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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수상 거부? 기특한 ‘고딩’들

by 낮달2018 2020.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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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의 표창장을 거부한 고등학생들

▲ 국가인권위원회 현병철 위원장.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인권상 수상 거부는 위원장을 겨냥하고 있다.

막장으로 치닫는 현병철의 국가인권위원회가 올해 세계 인권의 날(12월 10일)을 앞두고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인권 표창장을 받는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인권논문상 일반부 우수상을 받을 동성애자인권연대, 인권 에세이상 고등부 대상을 받을 김은총 학생 등이 인권상 수상을 ‘거부’한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이나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단체나 조직이지만, 영복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은총 학생은 유일한 개인이다. 2010 인권 에세이 공모전 고등부 대상 수상자인 이 여학생의 당찬 수상 거부가 잔잔하게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고 있다.

 

현병철, 시상 자격 없다는 ‘발칙한 여고생’

 

‘상’이란 크든 작든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는 영예고 환희다. 그러나 이런 상 받기를 거절하는 것은 아무도 쉽게 흉내낼 수 없다.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958)와 장 폴 샤르트르(1964)는 각각 노벨문학상의 수상을 거부했다. 생존 작가에게만 수여되는 이 상의 거부는 용기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선 2000년과 2001년에 걸쳐 작가 황석영과 공선옥이 각각 ‘동인문학상’ 후보작이 되는 걸 거부했다. 2003년에는 소설가 고종석이 같은 방식으로 수상 후보작을 거부했다. 동인문학상은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문학상이다. 작가 최인훈은 <동아일보>에서 주관하는 ‘인촌상’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하다못해 교내 백일장 장려상이라도 감지덕지 받는 게 아이들의 정서다. 그런데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공모한 작품 가운데 ‘먹은’ ‘대상’을 거부했다는 이 맹랑한 여학생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기 더 무엇을 살필 일이 있겠는가. 어른도 쉽게 하기 힘든 일을 해치운 이 열아홉 살 소녀에게 나는 거듭 마음의 찬사를 보냈다.

 

지난 2000년에는 <조선일보>가 주최한 ‘논술대상’을 받은 고교생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거부하여 화제에 올랐다. <조선일보> 주최 제1회 전국 고교생 논리·논술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대전 유성고 3학년 한윤형 군이 그 주인공이었다. [관련 기사]

 

한 군은 학교 교사의 권유에 논술대회 자체는 신문의 ‘색깔’과 무관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일보>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대해 “인터넷상에 ‘안티 조선일보’ 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평소 지식인의 <조선일보> 기고를 반대해왔기 때문에 인터뷰를 할 수 없다”라고 밝힌 것이다.

 

<조선> 인터뷰 거부한 ‘논술대상’ 수상자도 고교생

 

<조선 논술대상> 수상자를 방문한 <조선> 기자가 ´편향된 독서´를 걱정하면서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튼튼한지 잘 생각해 보라´며 충고했지만, 그는 끝내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한 군은 “자신이 비록 고등학생이지만 평소 ‘지식인의 인터뷰 거부를 요구´했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조선일보> 지면 한쪽을 얻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어른’들이 적잖은 시대에 이 고교생은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던 것 같다.

 

김은총 양은 성명(‘현병철의 국가인권위는 상을 줄 자격이 없다’)에서 ‘발칙하고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현병철 위원장은 고등학생인 나도 느낄 만한 인권 감수성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어서 김 양은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에 한 번도 귀 기울이지 않으며, ‘이런 사람이 과연 나에게, 그리고 다른 나머지 수상자들에게 상을 줄 자격이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현병철의 국가인권위는 상을 줄 자격이 없다”

상을 받는다는 건 참 기쁜 일이다. 내가 열심히 쓴 글이 좋게 평가받아서 대상까지 받게 되었다면, 그건 참 과분할 정도의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상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아있는 현병철 위원장이 주는 상은 별로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몇 달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청소년 인권’을 주제로 인권 에세이 공모전을 하는 것을 보고 <‘언론’은 있지만, ‘여론’은 없는 학교>라는 제목으로 공모했다. ‘여론’이 없는 학교의 현실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신문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국가인권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접하고 마음이 심란해졌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위원들이 사퇴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전문위원들도 사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위원들과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은, 국가인권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그러던 와중에 얼마 전 이 인권 에세이 공모전에서 내가 쓴 글이 대상을 받는다는 소식을 받았고,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국 이 상을 거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나는 고등학생이긴 하지만, 인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왔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수능 공부보다도 인권 공부에 더 열을 올렸고, 인권 활동에도 참여해왔다. 어쩌면 현병철 인권위원장보다도 더. 발칙하고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현병철 위원장은 고등학생인 나도 느낄 만한 인권 감수성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여러 위원들이 현병철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데도, 그 목소리에 한 번도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인권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인권에 대한 제대로 된 개념이 박힌 사람이라면 할 수 없을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것을 보면서, 꽉 막힌 학교, 꽉 막힌 이 사회와 별반 다른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과연 나에게, 그리고 다른 나머지 수상자들에게 상을 줄 자격이나 있을까.

