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④]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李準泰, 1892~1950)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풍산 오미마을의 김재봉(1890~1944)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한 것은 조선노동대회의 대표로서였다. 비록, 안동 와룡 출신의 안상길(1892~1958)과 함께 임정 선전과 자금모금을 하다가 붙잡혀 6개월 징역을 살긴 했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김재봉이, 내로라하는 조직의 대표들이 모인 극동 민족대회에 참석한 것은 일종의 ‘미스터리’(최백순, <조선공산당 평전>)였다.
대회 뒤,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르며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 입당한 김재봉이 조선공산당 창당의 밀명을 띠고 15개월 만에 귀국한 것도, 1925년에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가 된 것도 그 미스터리의 연장선에 있었다. 경성공업전습소(경성고등공업학교의 전신, 뒤에 서울대 공대로 재조직)에서 공부한 뒤, 귀향해 강습소를 열었던 그가 국내의 대표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대회 대표로 선임된 것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재봉의 극동 민족대회행의 열쇠, 이준태
김재봉의 전격적 등장에 관해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최백순은 이러한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로 동향인 이준태를 제시한다. 풍산 우렁골(상리리) 출신으로 김재봉보다 2년 아래인 이준태는 김재봉과 경성공업전습소 동문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총독부 측량기사로 일하던 이준태는 김재봉과 함께 안상길을 만나 함께 일했지만, 구속은 피했다.
두 사람이 가입해 있던 조선노동대회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6장의 극동 민족대회 대표권을 배정받았는데, 그 마지막 한 장이 김재봉에게 돌아온 것이었다. 최백순은 조선노동공제회나 조선노동대회와 달리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쥔 노동 대중 조직을 꾸리려 했던 이준태에게 이 모든 결정의 열쇠가 있으리라 추정한 것이다.
1920년께 안상길·김재봉과 함께 임정 일을 함께하기 이전에 이미 이준태는 서울에서 그 존재를 뚜렷이 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7월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학우회 주최 순회 강연 변사 제군’이라는 글로 청년들에게 민족 사랑을 요구하였다. 이듬해에는 여름방학을 맞은 학생들에게 ‘강연단을 조직하여 농촌으로 가라’는, 마치 1930년대의 ‘브나로드 운동’을 연상하게 하는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
이준태는 1920년에 노동운동 조직인 조선노동대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여하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최백순은 조선노동대회를 이끌던 안동 출신 사회주의자 노병희가 이준태와 ‘노동이라는 공통분모’로 알고 지냈을 것으로 보았다. 결국 갓 출옥한 김재봉에게 극동 민족대회행 대표권이 돌아가게 한 데는 이준태의 역할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준태는 노동운동에 입문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사회주의운동이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1922년 1월, 김한(1887~1938, 2005 독립장), 신백우(1889~1962, 1990 애국장) 등과 서울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무산자동지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3월에는 무산자동지회와 신인동맹회가 통합한 무산자동맹회의 상무위원이 되어 기관지 <무산자> 발행에 힘을 보탰다.
이 무렵 이준태는 김한·신백우 등이 활동하던 ‘조선공산당’(1925년 창당된 조선공산당과는 다름. ‘중립당’)’에 가담하였다. 10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가 분화한 혁명적 성격의 노동단체 조선노동연맹회에도 참여했다. 1923년 3월 서울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청년단체 전조선청년당대회에도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이처럼 이준태를 비롯한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활동의 범주를 넓혀 가면서 사회주의 지향을 명확히 하며 조선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23년 5월, 김재봉이 15개월 만에 코민테른 국내부 책임자가 되어 러시아에서 귀환한 뒤, 곧바로 꼬르뷰로(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가 조직될 수 있었다.
풍산소작인회와 조선공산당 2차당 차석 비서
그해 7월, 서울에서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투쟁을 전개하자 이준태는 윤덕병·김남수 등과 함께 <고무 여직공의 동맹파업 전말서>라는 선전문을 작성, 전국의 노동단체에 배포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윤·김과 함께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같은 달, 이준태는 사회주의 연구 목적의 ‘신사상연구회’의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신사상연구회는 이듬해 11월, 마르크스의 생일에서 따온 ‘화요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그 성격을 분명히 했다. 1923년 11월, 고향으로 내려온 이준태는 권오설 등과 함께 소작농뿐 아니라 자작농·중소 지주·진보적 청년 지식인들이 참여한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월에는 안동에서 화요회의 지회 격인 ‘화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달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위한 준비그룹이 발행하려는 사회주의 잡지 <화화(火花)>의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2월에는 화요회에서 사회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기본방침을 토의하고자 개최한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의 안동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조공)이 서울에서 창립되었을 때, 이준태는 안동에서 풍산소작인회와 화성회 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8월에 풍산소작인회는 읍내에 풍산 소작인회관을 준공하고 그 낙성식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5천여 명이 참석한 낙성식에서 이준태가 식사(式辭)를 맡았고, 안동청년연맹의 김남수가 축사를 했다. 식이 끝나고 수천 명 군중은 적색기와 악대를 앞세우고 시가지를 누볐다고 전한다.
