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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

혁신유림 이은 항일 지식인, 일제와 싸우다 쓰러지다

by 낮달2018 2021.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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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③] 제3차 조선공산당(안광천) 조직부장 김남수(1899~1945)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 명문가 탁청정 종손으로 태어난 김남수도 혁신 유림의 감화를 받은 청년이었다 .
▲ 혁신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은 김대락, 이상룡, 류인식, 김동삼. 김남수는 협동학교에서 동산과 일송에게서 감화 받았다 .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은, 퇴계학 전통을 이어온 경상북도 안동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지역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자신이 몸담았던 보수적 세계관을 깨뜨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고자 한 유학자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흔히 ‘혁신 유림’으로 불린다.

 

혁신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은 백하 김대락(1845~1914, 1990 애족장), 석주 이상룡(1858~1932, 1962 독립장), 동산 류인식(1865~1928, 1982 독립장), 일송 김동삼(1878~1937, 1962 대통령장) 등이었다. 이들은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나라가 망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으니 이들의 감화는 그다음 세대에게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이다음 세대의 행동하는 청년 지식인들이 곧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의 주역들이었다.

 

혁신유림의 감화받은 청년 지식인, 김남수

 

광산 김씨 동족 마을인 안동시 예안면 오천리의 탁청정(濯淸亭) 김수(1491~1555)의 종손 김영도의 차남으로 태어난 김남수도,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에서 그 설립자인 류인식과 김동삼의 훈도를 받았다. 갓 스물에 예안 3·1운동에 함께한 김남수는 1920년부터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관련 글 : 칠군자 마을에  항일 지사의 빗돌이 외롭다]

▲ 최초의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서 김남수를 편집부 간사로 임명한다는 알림장.

안동청년회에 가입하고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던 그는 1920년 9월 56세의 류인식이 주도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 편집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울로 간 그는 동향인 김재봉·권오설·이준태 등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단체 무산자 동맹에서 활동하며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김남수는 1922년 서울에서 조선노동연맹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풍산 출신의 이준태(1892~1950)와 함께 이 단체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6월 경성고무 공장 여공 파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이준태·윤덕병과 함께 ‘경성고무 여공 동맹파업의 전말’이란 보도 문서를 작성하여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했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에 안동에선 이준태와 권오설이 안상길 등과 더불어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했는데, 불과 석 달 만에 1천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 이후 풍산소작인회에 결합한 김남수는 안동 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성장하여 1925년 1월, 이준태와 함께 조선공산당의 모체인 화요회의 안동지회 격으로, 안동 지역 사회주의운동의 사령탑이 된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여 상무집행위원을 맡았다.

 

1925년 11월,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를 미루는 소작인들에게 태형을 가하자 김남수는 화성회와 풍산소작인회와 안동노우회(勞友會) 등과 연대하여 도산서원 철폐 운동에 들어갔다. 그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아니라 ‘도산서원盜産鼠院’이라야 옳다(도둑 도, 낳을 산, 쥐 서, 집 원: 도둑을 생산하는 쥐 소굴이란 뜻)"라면서 도산서원을 맹렬히 공격했는데, 당시 도산서원 원장은 바로 그의 부친이었다.

 

총독부의 포섭 대상으로, 지원을 받던 도산서원과 맞선 이 운동은 봉건적 지배 질서에 대한 항쟁뿐만 아니라 일본의 간교한 ‘문화통치’에 정면으로 맞선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 1923년 11월 풍산에서 조직된 풍산소작인회의 주역들. 이들은 소작인이 아니라, 지주거나 양반 계급이었다.

1925년 8월 이웃한 예천에서, 백정들이 전개한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사(衡平社)’ 운동을 반대하여 수천 명의 농민이 예천 형평 분사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김남수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그 경위를 계속 보도하여 형평사 운동에 대한 전국적 지원을 끌어냈다.

