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학기술부의 ‘간접체벌’ 허용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 확정에 부쳐
교육과학기술부가 ‘간접체벌’을 허용하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확정했다. 이 개정안에는 ‘학교장이 학칙을 통해 학생의 권리 행사 범위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진보 성향 교육감들의 갈 길이 어지러워지고 바빠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개정안에 대한 진보 성향 교육감과 해당 시도 교육청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개정안이 시행되면 진행 중인 ‘학생인권조례’와 ‘체벌 전면 금지’ 지침은 수정이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시행령은 시도 교육청의 조례나 지침보다 상위 법령이다. 따라서 이 시행령 개정안은 지금까지 진행된 시도 교육청의 계획은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다.
개정안은 신체와 도구를 이용한 직접적 체벌은 금지하되 교사가 학칙에 따라 시행하는 교육적 훈육인 운동장 돌기 등의 간접체벌은 허용하기로 했다. 또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에 대한 징계 방법으로 ‘출석 정지’(과거의 ‘정학’과 비슷한 개념)를 추가했다고 한다.
더 결정적인 부분은 따로 있다. 개정안은 학교장이 교원의 교육·연구 활동과 학생의 학습활동을 보호하고 학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학생의 권리 행사 범위를 ‘학칙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행 초중등교육법의 개정이 필요하다. 학칙에 대한 최종 인가권을 시도 교육감에게서 단위 학교장에게 넘기기 위해서다. 즉 단위 학교의 장이 필요하면 자율적으로 학칙을 제·개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 서울, 경기 등 여섯 개 시도에서 이른바 진보 성향 교육감이 당선되면서부터 교육계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진보적 의제에 대한 논란으로 이 거세졌다. ‘학생인권조례’와 ‘체벌’ 문제는 그 핵심 의제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저 지경(!)으로 바뀐 상황이다. ‘인권’이 그것도 ‘학생 인권’이 논의의 장으로 떠오른 것 자체가 교과부로서는 마뜩잖았을 수 있다. ‘일제고사’도 ‘교사 시국선언’ 문제도, ‘무상급식’ 문제에 대해서도 교과부의 공식 견해를 따르지 않는 이들 교육감이 부담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학생 인권’·‘체벌 금지’는 ‘원칙’으로 이해해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긴 했지만, 이들 핵심 의제는 그것 자체로 원칙적인 정당성을 갖는 것들이다. 인권에 관한 한 ‘개념’이 다른 사람들이기는 하나 그것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학생 인권’ 문제는 그 시기의 문제가 쟁점이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원칙적으로 올바른 문제의식의 소산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교육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진보적 의제는 정책으로 집행되면서 가속도가 붙으면 조만간 보편화, 일반화될 가능성도 크다. 지방선거에서 새로운 이슈로 떠오른 ‘무상급식’이 서울을 제외하면 진보·보수 지역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복지정책으로 점점 외연을 넓혀 나가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의 시름도 깊어졌던 걸까. 중앙정부의 담당 부처로서 교육과학기술부로서는 이런 어정쩡하고 갑갑한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번 교육부의 개정안 확정은 이런 고육지책에서 나온 건 아니었을지.
시행령 개정은 문제가 된 시도 교육청에서 추진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나 ‘체벌 금지’ 등의 정책을 간단히 제압하는 묘수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원칙적 정당성을 넓혀가고 있던 이 의제는 상위 법령이라는 복병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교육부의 조치는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지적처럼 ‘고춧가루 뿌리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하다.
곽 교육감이 18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밝힌 것처럼 ‘직선 교육감의 교육정책에 대해서는 시민이 표로 심판할 일’이지 상급 기관에서 법률적 수단으로 그 손발을 옭아맬 일은 아니다.
‘직접 체벌’은 전면 금지하면서도 ‘간접체벌’은 허용하겠다는 교과부의 방침은 현실을 고려한 고육지책이라는 점에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이는 의제가 요구하는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어정쩡한 ‘타협’처럼 보인다. 그것은 원칙의 진정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교육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실, ‘학생 인권’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체벌’은 우리 교육이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부끄러운 유산이다. ‘사랑’과 ‘선도(善導)’라는 이름으로 수십 년간 온존해 온 ‘관행’을 버리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교육적이든 교육적이지 않든 그것이 교육의 수단으로 기능해 온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대체 수단을 잃은 교육 현장의 혼란 따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체벌 금지는 ‘점진적’으로가 아니라 ‘전격적’으로 취해지지 않으면 그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체벌 금지’ 조치에 대한 <한겨레>와의 인터뷰(1.18.)에서 곽 교육감이 한 답변은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짚고 그것이 갖는 철학과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토론보다는 결단의 문제였고,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악순환을 끊어야 하니까. 체벌의 장막을 걷어내니 상담과 치유과정, 학생들의 자치역량이 취약하다는 우리 교육의 속살이 드러났다. 학생들에게 상담 치유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공동선이 무엇이냐, 공익이 무엇이냐’를 학생 스스로 합의해 ‘팔조 금법’과 같이 꼭 지켜야 할 규칙을 정하게 하는 게 체벌의 대안이다. 이런 기반이 없는 상태에선 벌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는 ‘체벌 금지’에 반대하는 정서가 적잖이 존재한다. 그것은 체벌이 유효한 교육적 수단이라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마땅한 대안도 없이 교사의 ‘지도 권한’을 잃는다는 정서적 충격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 그것은 한편으로는 준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기도 하다.
‘묘수’보다 원칙에 대한 ‘지지’를
그런 점에서 교육부의 이번 조치는 체벌 금지의 원칙에 대한 확고한 천명이라기보다 현장의 거부 정서에 기대어 오히려 원칙의 정당성을 희석하고 있지 않나 싶다. 교육 총책임 부서로서 교육부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어정쩡한 타협이 아니라 체벌 금지의 원칙이 교육 일선에서 안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이다.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 학칙에 대한 최종 인가권을 교육감이 아닌 학교장에게 부여하겠다는 것도 그리 떳떳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철학이 다른 교육감을 제치고 학교장에게 자율권을 주는 형식을 통해 교육감의 권한을 무력화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교육감 직선이라는 제도 속에 포함된 교육자치의 정신과도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다.
‘학생 인권’이나 ‘체벌 금지’는 보수·진보의 관점과 무관하게 교육에서 마땅히 실현되어야 할 상식이고 원칙이다. 그것은 정치적 입장이나 파당의 이해와 무관하게 관철됨으로써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기본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학생 인권’과 ‘체벌’을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의견의 개진과 충돌은 우리 사회가, 우리 학교가 거듭나는 데 필요한 성장통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부의 개정안에 담긴 ‘묘수’가 아니라 ‘원칙’에 대한 동의와 지지인 까닭이 거기 있는 것이다.
2011. 1.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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