인권 에세이로 선정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많은 내용들이 ‘언론, 표현의 자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위가 직접 선정한 작품들에서 이야기하는 인권의 ‘반도 못 따라가고 있는’ 인권위의 모습을 제대로 돌아보아야 한다. 인권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현병철 위원장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온 것에 대해 책임지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내가 에세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인권’을 지금 현병철이라는 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끝도 없이 밑바닥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인권을 보장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애를 써야 할 국가인권위가 오히려 인권을 모욕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말로 지금 상황에 심각성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성찰할 의지가 생긴다면, 감히 인권 에세이 수상자인 청소년들에게 “참 잘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상 줄게요”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현재의 국가인권위원회를 제대로 된 국가인권위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현병철 위원장이 위원장으로 앉아있는 인권위에서 주는 상은 받고 싶지 않다. 현병철 위원장은 나에게 상을 줄 자격조차 없다. 나는 2010 인권 에세이 대상 수상을 거부한다. 12월 10일 수상식 당일에 이런 뜻을 밝힐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친구와 같이 태국 여행을 가기로 한 날짜와 겹쳐서 수상식에 참가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수상을 거부한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내 목소리가 보태어져, 내가 한국으로 돌아올 12월 13일 즈음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더 이상 현병철이라는 분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 김은총 (영복여자고등학교 3학년)

 

이 ‘발칙한’ 여고생은 이어서 ‘수상식 당일에 이런 뜻을 밝힐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친구와 같이 태국 여행을 가기로 한 날짜와 겹쳐서’ 수상 거부를 미리 밝힌다 덧붙였다. 그리고 자신이 귀국하게 될 ‘12월 13일 즈음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더는 현병철이라는 분이 아니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쇄기를 박았다.

 

나는 김은총 양이 쓴 대상 수상작이 어떤 글인지가 무척 궁금했다. 역시 인터넷 시대는 편리하기 그지없다. 인터넷에서 나는 김 양이 쓴 에세이 “‘언론’은 있지만 ‘여론’이 없는 학교”를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은 ‘학내 언론(방송·신문)의 현주소’를 다루고 있는 만만찮은 작품이다.

 

김 양은 “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건전한 음악’”만 있고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는 거부되는 학내 방송을 비판하면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담긴 진정성을 가진 매체’라 할 수 없는 ‘학교 신문’을 뜯어본다. 그는 학교 신문의 편집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검열’과 ‘재검열’을 지적한다.

 

수상 거부 여학생이 진단한 ‘학내 언론’의 현주소

 

▲ 한 교지 컨테스트에 나온 교지들

“공부나 열심히 해야 할 학생이 어른들이나 하는 정치적인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너무 미성숙해서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게 학교 당국의 일상적인 가치관”이다. 그래서 결국 “‘학생의 이야기’, ‘학생의 여론’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현실을 김 양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김 양은 ‘학생 인권의 현실’도 어두운 상태에서 ‘학생 언론의 자유’를 말하는 게 힘들지만 중요한 인권의 범주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권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학내 언론매체의 편집권은 학생 혹은 학생회가 보유하는 형식으로 하여 교사 혹은 당국의 간섭을 배제하도록 하고, 학교 예산에서 일정 이상을 교내 언론매체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과정 자체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양의 글은 논지의 전개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세부적 내용은 실질적 고민 없이는 다룰 수 없는 구체성과 진정성을 담고 있다. 입시 공부에 바빠서 자신의 권리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해서도 거의 ‘생각하기’를 그친 듯한 여느 고교생과는 다른, 아주 분명하고 다부진 모습이다.

 

김 양의 글을 읽고 나서 교지나 학교 신문을 만들던 무렵의 기억을 나는 좀 부끄럽게 떠올렸다. 아이들의 요구와 무관하게 스스로 적절한 선에서 자기 검열로 주제를 걸러내던 지도교사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스스로 늘 아이들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역시 무심한 ‘검열자’에 지나지 않았었다.