 

노농(勞農) 운동 지원과 청년회의 혁신·통일, 새로운 청년단체의 조직 등에 주력한 화성회의 활동은 노동운동 단체 안동노우회, 사상단체 정광단(正光團), 기자 단체 기우단(記友團) 등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화성회 활동은 각 면 청년회의 혁신을 촉진했고, 이는 8개의 청년회가 모인 안동청년연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지도부가 되었지만, 조선공산당은 몰락

 

김남수는 1925년 8월, 임시의장으로서 안동청년연맹 조직의 결성을 도왔고 10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를 해소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안동노우회 창립총회에서 사회를 맡았다. 사회운동단체를 매개로 야체이카(세포단)을 조직하여 활동 거점을 마련하고자 한 조선공산당은 1927년 이후 각 지역의 청년회와 농민·노동운동 단체를 토대로 성장하였다.

 

1925년 신의주 사건으로 무너진 조선공산당은 그해 연말에 극비리에 2차로 재조직된 강달영 책임 비서와 권오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체제로 간신히 조직을 추슬렀다. 그러나 이듬해 6·10 만세운동으로 3·1운동의 재현을 꾀했던 2차 조선공산당은 거사를 앞두고 계획이 탄로 나 조직이 일망타진 당하면서 다시 무너졌다. 이른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다.

 

조선공산당이 제3차 조직으로 복구된 것은 1926년 9월이었다. 상해파 출신으로 ‘통일 조선공산당’을 주장해 온, 2차 당 중앙위원 김철수(1893~1986, 2005 독립장)가 초대 책임 비서를 맡았다. 김철수는 12월 6일, 제2차 당 대회에서 안광천(1897~ ?)에게 책임 비서를 자리를 넘기고 코민테른 승인을 받기 위해 소련으로 떠났다.

 

3차당의 2대 책임 비서 안광천(1897~ ?)은 일본의 사회주의 유학생단체인 일월회 간부였다. 일월회는 국내에 잠입한 뒤, 종래의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바꾸어야 한다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의 민족 협동전선 결성을 촉구하는 ‘정우회선언’을 발표하였다. 3차당은 바로 이 ‘정우회선언’에 따라 재건된 당이었다.

 

3차당은 사회주의운동 그룹인 ML파가 주요 세력이어서 ‘ML당’으로 불리는데, 이 당은 조선공산당 사상 최초의 이른바 ‘파쟁 청산의 통일적 당’이었다. 코민테른은 ML당을 승인하고, 당 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비밀리에 내려보냈다.

 

김남수는 안광천은 지도부에 유일한 화요회 구성원으로 조직부장을 맡았다. 안광천은 정우회를 해체하고 민족주의자들과 새로운 대중 단체를 조직하는 데 힘써 1927년에 2월, ‘신간회(新幹會)’가 출범할 수 있었다. 신간회는 이상재, 허헌, 홍명희, 신채호 등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최초의 좌우합작 단체였다.

 

안광천 지도부는 9개월 뒤에 김준연(1895~1971, 1991 애국장)으로 바뀌었고, 한 달여 뒤에는 김세연(1899~?)으로 교체되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의 당 대회 개최 정보를 입수한 일경은 책임 비서를 지낸 김세연·김준연 등 핵심 간부 32명을 체포했다.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다.

 

검거를 피한 안광천은 당 대회를 준비하여 2월 27일 밤부터 제3차 당 대회를 열어 노동자 출신의 차금봉(1898~1929, 2005 애국장)을 책임 비서로 선출하는 등 새로운 당 지도부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이 당 대회가 조선공산당의 마지막 당 대회가 되었다.

 

차금봉 지도부는 출범 4개월째인 1928년 6월 조직 담당 중앙집행위원이자, 당 기관지 <조선지광> 책임자 이성태(1901~?)가 체포되면서 마지막 위기를 맞았다. 차금봉은 당을 해산하고, 당 조직은 망명한 양명(1902~?)에게 인계하기로 하였지만, 이를 실행하지도 못하고 7월부터 일제의 검거 선풍에 중앙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10월까지 검거된 조선공산당 관련자는 175명에 이르렀다.

 

1928년 12월, 더는 사회주의자들의 그림자조차 남지 않은 경성에 날아온 코민테른 발 소식은 조선공산당의 숨통을 끊었다. 감옥의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와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한다는 결정을 속절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조직의 씨를 말리려던 일경의 고문 후유증으로 차금봉은 1929년 3월 옥사했다.

