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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접시론(論), 접시야 깨지면 그뿐이지만……

by 낮달2018 2021.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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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시 깨기’와  ‘알아서 기기’  사이

▲ 용산 사태와 경찰특공대. 건물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

김국환이란 대중가수가 부른 ‘우리도 접시를 깨자’라는 노래가 크게 히트한 것은 제법 오래전의 일이다. 이 노래는 이를테면 남편 동지의 ‘가사 노동’ 분담에 관한 ‘캠페인성 가요(?)’다. 익숙하지 않은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 한두 개쯤 깨는 게 무어 대수냐고 가수는 반문한다.

 

그렇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던 ‘근엄한 가부장 문화’를 깨는 데 접시 두어 개쯤 상하는 일은 그저 남는 장사다. 접시가 아니라, 가정 안에서 고착화한 성역할이 깨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남편의 설거지로 아내가 따낸 시간을 ‘저야 놀든 쉬든 잠자든’이라면서 휴식으로 한정하거나 ‘거울 볼 시간’으로만 풀이하는 건 아쉽긴 하지만.

 

서울경찰청장 ‘접시 깬 게 아니라 집 태워 먹은 것’이라고?

 

요즘 ‘접시’ 이야기가 흥미로운 화제로 떠올랐다.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용산 참사에 대한 서울경찰청장의 책임과 관련해 “김석기는 접시 깬 게 아니라 집 태워 먹은 것”이라고 일갈한 것이다. ‘마스크 금지’나 ‘사이버 폭력죄’를 ‘비겁자 응징법’이라 명명하며, 자신이 법률가 아닌, 정치인임을 기꺼이 증명한 공안검사 출신 선량의 발언으로는 좀 뜻밖이긴 하다.

 

난데없는 웬 ‘접시 깨기’? 이 이야기의 뿌리는 지난해 연말께, 이명박 대통령이 ‘새해 경제 운용 방향 보고대회’에서 “위기 땐 일하다 접시 깬 공무원이 더 낫다”라며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일 처리를 독려한 데 있다. 납작 엎드려 ‘땅과 한 몸이 되는 것[신토불이(身土不二)]’보다는 차라리 과감히 일하다 실수를 하는 게 낫다는 말이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열심히 일하되 신중한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일하지 않고 몸만 사리는 것은 국민의 심부름꾼으로서 공무원이 할 짓이 아니다. 국리민복(거창하다!)을 항상 모든 사고의 맨 위에 두고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관리의 기본이니 말이다.

 

그러나 요즘, 이 ‘접시 깨기론’은 대통령의 기대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 같아 영 씁쓸하다. ‘적극적으로 일하다’와 ‘윗분의 심기를 살펴 일하다’는 사촌 간이다. 방향은 반대지만 거기 담긴 ‘적극성’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윗분의 심기를 살펴 일하다’와 ‘알아서 기다’는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이다. ‘기다’는 ‘윗분의 심기를 살피되 그의 마음에 흡족할 일만 하다’의 뜻으로 보면 틀림없다. 요즘 나라 꼴이 되어 가는 모양은 바로 이 ‘알아서 기는 형세’라고 볼 수밖에 없다.

▲ 김용민의 그림마당 (2. 5.)  ⓒ 경향닷컴 김용민

집권당 원내총무는 서울경찰청장이 적극적으로 일하려다 ‘접시’ 대신 ‘집’을 태워먹었다고 점잖게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기실 그의 ‘적극적’인 임무 수행이란 임명권자의 심기를 살펴 단방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잉 충성’에 있다는 게 중론인 듯하다. 말하자면 ‘알아서 기다가 일어난 사고’라는 게다.

 

‘접시 깨기’와 ‘알아서 기기’ 사이

 

견문은 짧지만, 비슷한 경우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노무현 정부 때는 그 대단한 기개를 자랑하던 검찰이 어느 날, 충견처럼 순치(馴致)되어 정권의 입맛과 심기를 알아서 살피고 있지 않은가. ‘촛불’ 이후 화려한 기소와 검거로 일관된 저 눈부신 검찰권 행사를 보라.

