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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세시 풍속·24절기 이야기

입춘과 설을 지내고

by 낮달2018 2024.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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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과 설

▲ 연날리기.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가장 많이 하는 놀이다. ⓒ 한국의 세시풍속

입춘(立春)

 

입춘은 지난 4일이었다. 올 입춘은 설날 연휴 코앞인 섣달 스무여드렛날에 들어서는 바람에 무심결에 지나가 버렸지만, 본디 입춘은 새해 처음 드는 절기다. 음력에서 정월은 봄이 시작되는 때이니 입춘은 봄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새해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입춘에 베풀어지는 민속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낯익은 것은 입춘첩(立春帖)이다. 입춘첩은 춘축(春祝)·입춘축(立春祝)이라고도 불리며, 각 가정에서 대문이나 대들보·천장 등에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이는 것을 이른다.

 

<한국의 세시풍속>(학고재)을 넘기면서 몇 장의 입춘 관련 사진을 만난다. 한편으론 아련하면서 그것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것은 한때의 풍속이었을 뿐, 지금은 이미 시나브로 사라져가고 있는 풍경인 까닭이다. 방바닥에 지필묵을 단정하게 펼치고 두루마기 차림으로 입춘첩을 쓰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낯익다.

▲ 입춘축 쓰기 ⓒ 한국의 세시 풍속

그것은 20년도 전에 돌아가신 선친의 모습이다.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의 모습은 영락없이 선친의 그것이다. 이미 흔적도 없어진 옛 고향 집 대문에 당신께서 쓰신 입춘첩은 그해 내내 ‘여덟 팔(八)자’로 삐딱하게 붙어 있었다. 선친께선 입춘첩의 글귀로 늘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쓰셨다.

 

입춘첩의 내용이 매우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자라서 오래된 전통 가옥을 돌아다니면서였다. 안동의 내앞마을 의성 김씨 종택에 붙은 입춘첩은 ‘응천지지개합(應天地之開闔) 납일월지광명(納日月之光明)’이라는 다분히 낯선 글귄데 어디서 비롯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글쎄, 언제쯤 이 풍속이 서민들에게까지 퍼졌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게 기둥에 입춘’이란 속담으로 미루어 볼 때 입춘에 춘첩을 써 붙이는 건 양반들의 고대광실에나 어울리는 풍속이었을 것이다. 추하고 보잘것없는 가겟집 기둥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제격에 어울리지 않는 과람(過濫)일 터이기 때문이다.

▲ 내앞마을 의성김씨 종택의 입춘축. 드문 글귀다.

대문이 아니라 방문 도리에도 입춘첩을 붙이는 건 처음 알았다. 거기엔 주로 단구의 첩을 붙였다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닿아오는 글귀는 ‘춘광선도길인가(春光先倒吉人家: 봄빛은 길한 사람 집에 먼저 온다)’다.

 

여기서 ‘길인(吉人)’은 ‘재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름답고 착한 사람’이라고 풀어야 할 듯하다. ‘착함[선(善)]’은 원래 ‘정의’를 이름이니 어찌 봄이 그들의 문 앞에 먼저 당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설날

▲ 세배 풍경 세배와 덕담을 나누며 조손은 동질감을 확인한다. ⓒ 한국의 세시풍속

‘설’은 ‘새해라는 문화적 충격’을 표현한 ‘설다’라는 뜻에서 비롯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것은 새해에 대한 낯섦, 즉 새해라는 문화적인 시간 인식 주기에 익숙하지 못함을 표현한 것이다. 설을 ‘삼가고 조심하는 날’의 뜻인 신일(愼日)로 표현한 것은 새해라는 시간 질서에 통합되기 위해서는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는 것.

 

이런 뜻은 원일(元日)·세수(歲首)·세초(歲初)와 같은 한자어에도 내포되어 있다. 설날을 즈음해서 베풀어지는 세시 풍속들이 모두 ‘세(歲)’자 항렬로 시작하는 것도 같은 뜻으로 볼 수 있겠다. 이날의 뜻이 평범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 성주단지 위에 얹은 차례상. ⓒ 한국의 세시풍속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을 ‘세배’, 이날 대접하는 음식을 ‘세찬(歲饌)’, 차려 내는 술을 ‘세주(歲酒)’, 남녀 아이들이 모두 새 옷을 입는 ‘설빔’도 ‘세장(歲粧)’이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찬 중 가장 중요한 떡국과 세주로 차례를 지낸다. 예전에는 ‘세함(歲銜)’이나 ‘세화(歲畵)’ 같은 것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풍속일 뿐이다.

 

장모님께서 편찮으셔서 입춘날에 미리 아내를 처가에 보내고 나는 아이들과 나중에 들렀다. 따로 들를 큰집이 없으니 우리 집 명절은 단출하다 못해 쓸쓸하기조차 하다. 그런데 마음 탓인가. 올 설은 여느 설 같지 않게 스산하고 썰렁하다.

 

마을 고샅이나 동구를 살펴봐도 귀성한 승용차만 잔뜩 보일 뿐, 설빔을 차려입은 아이들도 세배하러 다니는 어른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집마다 울려 퍼지곤 했던 윷놀이의 소란도 없이 동네는 마치 죽은 듯 고요했다. 설 대목 이전부터 내내 장모님께서 앓으셔서 그랬는가. 외가에 온 처조카들도 맥이 없어 보였다.

▲ 위도의 띠배 ⓒ 한국의 세시풍속

세시 풍속이 시대와 함께 변천되어 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러는 없어지고 더러는 새로 생기기도 하는 이 풍속을 호오(好惡)의 잣대로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다. 문제는 그 풍속이 담고 있던 공동체의 정신, 그 나눔과 보탬의 문화가 쇠잔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농한기인 정월엔 ‘농업 생산의 주기에 따라서 전개되는 신앙적 의식’인 농경의례가 설날부터 상원(정월 대보름)까지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의식은 마을을 단위로 한 동제(洞祭)로 집중된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당산제, 동신제, 산제, 용왕제 풍어제 등이 베풀어지는 때가 바로 이때인 것이다.

 

<한국의 세시 풍속>에서 소개하고 있는 전북 부안군 위도면 대리의 용왕굿은 풍어를 기원하고 물에 빠진 원혼을 달래주는 굿인데 바다에 띄우는 띠배가 인상적이다. 동네의 온갖 재액을 담은 허수아비와 함께 그들을 달랠 제물을 실은 이 배를 띄움으로써 마을 사람들은 한 해의 액운을 저 멀리 쫓아내는 것이다.

 

물가는 다락같이 오르고, 그래도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맞는 새해, 새봄인데 새해가 그 기대를 채워줄 듯하지 않으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 비록 사진 속의 띠배지만 그것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것은 이 땅에 내릴 모든 액운을 그 작은 배가 고스란히 싣고 떠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2008. 2.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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