서울에서 당이 창당되었는데도 이준태가 안동에 머문 것은 이러한 지역 활동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예비 간부를 중앙에서 분리’(김희곤)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해 8월에 예천의 보수 단체 회원 수천 명이 형평사 예천 분사를 기습한 이른바 ‘예천 사건’이 일어났다. 이준태는 이 사건에 대응하여 안동의 12개 단체가 공동으로 꾸린 연합 회의의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1월에는 ‘도산서원 소작인 태형(笞刑) 사건’이 일어났다. 서원에서 1920년에 조선총독부가 폐지한 형벌을 소작인에게 가한 사건에 안동의 사회단체들은 경악했고, 이에 도산서원 철폐 운동으로 맞섰다. 풍산소작인회에서는 별도의 전문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이준태의 이름은 13명의 명단의 맨 앞에 있었다.
이준태가 다시 상경한 것은 11월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이 발생하면서였다. 조공 산하 고려공산청년회(공청) 책임 비서 박헌영 내외 등 당원 1백여 명이 검거된 조직의 위기에 김재봉이 이준태를 소환한 것이다. 김재봉은 강달영을 책임 비서로, 이준태·홍남표·이봉수·김철수 등 5명에게 조직을 맡기고 피신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듬해(1926) 2월, 강달영의 2차당에서 중앙집행위원 이준태는 비서부 차석과 당 교섭 대표자로 선임되었다.
2차당에는 동향 후배 권오설도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로 참여했는데, 이들은 2차당 조직 과정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4월에 순종이 사망하자, 공청의 권오설은 인산일에 민중항쟁을 기획하였지만, 사전에 기밀이 새어 조공은 당원 1백여 명이 잡히는 등 치명상을 입었다. 이것이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이다.
권오설에 이어 이준태도 일경에 체포되었다. 길고 지루한 공판이 이어지면서 이준태와 권오설 등 5명의 피고인은 일제 경찰을 ‘폭행과 학대, 직권 남용’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1928년 2월에 이준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준태는 1930년 10월 출옥해 풍산 우렁골로 돌아왔다. 김재봉과 마찬가지로 일경의 감시로 나들이도 자유롭지 못해 그는 칩거 생활을 이어갔다. 풍산 읍내에 잡화점을 열었던 이준태는 해방이 되자, 셋째 아들에게 가게를 맡기고 서울로 갔다. 이후, 이준태의 행적은 거의 알려진 게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1945년 12월 전국 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에 안동군 대표로 참가, 검사 위원으로 선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일가의 비극과 ‘풍산 트로이카’ 중 유일한 미서훈
경기도 양주에 있는 이씨 문중 재실에서 머물다가 이준태가 귀향한 것은 6·25전쟁이 일어난 뒤였다. 그는 9월 국군의 북진을 따라 북상 길에 올랐다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는 경북의 산악지대를 지나다가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월북설도 있긴 하지만, 그가 평양에 나타났음을 전하는 자료는 전혀 없으니 믿기 어렵다.
그의 종적이 끊긴 뒤, 가족들에게 남은 것은 고초뿐이었다. 이준태의 아내는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고, 맏아들은 1953년 1월, 마을 근처에서 우파 세력에게 총살되었다. 둘째 아들은 서울에 살다 피난길에 올랐다가 한강 다리 폭파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풍산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던 셋째는 부친과 관련한 주변의 신고로 곤욕을 치르다 집을 나갔다. 한 집안이 풍비박산된 것이다.
안동 출신의 사회주의자들, 1925년 조선공산당 창건의 주역들인 김재봉(애국장), 권오설(독립장), 김남수(애족장) 등은 2005년에 서훈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풍산 트로이카’를 이루며, 조선공산당 창건 전후 당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다했던 이준태만이 서훈에서 제외되었다.
사회주의자로 독립투쟁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조선공산당 경북도기관 책임 비서 안상길(1892~1958), 권오설의 동생으로 <해방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권오직(1906~1953),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안기성(1898~?) 등은 해방 후 북으로 갔다. 그러나 북으로 가지도 않았고, 해방 정국에서 좌익 활동도 거의 드러나지 않은 이준태가 잊힌 존재가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풍산읍 상리리 364번지 이준태의 생가는 퇴락을 거듭하다가 최근 손자며느리가 묵은 집의 대들보만 살리고 새로 단장한 집을 지키고 있다. 집 오른쪽 측면에 따로 문을 달아 처마에 그의 호를 딴 ‘一烽齋(일봉재)’라는 편액을 걸어놓았다. 일봉재에는 ‘항일 애국지사 일봉 이준태 상’이라 새긴 흉상이 놓였고, 그 위로 낡은 태극기가 걸려 있다.
태극기는 집 출입구 쪽 울타리 게양대에도 걸려 있다. 무심하게 휘날리는 깃발은 풍산 트로이카 중 유일하게 서훈을 받지 못한 데 대한 후손들의 항의처럼 보인다. 청년 이준태가 열망한 혁명과는 무관하게 그는 이 땅을 떠나지 않았다고, 대한민국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무언의 시위처럼. 그러나 일봉재에 모신 흉상과 일제 감시대상 인물 카드 속 이준태의 깊숙한 눈길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2021. 1. 11. 낮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①]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②]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권오설(1897~1930)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③] 제3차 조선공산당(안광천) 조직부장 김남수(1899~1945)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⑤] 조선공산청년회 중앙위원·코민테른 전권위원 김단야(1901~1938)
* 이 글은 2021년 1월 11일에 올린 글이었으나, 실수로 삭제하는 바람에 다시 정리해 올리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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