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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가라, 엄마가 딸에게 물려주고픈 공구책

by 낮달2018 2021.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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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필 데이비 외, <더 툴 북(The TOOL BOOK)>

▲ <더 툴 북>(문예춘추사, 2019)

소유와 무관하게 집을 지니고 살아가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금방 지은 새집도 가끔 이런저런 말썽이 생기는데, 오래된 집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이 들면서 사람이 이래저래 부실해지듯 집과 가재도구도 시간이 지나면서 낡고 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말썽 나는 족족 그걸 해결하기 위해 전문 기술자를 부르는 일도 만만치 않다. 그러니 부득이 사람들은 공구를 하나씩 마련하고, 그걸로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경험 없는 얼치기 생활인이 그걸 해결하는 건 쉽지 않다.

 

생활이 ‘공구’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목마른 이가 샘 판다고 어설프게 공구를 찾아 들긴 했지만, 정작 그걸 운용하는 게 적지 않은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당장 콘크리트 벽에다 못을 한 번 박아보라.

 

한때, 꽤 무게가 나가는 쇠망치로 가격해도 못을 튕겨내는 콘크리트 벽의 견고함 앞에 낭패한 이들을 구제해 준 게 ‘탱크팡’이라는 이름의 특수 망치였다. 피스톤을 이용하여 정확한 위치에다 못을 박을 수 있게 해주는 이 망치의 덕을 본 이들이 반드시 주부뿐이었을까.

 

전문기술자들이 ‘프로페셔널하게(!)’ 허리에 주렁주렁 차고 다니는 각종 공구는 전문가의 권위를 위한 소품이 아니다. 어렵사리 공구를 써본 이들은 그게 문제를 빨리, 그리고 수월하게 해결해주는, 이른바 ‘싱크로율’ 100%의 ‘판타스틱 툴’이라는 걸 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삶의 장면은 예측할 수 있는 것만 있지 않다. 펜치나 드라이버, 프라이어와 멍키 스패너(어저스터블 렌치)만 갖추어도 될 듯한 가정용 공구가 하나씩 늘게 되는 것은 물론 그러한 예측을 불허하는 생활이 주는 가외의 선물이다.

 

소켓 렌치와 전기인두, 건 태커까지 갖추게 된 어느 날, 우리는 강력한 힘으로 타격하여 콘크리트에 구멍을 내어주는 해머 드릴을 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른바 ‘장비병’의 단계로 진입하는 조짐이다.

 

그러나 장비병은 단순히 특수 공구를 가지고 싶어서 빠지는 단순한 ‘뽐뿌질’이 아니다. 그건 그간 닦고 익힌 ‘생활의 기술’이 한 단계 상승하고 있음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더 나은, 더 고차원의 공구를 원하는 것은 그것을 일정하게 운용할 수 있는 자신감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자기 공작사(工作史)의 신세계로 접어드는 길목이다. (관련 기사 : ‘장비병’ 단계를 지나니 ‘DIY’ 신세계가 열렸다)

 

DIY, ‘기술 대중화’, 혹은 기술 소외로부터의 해방

 

그러나 고기능의 값비싼 공구를 마련하는 것과 그 물건을 제대로 운용하는 능력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십 년도 전에 독일산 충전 드릴을 장만했지만, 나는 근년에 와서야 그걸 제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러 겹으로 접는 종이에다 그림 몇 개가 고작인 불친절한 사용설명서도 그렇거니와, 그걸 제대로 사용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갖가지 용도로 쓰이는 가정용 공구의 사용법 등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는 책이 있는가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궁금하고 막힐 때마다 인터넷에서 디아이와이(DIY) 선배들의 시공 경험담으로 간신히 길을 찾고 요령을 익혔을 뿐이다.

 

“당신이 직접 만들어라! (Do It Yourself)”

 

DIY는 “전문 업자나 업체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직접 생활 공간을 쾌적하게 만들고 수리하는 개념”이다. 1940년대에 영미에서 시작되고 퍼진 이 개념은 일종의 ‘기술 대중화’를 축약하는 명제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집 안팎을 공사할 수 있게 된 DIY로 표상되는 기술의 대중화는 기술의 칸막이에 막힌 기술 독점, 혹은 기술 소외로부터 일반인을 해방한 사례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꼼짝없이 전문가를 불러 적지 않은 품삯을 주어야 했던 가장들이 가장 먼저 손을 털고 나섰다. 이미 대중화되고 있는 장비를 마련한 이들은 다소 서툰 솜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 직접 뛰어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가정에서 DIY는 일상으로 접어드는 추세인 듯하다. 사회 변화에 따라 1인 가구가 늘어난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런 작업을 남편에게 맡겨온 주부들도 DIY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 쇠톱 사용하기. 사용법은 물론 , 공구를 다루는 안전한 방법도 기술하고 있다 .

주부나 여성이 DIY에 나섰다는 것의 의미도 간단치 않다. 그것은 생활의 불편을 직접 감당해야 하는 여성이 생활을 바꾸기 위해 나선 것이고,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던 ‘변변찮은 기술’쯤은 ‘나도 할 수 있다’며 자신을 주체로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블로그 따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여성들의 경험담과 시공기(施工記)는 그것 자체로 이 변화하고 있는 세태를 방증한다.

 

모든 공구에 대한 정보를 망라한 책 <더 툴 북(The TOOL BOOK)>이 번역 출간된 것은 이러한 사회적 추세를 타고서다. 이 책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을 통해 공개된 지 사흘 만에 후원 목표를 달성하고, 거의 2주 만에 1000%를 달성했다.

