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대 시집 <그리움의 넓이>
사춘기 시절부터 만만찮은(?) ‘문학소년’이었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이름을 단 시를 쓴 적이 없다. 두어 차례 시 비슷한 걸 끼적이긴 했는데, 동무들의 한 마디로 ‘기똥찬’ 시 앞에 그걸 들이대기가 거시기해 슬그머니 구겨버린 게 고작이다.
소설에 뜻을 둔 친구들도 습작시절에는 시도 심심찮게 쓰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시라면 아예 손사래부터 치곤 했다. ‘습작시대’를 마감하고 ‘독자’로 돌아오던 20대의 끝 무렵에야 그게 내가 가진 ‘쥐꼬리만 한 재능’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걸 알았다.
이래저래 마음이 가서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한 서너 해쯤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교직이 평생의 업이 되었다. 초임 시절엔 입에 거품을 물고 시나 소설을 주절댔지만, 내 문학 수업의 수준은 교재에 실린 작품 해설의 범주를 단 한 줄도 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지난 삼십여 년 동안 문학 교사로서 연명(?)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사춘기 시절 이래 지루하게 계속된 습작기 동안의 풍월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척 하면 삼천리고, 툭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준 게 별 소출 나지 않던 그 시절의 객기요, 만용이었던 셈이다.
그걸 깨닫게 해 준 게 세월이니 나이는 반드시 공으로 먹는 건 아닌 모양이다. 교단에 선지 스무 해가 넘을 즈음에야 교과서에 실린 시가 ‘참고서 식 해설’을 넘어 조금씩 그 속내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진아 교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게 어쩌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서론이 길어졌다. 이미 구문이 되어 버린 <오마이뉴스> 블로그(오블)의 이웃인 김주대 시인이 시집을 냈다는 이야길 하면서 이런 객쩍은 얘기로 지면을 낭비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능력의 한계다. 오블에 블로그 “사진을 읽어주는 시”를 열고 있는 김주대 시인의 아이디는 ‘김주대의 풍경(kimhoa97)’(그가 처음 쓴 이름은 ‘풍경과 시’였다.)이다
그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낸 시집들에 실린 이력과 시편들, 블로그를 매개로 이루어진 교유, 한 차례의 만남 등으로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그가 언어로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시인임에랴!
<오블> “사진을 읽어주는 시”, 김주대 시인
그가 처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 둥지를 튼 것은 2009년이었다. (세상에, 그 사이 3년이 지났다!) 확인해 보니 그가 블로그에 첫 글을 올린 게 2009년 2월 20일이었고, 내가 첫 번째 댓글을 단 게 그 사흘 후였다. 그리고 그가 만만찮은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내가 그의 시집 <꽃이 너를 지운다>(1997, 천년의 시작)를 내 블로그에 소개한 게 그 해 5월이다. [글 바로가기]
그가 내 취향에 비교적 맞는 시인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살며-시’와 ‘물끄러-미’ 두 편을 ‘소개’했다. 굳이 ‘소개’라고 표현한 이유는 앞서 밝힌 대로 고만고만한 수준의 ‘시 읽기’를 달리 표현할 말이 없어서다. 따라서 이 글도 그의 새 시집 출간 소식을 ‘소개’하는(소개로는 꽤 늦어졌지만) 글인 셈이다.
지난 11월에 낸 시집 <그리움의 넓이>(창비)는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그의 첫 시집 <도화동 사십 계단>(1990, 청사)은 절판되었으므로 <꽃이 너를 지운다>(1997, 천년의 시작)가 내가 처음 만난 그의 시집이다.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해 본 첫 시집의 시들은 여전히 80년대의 전운(戰運)이 묻어 있는 듯했다. 이번 시집 표지 뒤편에 실린 김사인 시인의 추천사에 쓰였듯 ‘80년대 민중 민족 문학 진영의 촉망받는 젊은 시인’이었으니 말이다.
