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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과정을 넘어 새로워지는 당신들에게- 방송통신고 ‘졸업’에 부쳐

by 낮달2018 2021.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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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고를 졸업하는  ‘시니어’ 학생들에게 

드디어 졸업이군요. 이제 졸업식을 빼면 등교할 날은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떠신가요. 지난 3년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는가요? 온갖 기억들이 슬그머니 되살아나 추억의 현(絃)을 조금씩 건드려주나요?

 

저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졸업을 앞둔 이들의 느낌은 비슷한 듯합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입학원서를 내고 교문을 나서던 3년 전 2월의 어느 날을 기억하시지요? 입학식을 치르면서도 여전히 자기 선택이 미덥지 않아서 어정쩡하게 보낸 그해 봄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대체 지금 다시 공부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미 녹슬고 굳어진 머리로 새로 공부를 한다고? 그게 가능이나 할까? 공연히 시간과 힘만 낭비하고 마는 게 아닐까……. 회의는 회의를 낳고 학교 교문을 들어설 때마다 뻘쭘해져 주변을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나 ‘나 같은 이’들이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그건 천만 원군이지요. 센 머리를 염색으로, 늘어나는 주름살을 화장으로 감춘 ‘동무’들과 만나게 되면서 좀 덜 외로워지고 덜 ‘뻘쭘’해집니다. 까짓것, 한번 해 보는 거지, 뭐……. 그런데 뜻밖에도 어정쩡하게 시작한 이 ‘새 공부’가 시간이 갈수록 새록새록 재미가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학교 수업이 온통 공부밖에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전히 교과목을 공부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업 중에 선생님과 공부 너머 삶과 세상살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학생회 활동을 통해서 동무들과의 우정을 쌓아가면서 지난 2월의 선택이 괜찮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학교는 ‘배움의 공간’이지만 배움이란 교과서 속의 지식만으로 한정되지 않지요. 어쩌면 주어진 과정을 통해서 동무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고, 더러는 서로 갈등하면서 얻는 교과서 밖의 배움이 더 클지도 모르니까요.

▲ 지난 12월, 방송고의 졸업여행. 아쉽게 참가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

그리고, 세 해가 흘렀고, 드디어 졸업입니다. 아무도 지난 삼 년을 뉘우치지 않습니다. 그날의 선택이 만용이 아니라, ‘쓸 만한 것’이었다는 걸 뒤늦게 인정합니다. 뒤늦은 공부가 할 만한 것이었다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과 공부를 같이 한 교사로서 나는 여러분의 선택이 ‘최고’는 아니었을지라도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기꺼이 보증하겠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의 배움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겸허해지고 깊어졌다는 것도 넉넉하게 받아들이길 권합니다.

 

과정을 넘어 새로워지는 당신…

 

특별히 여러분의 졸업이 더 큰 축하를 받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쉬어야 할 일요일에 등교해 공부해야 하는 게 반드시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압니다.

 

연간 등교일 24일을 시쁘게 보았던 이들은 중도 탈락했지요. 뒤늦은 공부를 한다는 게 어찌 교과서와 등하교만의 일이겠습니까. 모셔야 할 어른들과 돌보아야 할 아이들에다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숱한 관계들을 챙기는 일은 또 얼마였던가 말이지요.

 

축하합니다. 어떤 이들은 대학으로 진학하고 어떤 이들은 다시 사회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가는 길이 달라도 졸업식장을 나서는 여러분들은 이제 어제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학력 하나를 보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을 스스로 넘음으로써 여러분은 새로워졌고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 여러분들의 뒤늦은 면학의 과정에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이제 헤어지지만 언제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그때엔 ‘사제’로서가 아니라 정겨운 벗으로, 좋은 이웃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늘 ‘함께하는 삶’ 속에서 강건하시길 빕니다.

 

 

2015. 2. 16. 낮달

 

 

덧붙임 :

이 글은 우리 방송고 교지 겸 앨범 격인 <반딧불> 28호에 실은 글이다. 우리 반은 지난 1일 마지막 점심 모임에서 반창회를 만들기로 하고 벌써 회비부터 걷었다. 첫 모임은 오는 4월이다. 부지런한 총무는 졸업식 날 밤에 벌써 밴드를 개설했다.

 

40대 중견들과 5, 60대의 시니어들과 함께 한 지난 1년은 참 좋았다. 그 한결같은 마음들이 모여서 오는 4월의 반가운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나는 교사로 이 이들을 가르쳤지만, 사실은 배운 게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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