 

<더 툴 북>, 공구 공부, DIY의 첫걸음

 

저자는 영국 최대의 목공전문지 편집인 출신인 필 데이비, 여성 인력으로만 운영되는 집수리와 설비 관리업체 ‘홈제인’ 설립자 조 베하리, 저널리스트 루크 에드워즈 에반스, 조경상담사 맷 잭슨 등 네 명이다. <더 툴 북>은 실생활에서 주로 쓰는 공구 800여 가지를 꼭 필요한 내용 위주로 압축 소개하고 있다.

 

‘작업 공간 마련하기’로 출발한 책은 공구의 성격에 따라 측정 및 표시 도구, 썰기와 자르기 도구, 고정 및 잠금 공구, 타격 및 파쇄 공구, 땅 파기와 흙 작업 기구, 다듬기 및 갈기 공구, 마무리 및 장식 공구 등 7개 장으로 나누어 전개된다.

 

즉, 자나 디바이더, 톱과 전지가위, 드라이버와 드릴, 망치와 지렛대, 괭이와 모종삽, 끌과 대패, 페인트 붓과 도배 용구에 이르는 공구들은 일단 선명한 컬러 사진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세밀하고 기능적인 일러스트로 그 쓰임새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드라이버의 종류만 해도 만만치 않다 . 이런 드라이버에 관한 정보를 모아 놓았다.

책은 친절하고 상세하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팁들이 꼼꼼하게 기록되었고, 안전하게 공구를 쓰는 노하우도 빠뜨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때에 따라 사족처럼 느껴지는 원리와 구조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공구의 각 부위가 어떤 의도와 기능으로 만들어졌는가를 꿰뚫을 수 있다.

 

출판사(문예춘추사)가 제창하는 구호는 “진정한 독립은 손의 독립-독립생활자들이여, 공구빨을 세우자!”다. 여기서 말하는 ‘독립생활자’란 “집안 곳곳의 자잘한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며 사는 사람”이다. 공구를 자유자재로 쓰면서 일정한 독립, 즉 ‘손의 독립’을 이루어보자는 것이다.

 

기존에 출간된 DIY 관련 도서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더 툴 북>처럼 빠뜨리지 않고 모든 공구를 다루고 있는 책은 없었다는 게 출판사의 주장이다. 공구함 두 개가 있는 내게도 생소한 각종 공구가 수두룩하니 그건 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의자 다리가 휘청거릴 때, 전등이 깜빡일 때, 간단한 집수리부터 취향 저격 인테리어까지, 이 책 한 권으로 끝내자. 20대 독립생활자를 위한 일상생활 생존 필독서”라고 목청을 높이지만 책 한 권이 모든 생활의 기술을 대신해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 콤비드릴 사용하기. 작업순서는 물론 토크 설정치까지 상세하게 안내하고 있다.

<더 툴 북>은 세련된 일러스트와 엔간한 공구는 망라하여 ‘세상의 모든 공구에 대한 비주얼 가이드 북’을 지향하고 있으나 아쉬움도 적지 않다. 영국에서 간행된 책이어서 전반적으로 영국(서구)에 최적화된 체제라는 점, 다시 말해 한국적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공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공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상에서 문제와 부딪칠 때 우리는 인터넷을 과신한다. 그러나 인터넷의 정보는 ‘드라이버’를 검색해도 그게 내가 찾는 공구인지, 골프채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이 책을 통해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자주 보아온 것이긴 해도 공구의 기능과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이용할 수 있는 공구에 대한 정보도 백지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책은 그런 상황을 벗어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전해주는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페인트 붓 고르기 . 책은 웬만한 생활 관련 공구를 총망라하고 있다 .

책 한 권으로 DIY에 다가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구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그 운용과 기술을 위한 출발점임은 부인할 수 없다. 공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생활의 기술’을 하나씩 배우고 익힐 수 있을 때 그는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블 텔레비전 <티브이엔(tvN)>의 홈 셰어 리얼리티 프로그램 ‘서울메이트’에서 개그우먼 김숙은 허리에 공구 벨트를 차고 드릴을 써서 커튼을 척척 달아내는 이른바 ‘가모장(家母長)’의 ‘포스’를 선보인 바 있다. 그는 여자는 힘이 안 되니까 “남자보다 더 공구빨이 필요하다”고 일갈했다.

 

여성의 생활기술 독립선언, “공구빨을 세우자!”

 

독립생활자로 면모를 보여준 김숙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런 능력을 갖추고 싶다고 생각한 여성도 적지 않았으리라. 독립생활자로 서고 싶다면 출발은 역시 공구에 대한 이해부터일 것이다.

 

이 책의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20대 초반의 여성이라는 것은 생활기술의 독립을 선언하고 싶어 하는 여성의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한다. 여성이 공구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운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더 툴 북>을 산 영국의 아마존 독자가 남겼다는 찬사가 가리키는 것도 그런 부분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여성의 ‘생활기술 독립선언’으로도 읽히는 까닭이기도 하다.

 

“……남편에게 주려고 샀지만, 저는 이렇게 말했죠. “여보, 내 거야!” ……여태 아무도 도구 이름이나 기능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이 책으로 도구를 배우는 일이 재밌습니다. 다 읽으면 딸에게 줄 거예요. 제 딸은 저처럼 도구 앞에서 무력해질 필요가 없잖아요.”
    - 영국 아마존 독자 funbear

 

 

2019. 2. 21. 낮달

 

 

 

남자는 가라, 엄마가 딸에게 물려주고픈 공구책

[서평] 필 데이비 외, <더 툴 북(The TOOL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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