첫 시집의 시편들에 “연탄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얼어붙은 산동네의 아득한 계단이, 그리고 우리 삶의 눈물겨운 이면들이 시인 특유의 풍자와 해학을 통해 따뜻한 풍경으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한 이는 작가 김영현(<꽃이 너를 지운다> 추천사)이다.
두 번째 시집 <꽃이 너를 지운다>에서도 그의 눈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김영현은 “시집 곳곳에 상처와 어둠이 배어 있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기어이 빛을 찾아내어 슬쩍 우리 앞에 내민다”라고 했다. 그것을 “넙죽 받아들고 보면 그것은 시이고 눈물이고 사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들 가운데 몇몇 작품의 느낌은 좀 다르다. 이전의 시들이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살갑게 감기는 넉넉함으로 다가왔다면 이번 시편 가운데에는 새기기가 쉽지 않은 작품들이 더러 눈에 띈다. 그것은 아마 그가 지난 3년 가까이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보여준 여러 가지 시도의 결과물인 듯하다.
그런 일련의 움직임을 ‘변화’라고 한다면 나는 거기 한 표를 보탠다. 우리 같은 문외한에겐 ‘시 세계의 변화’란 고교 시절에 서정주의 시 세계를 몇 시기로 나누는 걸 배운 게 다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삶도 사회도 변한다. 시인의 시도, 그것이 은유하는 세계도 당연히 바뀐다. 그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대학 시절의 후배가 쉰이 다 되어 낸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시가 여전히 30여 년 전에 머물러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내저었던 적이 있었다. 익숙한 비유와 어조 사이로 나는 대학 시절의 공기를 단박에 떠올렸지만 그건 일종의 ‘지체(遲滯)’ 같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변화가 선은 아니다. 그러나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늘 한 시대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또한 식상한 일이다. 가끔 주변의 시인들의 시를 읽다가 ‘시가 늙었다’라고 느끼는 때가 있는데, 그건 예외 없이 시인의 시가 한 시절의 세계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내 취향은 물론 그의 예전 시편의 품새에 가깝다. 가뜩이나 시를 새기는 게 쉽지 않은데 요령부득의 난수표 같은 낱말들을, 그것들의 함의를 궁싯거리며 찾아내는 일은 내게 버겁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변화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시원찮은 독자 말고도 그의 시가 노래하는 세계와 그 질서를 읽어낼 눈 밝은 독자들도 얼마든지 있을 터이니 말이다.
시집에서 시인이 자주 쓰고 있는 ‘시간, 우주, 진화, 영혼’ 따위의 시어들은 그런 변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시어들이 교직해 내는 세상은 ‘세계는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나와 동일하게 나이가 들어갔다.’(시인의 말)는 그의 발언 저편에 있을 것이다.
추천사에서 시인 김사인은 ‘헐한 자조와 연민에 떨어지지 않고자, 어떤 높고 영원한 것을 놓치지 않고자’ 애쓴 ‘사소한 기척들을 포착하는’ ‘여전히 날카롭고 투명’한 그의 눈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의례적 수사를 넘어 그의 변화의 일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집의 제목은 시 ‘영혼의 인간’의 일부를 따 왔다. 시인에 따르면 그리움은 ‘2차원의 면의 세계’고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갈망으로 천지를 두루 헤맬 때/그리움의 아득한 넓이는 완성된다’고 한다. 그 넓이를 가진 이가 고통의 나락에 빠지면 그의 생은 ‘마침내 3차원 입체’인 ‘슬픔’을 갖게 되고 그는 비로소 ‘사람다워 보이기 시작한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짧은 만남으로 내가 알게 된 김주대 시인은 나이에 비해 훨씬 자유분방하고 번득이는 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사고가 여전히 ‘그리움과 슬픔’과 같은 ‘사람다움’의 정서로부터 비롯하는 한 앞서 말한 ‘변화’와 무관하게 독자들의 사랑과 믿음은 이어질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3. 2.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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