▲ 안동시 와룡면 군자리의 탁청정. 김남수는 탁청정 종택(정자 왼쪽 기와집) 종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 탁청정 종택. 김남수는 탁청정(濯淸亭) 김수(1491~1555)의 종손 김영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안광천 지도부에서 조직을 맡았던 김남수가 체포된 것도 1928년 6월이었다. 그는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는데, 폐병을 앓은 데다가 한동안 ‘정신 이상설’이 보도되는 등 그는 힘겨운 징역을 살아야 했다. 178cm의 건장한 체격이었던 김남수는 고문과 수형 생활 끝에 망가진 몸으로 1931년 5월에 출옥했다.

 

출옥해서야 들은 소식, 부모 임종도 못 한 채…마흔여섯에 지다

 

그는 출옥해서야 그 전해 연말에 모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가족들은 그를 염려하여 모친의 부음을 전하지 않은 것이었다. 출옥 이후, 김남수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서른두 살 청년은 심각한 복역의 후유증을 앓은 듯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39년에는 사문서위조행사 혐의로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에 그는 부친상을 당하였다.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신, 그는 양친의 임종조차 하지 못한 불효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김남수는 1945년 3월 22일, 삶과 투쟁에 대한 기억만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향년 46세였다. 다섯 달 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을 거쳐 남북한에 각각 이념을 달리하는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는 더는 소환되지 않았다.

 

강력한 친미 반공 국가로 이어지면서 사회주의자 김남수의 이름은 잊혀 갔다. 안동의 명문가인 광산 김씨 집안에서도 도산서원 철폐 운동을 전개한 그의 존재 때문에 오랜 세월 외면받았다. 그 사이, 오천리는 예안면에서 와룡면으로 편입되고, 1974년 안동댐 조성으로 수몰을 피해 마을은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2005년, 사후 60년 만에 김남수의 독립운동 공적이 밝혀지면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2008년에는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였다. 서훈을 받은 2005년 11월에, 옮겨온 군자마을 탁청정 종택 앞 주차장에 ‘김남수 선생 항일 애국 기적비’가 세워졌다.

 

조선공산당 창당의 주역들인 안동의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들의 투쟁과 삶도 잊히었다. ‘좌익의 후예’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던 후손들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김남수의 아들 김용직(1932~2017)은 한국 현대시 연구로 명성을 쌓은 국문학자로 서울대 교수로 정년퇴직했다. 그가 풍산읍 가일마을에 세운 권오설 선생 기적비에 쓴 비문에서 “검수도산(劍樹刀山) 무릅쓰고 조국의 자유를 추구한 그 의기”와 “민중 민족을 위하여 물불도 가리지 않았던 그 사상과 정신”을 언급한 것은, 그가 열세 살 때 잃은 부친에 대한 애끊는 ‘사부가(思父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서훈 받던 2005년 11월, 군자리 종택 앞 주차장에 세워진 김남수 선생 기적비

해방 이후 76년이 지났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자부하는 경북 안동에는, 고성이씨, 전주류씨, 진성이씨, 광산김씨, 의성김씨, 예안이씨 등 지역 명문들이 동참했던 ‘혁신 유림’의 전통도 거의 사라졌다.

 

2019년 5월,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의 종손이라는 이가 당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를 ‘구세주’로 칭송하다 여론의 몰매를 맞는 소극이 벌어졌다.(관련 기사 : “황교안 구세주” 칭송 안동 유림이 욕먹는 진짜 이유) 혁신 유림이 사라진, 21세기의 안동은 지금 영남의 여느 고장과 다르지 않은 보수적인 도시로 되돌아간 것이다.

 

2021. 1. 7. 낮달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①]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②]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권오설(1897~1930)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④]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1892~1950)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⑤] 조선공산청년회 중앙위원·코민테른 전권위원 김단야(1901~1938)

 

 

혁신유림 이은 항일 지식인, 일제와 싸우다 쓰러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③] 제3차 조선공산당(안광천) 조직부장 김남수(1899~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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