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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무소유>를 다시 읽으며

by 낮달2018 2021.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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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셀러’ <무소유>를 다시 읽다

▲ 무소유(범우문고, 1990)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나는 무심하게 들었다. 그 며칠 전에 그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심하게’ 들었다는 말은 그의 죽음을 우리가 일상에서 숱하게 만나는 여느 ‘명사의 부음’과 다르지 않게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70년대 중반 이후, 내내 어정쩡한 ‘문청(文靑)’이었던 나는 법정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수필집 <무소유>의 지은이고, 숱한 저작을 남긴 만만찮은 문인이라는 것 정도로만 그를 이해했다. 내가 70년대 후반의 마지막 3년을 군대에서 보낸 것이 이유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곰곰 생각해 보면, <무소유>가 공전의 판매량을 기록한 베스트셀러였다는 것과 내가 문청이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내 무관심을 설명할 수 있을 듯도 하다. 그 무렵, 나는 수필이 본격 문학 장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같은 이유로 베스트셀러가 된 수필집 <무소유>를 나는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70년대 중반쯤에는 승려들의 저작이 꽤 많이 출판되었던 것 같다. 나는 역시 ‘시건방지게도’ 그들이 쓴 책을 읽어볼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나는 예의 책들을 ‘그저 그렇고 그런 깨달음’을 적당히 버무려 놓은 책쯤으로 적당히 깎아내리면서 그것을 읽기보다는 읽지 않아야 할 이유를 더 많이 만들어 두고 있었다.

 

절판, ‘권당 십수만 원’ 운운은 천박한 세속의 문법

 

서가를 뒤적여 보니 내겐 1990년 범우문고로 출판된 문고판 <무소유>가 있다. 문고판 <무소유>는 1976년 초판이, 1985년 증보판이 나왔다. 내 책은 1990년 증보판 25쇄다. 가격은 1,000원. 뒤늦게 1990년에야 구입하고도 나는 이 책을 제대로 완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법정의 <무소유>를 다시 만난 것은 수업 시간에서다. 법정의 <무소유>는 언어 영역 문제집이나 수능 모의고사에도 지문으로 간간이 나온다. 아이들에게 작품을 가르치면서도 나는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니, 애당초 <무소유>는 그런 형식의 느낌을 부르는 글은 어차피 아니라고 해야 옳다.

 

<무소유>는 ‘소유’를 ‘집착’으로 보고, 참된 자유는 ‘욕심과 집착’에서 해방될 때 얻어진다는 깨달음을 무연히 전하는 글이다. 이 글이 수백만 대중들의 공감을 얻은 것도 부르대지도, 주장하지도 않는 가운데 저도 몰래 젖어오는 삶에 대한 겸허한 깨달음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무소유>는 법정의 유언대로 더는 출판되지 않을 듯하다. 절판 소식과 함께 그의 책들이 십수 만원으로 치솟고 있다는 뉴스는 황당하고 씁쓸하다. 그게 우리 사회의 수준이고 한계라면 서글픈 일이다. ‘소유’를 넘어 가장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정리한 한 선승(禪僧)의 죽음을 대하는 이 세상의 문법은 천박하기 짝이 없다.

 

20년 전의 <무소유>를 다시 읽어본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얼마나 간사한가. 무심히 읽어 내려가는데 곳곳에서 만나는 깨달음이 새롭다. 예전에 없던 깨우침이 뒤늦게 새록새록 이는 것은 모두 법정 스님의 죽음이 주는 선물이다. 삼백몇십만 명이 읽었다는 <무소유>, 그걸 다시 꺼내 읽는 이들의 심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 법정. 그는 이렇게 표연히 갔다.

수필 ‘무소유’의 첫 부분은 간디의 어록으로 시작된다. 나는 문득 거기 쓰인 ‘대단치도 않은 평판’이라는 구절을 오랫동안 눈여겨보았다.

 

간디가 스스로 ‘대단치도 않’다고 한 그의 ‘평판’이 그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삶으로 기리게 된 것은 역설이다. 무엇보다 그 평판은 그가 가진 소박한 소유에서 비롯했다는 것 또한 위대한 역설이다.

 

나는 그의 부음으로 말미암아 승려 법정의 삶을 새삼스럽게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삶, 그의 수행이 그가 글로 남긴 명징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결국 그의 사후에야 그를 바라보았던 이십 대의 혈기와 객기로 뒤틀려 있었던 내 시선을 뒤늦게 바로잡은 셈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남긴 뜻’의 무게에 압도된다. 각종 매체에 소개된 그의 유언은 그의 삶만큼이나 무겁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넓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 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 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해 달라.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 보내주면 고맙겠다.”

- 류시화 시인이 전한 유언

 

“사리를 찾으려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 의식도 행하지 말라.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 ‘미리 쓰는 유서’ 중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삶

 

글쎄, 과문해 나는 법정이 우리 불교계에서의 어떤 지위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 있는 자리’에 있었던 이는 아니다. 그러나 숱한 저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든, 올곧은 삶과 수행에서 이루어졌든 그가 남긴 세상의 명성은 우뚝하고 무겁다.

 

그런데도 그가 세상을 정리하고 떠난 방식은 단순하고 명료해 보인다. 그것은 마치 그의 삶과 수행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사후를 그렇게 단순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그의 세계관이 그렇듯 분명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는 비어 있는 시선으로 마치 타인의 그것인 양 자신의 삶을 바라보고 일체 무심의 유언을 남긴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뭇 인간들에게는 가장 무거운 세속의 ‘명성’을 그는 티끌처럼 퉁기고 떠나갔다. 자신이 남긴 모든 저작을 ‘말빚’으로 정리한 담백한 마음도 마찬가지다. 명성은 인간에겐 가혹한 굴레다. 그것은 때로 인간을 고무하고 상승시키기도 하지만, 마침내 벗을 수 없는 굴레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억압하는 것인 까닭이다.

 

그의 부음은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정리되고 평가된다’라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 준다. 그것은 안타깝고 가혹한 일이지만 매우 공정한 방식이다. 아무도 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므로. 일세를 풍미한 인물이든 시정의 갑남을녀든 죽음은, 한갓진 추모 너머에 한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한 총체적 평가를 예비하고 있다.

 

20년 묵은 책, <무소유>를 꺼내 읽으면서 나는 우리가 장차 맞이하고야 말 죽음을 막연하게 떠올려 본다. 그러면서 그런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란 참으로 두렵고도 막중한 무엇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2010. 3.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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