광복군(1940)보다 앞서,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정규화된 항일 무장 대오였다. 광저우로 진입한 일본군을 피해 임정이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로 옮겨가기 1주일 전인 1938년 10월 10일이었다.
2021. 2. 8. 낮달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⑧] 광저우(廣州) ②로 이어집니다.)
1차 답사(2015.1.23.~1.27.)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①] 후미진 중국 골목에 한국인이 줄을 서는 이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②]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편지…북받침을 어찌하랴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③] 37살의 나이 차… 백범과 중국 여인의 ‘특별한 동거’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④] 4시간 만에 일본군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⑤] 중국에서 본 한국인 묘, 비석에 새긴 이름 읽는 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⑥] ‘난징의 능욕’,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2차 답사(2020.1.9.~1.14.)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⑧] 혁명 열기 속 국경 넘은 사랑도 익어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⑨] 광복군 전신 청년공작대, 34명 청년들이 이뤄낸 반향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⑩] 임정, 초모 공작으로 광복군 창설작업에 본격 나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⑪] 충칭의 5년, 화시탄 물결 따라 사랑과 죽음도 흘러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⑫] ‘홀로서기’ 끝 광복군, 일본의 항복으로 길을 잃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⑬] 허리 숙여 절하는 광복군, 잊을 수 없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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