 

글쎄, 아마 김 양은 지금 친구와 함께 태국을 여행하고 있을 터이다. 이 당찬 여학생은 자신이 귀국할 13일께엔 현병철 위원장이 스스로 물러나,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국가인권위’를 되살리기 위한 전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글쎄다. 김 양의 바람은 희망 사항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여전히 국가인권위원회는 ‘무뇌아’의 길을 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퇴한 두 상임위원 자리에 보임한 인물의 면면은 임명권자 역시 ‘무뇌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게 만든다. 인권을 위해서 큰 상마저 포기한 한 여학생의 소망이 짓밟히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어른들의 책임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언론’은 있지만 ‘여론’이 없는 학교
   -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에세이 고등부 대상 수상작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입장에서 교내의 언론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우선 떠오르는 것은 방송이 아니라 바로 학교 신문이다. 방송부가 맡게 되는 학교 방송은, 공부하는 것이 힘들지만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을 위해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것 같은 ‘건전한 사연’과, ‘2AM’이나 ‘에프터스쿨’, 팝송 같은 요즘 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건전한 음악’을 제외하고는 더해질 수 없고, 이 내용이 그대로 각 학급 스피커를 타게 된다. 이런 구도에서 지금의 입시제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나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긴, ‘장기하와 얼굴들’ 의 노래를 틀려고 한다면 순전히 ‘이상하다’면서 틀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학교 방송이다. TV와 라디오에는 나올 대로 나온 노래인데도. 학교 내에서 언론 탄압이 이런 식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에 대해 사회에서 인식하는 범위는 적다.

이렇게 하나의 언론으로 작동하기는커녕 점심시간에 최신 가요나 팝송만 틀어주는 방송부의 유명무실한 존재 탓이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없는 학교들이 꽤나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나마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문의 구성조차도 학생들의 목소리가 담긴 진정성을 가진 매체라고 보기에는 다소 힘든 감이 있다.

교내 신문의 구성은 보통 교장과 교감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첫 면으로 시작하여 ‘자랑스러운 동문들의 대표’인 동문회장의 축사로 이어진다. 간혹 지나치게 진부한 경우에는 학교 상징과 교훈, 목표 등의 칸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여기까진 그나마 신문을 편집하는 편집동아리의 역량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굉장히 ‘학교 소식다운’ 학교 소식이 실린다. 가령, 원어민 교사를 채용해 글로벌적인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거나,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화장실을 새로 개축했다거나, 마로니에 백일장 같은 대회에서 영예로운(신문 표현에 의하면) 상을 수상하거나 장학금을 받아 온 그 소감 같은 것이다.

그다음에 ‘기획 기사’로 나오는, 공부가 지칠 때 좋은 운동법이라던가, 각 과목의 효과적인 공부법이라거나 하는 것은 굳이 입시 철이 아니라도 계속 나오는 부분이다. 그다음으로는 논술대회라던가 독후감, 만화, 그림 같은 우수작을 소개해주는 지면이 있고, 좋은 이야기라거나 읽으면 좋은 책을 소개해주는 칼럼이 있으며, 마지막엔 최대 하이라이트인, 학생들의 우정어린 관계라던가, 고백이라던가, 선생님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라거나, 각 학급 소개와 그 캐리커쳐 - 주로 그 반 담임선생님을 희화한 -를 공개해주는 지면이 나오게 된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하고 있는 교지편집부 활동의 개요를 말해보자면, 형식적으로 신문 혹은 교지 발행은 각각 교지편집부가 담당한다. 하지만, 그 뒤에는 신문 내용에 대한 모든 편집권을 가진 담당 교사 혹은 학생부장이 자리 잡고 있다. 매번 신문을 작성하기 시작할 때에는 동아리 구성원들이나 학생회 임원들이 모여 앞으로의 컨셉이나 담을 내용들을 정한다.

그러나 학생들이 자신이 넣고 싶어 하는 것을 제기하고 나면 이 내용을 넣고 안 넣고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교사의 뜻이다. 모든 역할 배분도 교사의 뜻대로 나눠지며, 기사 내용이나 사진이 모두 마무리되면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여기서 거대한 ‘검열’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교장실로 올라간 신문은 다시 최고 책임자에 의해 확실한 ‘재검열’이 진행되어 최종 승인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다른 학교라고 해서 이러한 방식과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런 식이니 학교 신문이 인쇄되어 반마다 배포되면,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신문 내용이 아니라, ‘여기 사진에 니 얼굴 있다!’, ‘ㅋㅋ 등교 사진에 너 엎드려뻗쳐 하고 있는 거 봐라 ㅋㅋ’와 같은 반응이다.(참고로, 보통 등교 사진이 나오면 그 밑에 ‘힘들지만 오늘도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들!’과 같은 말이 실리곤 하는데, 여기에 동의해 줄 학생들이 누가 있을까?)