 

검찰은 졸지에 감옥에 가거나 기소된 열혈 시민들에게 착실하게 민주주의를 교육했다. 물론 반면교사로 말이다. 조중동 광고 불매 운동에 참여한 누리꾼들을 집단 기소하고, PD수첩을 수사하고, 끝내는 미네르바까지 구속한 위대한 검찰은 참여정부 때 쪼그라들었던 과거의 영광, 그 권위를 바야흐로 ‘복원’하고 있다.

 

용산 참사 이후, 자신들의 ‘정당과 순결(?)’을 증명하고자 여론 조작마저 서슴지 않는 저 ‘열혈 경찰’들은 말할 것도 없다. 군부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의 ‘주구’로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회한의 세월은 잊은 지 오래인지 그들의 촉수는 권력의 심기를 살피는 데 여념이 없는 게 아닌가. ‘경찰권 독립’을 부르짖던 투사들은 어디에 갔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나마 다수 국민 편이길 기대했던 사법부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마땅히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사건들에 대해 사법부는 공정한 심판 노릇을 하리라는 저간의 기대는 참담하게 무너졌다. 구속영장은 줄줄이 발부되고, 가처분 신청은 기각되고, 무죄 선고의 가능성은 실낱같을 뿐이다. 저 검은 옷의 판관들에게 ‘알아서 긴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가.

 

검경이, 사법부가 그럴진대, 행정부야 더 이를 게 없다.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기득권층의 불만과 문제 제기가 무섭게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그 ‘의중’을 관철한 교육과학기술부와 ‘비지니스 프렌들리’하게 갖가지 반노동적 정책을 서슴없이 내는 노동부, 15년간 안전과 안보를 이유로 112층 빌딩을 반대해 오다 하루아침에 의견을 뒤집은 군과 국방부도 접시 몇 장 깨지는 데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곳이다.

▲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PD수첩과 관련해 기소할 수 없다고 사표를 던진 검사와 ‘정권과 방향 생각 달라 부담’이라며 옷을 벗은 판사는 그 대열에 서는 게 힘들었던 사람들인가. 숱한 주류들이 ‘열심히 일하면서 접시가 깨지는 것’을 개의치 않았을 때, 이들은 ‘접시’가 아니라 ‘세상’이 깨지는 거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기야 접시 깨지는 게 무슨 대수일까. 아내를 쉬게 하려고, 그녀에게 시간을 주고자 하는 남정네가 설거지하다 접시 몇 장을 깬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또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이 의욕에 넘쳐 일하다 실수 한두 가지 하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깨지는 게 ‘접시’ 아닌 ‘민주주의’, ‘민심’이라면…

 

그러나 깨지는 게 접시가 아니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게 지난 수십 년간의 투쟁으로 지켜내고 쌓아온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과 같은 가치라면, 그게 고단한 세상살이에 지친 국민의 마음이라면, 모두가 손잡고 지켜야 할 우리의 삶, 그 공동체라면, 우리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목민(牧民)의 참된 목적과 정치의 본령을 모색한 18세기 조선의 빛나는 지성,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벼슬살이의 요체는 ‘두려워할 외(畏), 한 자뿐이다. 백성을 두려워하라. 나(수령)라는 사람은 객(客)이요, 저 백성은 주인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백성 보살피기를 아픈 사람 돌보듯 하라.”
“아래 백성의 뜻이 통달하여 막힘이 없어야 백성의 부모라 할 수 있다.”

 

‘백성이 정치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던 다산은 ‘백성을 위해서 목민관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에게는백성이 모든 정치와 목민의 준거였다. 그러나 ‘권력의 심기를 헤아려 열심히 일하면서 접시 깨기를 저어하지 않는’ 이 시대 목민관들의 준거는 ‘다수 국민’이 아니라 ‘소수 권력’이고 그들이 지켜야 할 기득권의 성채일까.

 

김국환이 부르는 흥겨운 대중가요, ‘우리도 접시를 깨자’를 들으면서 날마다 신문 지면과 방송 뉴스 화면을 장식하는 ‘깨진 접시 조각’들을 불편하게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그들의 절망과 분노를 곰곰 생각해 본다.

 

 

2009. 2.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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