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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아이들의 ‘오지 않을 미래’를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0.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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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희망과 미래, 꿈과 현실의 부조화

▲ 대학 수학능력 시험장 풍경. 이 한 차례 시험은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해 버리곤 한다.

학년말이다. 방학을 앞두고 졸업반 아이들은 대학입학 정시 지원을 위한 상담 등으로 바쁘다. 가능한 학교를 찾느라 고심 중인 아이들의 얼굴에는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와는 다른 긴장감이 돈다. 그러고 보면 상대적으로 수시에 합격한 아이들이 누리고 있는 ‘망중한’은 그야말로 ‘황금’의 시간이라 할 만하다.

 

학년말 졸업반 아이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긴장은 시나브로 재학생들에게도 옮아간다. 해가 바뀌면 진급하게 되는 아이들에게도 새삼 시간은 만만치 않은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방학 중에 실시하는 보충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숫자는 예년에 비겨 많아졌다.

 

‘꿈과 현실의 부조화’

 

아이들은 아주 영악해 뵈지만 정작 어떤 부분에서는 얼치기다. ‘꿈과 현실의 부조화’를 받아들이는데 서투른 탓일까. 아이들은 아주 현실적이긴 하지만, 수능시험을 치를 때까지 자신의 ‘넘치는’ 꿈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 대학에 합격하는 게 객관적으로 불가능한 성적인데도 이들은 특정 대학, 특정 학과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걸 일러서 ‘꿈’이라고 하는 것일까. 아이들의 꿈은 현란하기 짝이 없다. 모두 다 서울의 명문 대학을 꿈꾸고 유망학과를 꿈꾸고 대중의 선망을 받는 사회인이 되기를 꿈꾼다. 그것이 한갓진 꿈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학년을 거듭하고, 수능시험이 가까워지면서 분명해진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실낱같은 희망조차 버리지 못한다.

 

아이들의 꿈을 기르는 것은 세상이고 어른이다. 아이들은 어떤 학교에 가야,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게 안락한 삶을 보장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이 안락한 미래를 꿈꾸는 걸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이들이 가질 법한 ‘풋풋한 순수’는 이미 없다.

 

자연계 상위권은 거의 모두가 ‘의대’를 꿈꾼다. 아이들하고 이야기해 보면 과거의 의대 지망생처럼 ‘낙도’나 ‘무의촌’을 들먹이는 아이들은 없다. 아이들은 안일한 삶과 기득권을 보장하는 가장 유용한 직업으로 ‘의사’를 꿈꾸고 있을 뿐이다. 그런 목표를 지향하는 아이들에게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일일이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직 ‘천문학’이나 ‘물리학’ 같은 기초학문을 공부하겠다는 아이들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전 시대만 해도 모두가 유망한 직업으로서의 의사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학창 시절의 순진한 꿈에 그칠지라도 그들에게는 ‘봉사하는 삶’으로 자신의 미래를 거는 아이들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몇몇은 스스로가 꿈꾼 삶을 실천적으로 살았다. <울지 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는 사제가 되지 않았더라도 ‘여느 의사’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고소득을 올리는 엘리트 계급의 의사가 아니라 보건의료 운동에 종사하거나 관련 병원에서 스스로 ‘낮은 삶’을 사는 이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실천적 삶이 세상과 역사를 조금씩 바꾸어 온 것이다.

 

졸업반 아이들이, 더러 ‘생물학’이나 ‘수의학’을 선택하는 것도 그것을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가는 길목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수능 고득점에 실패해 자연과학 계열로 진학한 한 아이는 졸업하면서 자신에게 다짐하듯 결연하게 말했다. “반드시 ‘의사’가 되고 말 거예요.”

▲ 아이들에게 ‘의사’는 미래의 보장된 삶과 동의어다 .

이 땅에는 ‘의대’와 ‘비(非) 의대’ 두 개의 대학만 있다는 우스개는 우스개로만 그치지 않는다. ‘의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은 숱한 ‘비 의대’보다 몇 곱절의 가치를 갖는다. ‘의대’는 이른바 ‘스카이(sky)’ 대학과 마찬가지로 경축 현수막에 단일 항목으로 오르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선망, 혹은 이른 좌절

 

의대를 희망하지만 정작 뜻을 이루는 아이들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그 목표는 더욱 신성하고 매력적인 목표가 되어 버린다. 얼마 전에 의대로 진학한 제자(남학생)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아이들은 교무실 양쪽 복도에 붙어 서서 창 안을 들여다보느라 부산을 떨어댔다. 단순한 호기심이라 말하기에는 아이들의 눈빛에 담긴 선망이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수업 중에 어쩌다 이른바 S대학이나 의대로 진학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다 이내 한숨을 쉬곤 만다. 그 짧은 순간에 어린 여학생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런 기득권, 안락한 삶에 편입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과 그 소망을 실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자신의 힘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었을까.

 

그런 아이들을 향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그렇게 말하곤 한다.

 

“제발, 그러지들 마. 너희들의 그런 모습은 한심하다 못해 바보 같아. 선망의 삶을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던가, 그게 어려우면 자신에게 합당한 삶을 그리고 가꿀 일이지, 바보같이 입을 헤벌리고 탄식할 일은 아니잖아.

집에 가서 부모님께 여쭈어봐라. 당신의 삶은 어땠냐고. 비록 만족스럽지 못하다 할지라도 당신의 삶을 ‘실패’라고 여기는 분은 아무도 없을 거야. 너희도 마찬가지 아닐까. 입시에서의 실패가 반드시 삶에서의 실패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야…….”

 

글쎄, 내 얘기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다가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게 유일한 답인 것처럼 아이들은 다시 교과서에 코를 박는다.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내 위로와 충고는 멀고, 자신이 받는 점수가 대학의 등급을, 그리고 자신의 미래까지도 결정짓고 만다는 세간의 진리가 훨씬 가깝다는 걸.

 

몇 해 전, 지역 명문고에 합격한 이웃 시군 중학교 졸업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입학 전에 치른 배치고사 성적에 절망해서였다. 교사들은 그 아이를 자신에게 매우 긍정적인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 기억했다. 아이가 죽음을 선택하게 한 것은 진학해 맞닥뜨릴 아이들과 경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경쟁 앞에 스러진 소년의 꿈과 삶

 

▲ 뭉크 작 '불안'

아이의 죽음을 전해 듣고 한동안 망연했던 기억이 새롭다. 열다섯 살, 이제 겨우 여드름이 돋아나는 사내아이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밀어 넣은 가없는 절망의 정체는 이 땅의 살인적인 경쟁교육이었다. 끝이 보이는 미래란 절망보다 더 무서운 법이다. 아이는 경쟁에 부딪히기보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에 때문에 나아가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포기했다.

 

아이가 느꼈을 가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아이들 일반의 문제로 유추하는 것은 온당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 교육, 우리 학교가 져야 할 책임의 문제로 남는다. 파행적 입시교육, 가공할 학벌주의, ‘내 아이만’에 집착하는 ‘성(聖) 가족주의’, 수월성 교육에 대한 권력의 경도 따위의 우산 속에 우리는 숨는다.

 

불안해 뵈는 좁은 어깨를 웅크리고 긴장된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본다. 그런 아이들 앞에서 단지 무력한 교사일 뿐이라고, 빌라도처럼 ‘이 피에 대하여 나는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상념에 12월 하순은 우울하기만 하다.

 

 

2010. 12.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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