그다음 학교 신문이 사용되는 것은 각기 자유자재다. 급식 나눠줄 때 흘린 국물 닦아내거나, 종이비행기 접어서 창문 밖으로 던진다거나, 대청소할 때 창문 청소용으로 사용되거나. 이러는 사이에 신문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이 있고, 학생부장 교사가 돌아다니다가 발각되면 벌주고 혼내는 것은, 아무래도 코미디에 가깝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내가 겪어 본 이상 학교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조선일보나 한겨레를 보고 나서 자장면 먹는 데 밑에 깐다거나 해도, 그것에 대해 무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학교 신문은 학생들의 아우성이 모두 생략되어 있으면서, 신문의 ‘사용처’에 대해서도 문책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전국 중/고등학교 학내 신문의 기본 목표가 ‘학내의 소식을 알려 학교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니만큼, 모든 학교의 신문 편집 방향이 그런 의도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획일화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본래 신문의 근본적인 의도대로’ 학생들의 주장들, 예를 들어 두발 자유에 대한 기고문이나, 교사의 수업 방식이나 학교 급식 운영에 대한 비판을 하는 글이나, 학생이 제외된 학교 운영에 대한 사설이라거나, 흔히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이사장이나 학교 재단의 비리에 관련된 폭로 같은 기사가 1면에 등장한다거나 하면, 학교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들이니까. 아니면, 대의제 민주주의에 관한 성찰이라거나, ‘천안함 사태에서 보이는 국가주의’ 같은 글들은 어떨까? 아예 기재를 금지할 것이다. 공부나 열심히 해야 할 학생이 어른들이나 하는 정치적인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너무 미성숙해서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게 학교 당국의 일상적인 가치관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결국 신문의 안에는 ‘학생의 이야기’, ‘학생의 여론’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언론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건이나 사안에 대한 사실을 자유롭게 알리면서 문제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국가와 같은 공권력이 언론의 편집권을 제한하고나 압수해 원하는 대로 내용을 삽입하거나 삭제하는 것을 관제언론, 혹은 언론 탄압이라고 한다. 중/고등학교 신문이나 방송이 앞에서 나오는 식의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마찬가지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학교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기사와 방송이 마련될 수 있어야 하고, 학생 개개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견을 학교나 교사와 충돌되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하며, 학교 행정이나 집행에 관해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 언론은 학생의 여론을 구성할 수 있어야 되며, 교내 학생들의 소통의 창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 언론이 그런가? 학교 신문 발행의 명의를 자처하는 학교는 어떠한 형태의 여론도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학교의 신문은 학생 여론과 소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문자 그대로 ‘학교의’ 신문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수사를 붙이지 않아도 당장 헌법과 하위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이고 이것 자체가 가장 뚜렷하게 다루어지는 인권의 주제 중 하나인데, 가장 큰 화두이자 기본적인 두발 자유나 체벌 금지와 같은 문제를 언급하는 것도 그토록 억압받고 있는 실정에서 ‘학내 언론의 자유’가 준수될 리는, 슬프지만 지금은 없을 것이다. 하긴 인권의 의미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향유해야 할 권리’ 에서 학생은 마치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인권의 범주이니 ‘보장을 해 줄 인식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이 아닐까도 하다.

기본적인 학생 인권의 현실이 아직도 어두운 상태에서 학생 언론의 자유를 외치기에는 상당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나 자신이 무언가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서, 일종의 언론 활동에 포함되는, 학내 자치언론 구성을 요청하는 전단지를 각 반에 돌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교무실에서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학교장의 허가 없는 유인물의 배포는 금지되고 있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여차여차해서 징계를 받지는 않았지만, 한국 학교의 현실이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제도권적인 조치가 일단 필요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중요한 인권의 범주인 ‘표현의 자유’를 학생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충분한 이행이 선행되면서, 학내 언론매체의 편집권은 학생 혹은 학생회가 보유하는 형식으로 하여 교사 혹은 당국의 간섭을 배제하도록 하고, 학교 예산에서 일정 이상을 교내 언론매체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과정 자체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상위기관이 법령을 제정하고 규칙을 마련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비록 지금의 사회에서는 ‘문제로 치부되지도’ 않지만, 학내 언론의 자유를 본격적인 사안으로 이끌어내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학생 스스로의 움직임과 외침이 함께 이어져야 한다고 본다. 나로서는 아직 무슨 방법으로 할지도, 무슨 방식으로 될지도 잘 모르겠고, 그것이 힘든 과정이지만 말이다.

 

 

 

2010. 12.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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