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학교에서 온 제자의 편지
전임 학교에서 담임했던 여학생이 하나 있다. 신분이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편의상 ‘K’(나는 로마자 두문자를 쓰지 않지만 여기선 예외다.)이라 해 두자. 인근 군 지역의 중학교를 나와서 중상위 정도의 성적으로 입학했는데 입학 후에 꽤 열심히 공부했나 보았다. 내가 담임을 맡았던 2학년 때는 치고 올라와 문과에서 수위를 다투게 되었다.
작가와 교사가 꿈이었던 아이
아주 야무지고 빈틈없는 아이여서 교사들끼리 하는 말로 ‘입 댈 게 없는’ 학생이었다. K는 수업 시간에 교사의 강의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는 등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아이가 작가와 교사의 꿈을 갖고 있고 습작을 해왔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진급하고 몇 달이 지나서였다.
K는 당연히 남다른 표현 능력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언어 감각이 날카로웠다. 내가 수업 중에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못해 끙끙대면 은근히 걸맞은 어휘를 제시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K는 깔끔하게 자기 관리를 해가며 고교 공부를 마치고 고려대학교 문과대로 진학했다.
애당초 사범대를 염두에 두다가 이왕이면 더 폭넓게 공부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문과대를 권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대학이야 어디를 가든 제 앞가림을 하고도 남을 아이라 싶어서 비슷한 조언을 할 수 있었던 듯하다.
졸업 후 아이와의 만남은 대학에 들어간 첫해, 방학 때 모교에 들른 아이를 잠깐 보고 헤어진 게 다다. 가끔 블로그에 와서 흔적을 남기고 거기 답글을 달거나 세밑에 전화로 안부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아이가 쓰는 글 행간을 읽으며 나는 아이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새 K는 4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어저께 K가 내게 글을 보내왔다. 그간 느꼈던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는 아이의 짧지 않은 글을 읽는데, 아이의 번민과 좌절감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다가왔다. K는 ‘세상을 사유하고 문학을 공부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라는 인사로 글을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메인화면에 고려대학교 대자보가 뜨더군요. 클릭해보았습니다. 3자의 시선에서 이 글에 공감했던 많은 이들이 진심 어린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선연해졌습니다. 그리고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실제 정대 후문에서 저 대자보를 접했지만 저렇게 진심 어리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했는데 짐작대로였다. 고려대 경영과 학생 주현우 씨가 쓴 대자보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때 담임 노릇을 한 인연으로 아이들이 상급학교에 갈 때마다 진학을 축하하고 격려하지만, 그들의 대학 생활까지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는 건 쉽지 않다.
“열심히 공부해라.
교과서만 파지는 말고…….
이것저것 책도 많이 읽고
우리 사회의 현실에 관한 관심을 놓지 말아라.”
그렇게 일러주는 게 고작이다. 어떻게 대학 생활을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들의 선택일 뿐이고, 성장의 길목을 지켜봤던 교사의 역할은 그것으로도 넘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제 나름대로 똑똑하고 의식도 갖추었다고 생각하던 아이들이 총선 때 동향의 여당 후보 선거운동에 참여해서 일당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씁쓸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K는 졸업반이어서 나름대로 취업 준비 따위로 바빴던 모양이다. K는 팀 프로젝트, 조별 과제로 주어진 기사의 마감에 시달리면서 그 대자보를 보았던 모양이다. 첫 반응은 ‘약간의 반성과 부끄러움’을 포함했지만 우호적이었다.
“수많은 대자보가 더해졌습니다. 그 긴 행렬을 보면서. 경영학과 학생이 시작해주어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과, 문대 학생이 안녕하다고 하지만 부끄럽기에 함께한다는 대자보를 붙여줘서 다행이다. 그런 멋없는 생각도 했습니다. 안도감이 앞섰습니다. 나는 이렇게 찌질하지만 그래도 내 주변엔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있구나. 페북을 보면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내가 속한 집단이 멋져서 다행이라고, 약간의 반성과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이 정도로 농도 짙진 않았습니다.”
K는 대학생활을 되돌아보았다. 아이는 “학교는 취업의 등용문이 아니고,…… 실제의 삶을 사유하고 그런 내 사유를 문장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서 있을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하고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잊었습니다. 그 잘난 문대생인 나는 학과는 그저 집단 안을 세분화하는 어떤 기준이 될 수 있는 학과에 매몰되어 글이 가진 진심, 진정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친구들과 혹은 선배들과 많은 신문을 읽으면서도 진정으로 많이 아파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 학교생활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 세상과의 소통의 창, 활자들을 저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 부끄러움과 번민의 끝
K는 ‘함께 모여 서울역으로 간다는 문장이 눈에 밟혔지만, 모른 척하고 교육봉사’에 갔다. 거기서 아이에게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여주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드느냐고 묻자 아이는 ‘유대인이 아니라,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고 답했다고 한다. K는 거기서도 숨이 턱턱 차올랐다고 했다.
“사실 이 글은 응어리진 나의 감정, 나의 찌질함, 나의 멘붕을 치료하기 위해 쓰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런 글을 쓰더라도, 내일이면 다시 시험공부를 걱정하고, 레포트를 걱정하고, 팀 과제를 걱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받는다며 아이돌도 보고, 예능도 보고, 그리고 웃고 즐거워하겠지요.
그러나 즐거움 미시적인 것이 전부인 양 살고 그것에 치이고 매몰되는 것은 그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이 다짐을 하려고 글을 적습니다.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진심을 다해 타인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돈이며 직함보다 더 중요한 그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제게 반성의 기회를 준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녀왔습니다. 사실 전 이 모든 의제들에 대해 세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주관이 있어야지 꼭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날것 그대로 이야기하면 전 국정원도, 밀양도, 철도 노동자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저를 위해서 그 자리에 나갔습니다. 부끄러운 것이 너무 커서. 그래서 이 참여로 제가 개념 찬 대학생이 된 것도 아니고 (그런 환상을 가질 것이 사실 제일 두려웠고요) 그저 부채 의식이 아주 조금은 가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런 부끄러움을 가지고 몇 번 더 참여해도 좋겠다는 확신 같은 걸 얻었습니다. ‘선동이다, 중립이다’란 말에 제가 잃은 게 무엇인지 고민하려고 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느니 무슨 말이든 듣고 고민하고 깨져 보고자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 생활, 아니 사회에 나가서도 선생님처럼 고민하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아, 아이는 이제야 뒤늦은 성장통을 앓는구나. 오늘날 대학은 취업을 위한 관문 노릇을 하느라, 스펙을 쌓고 학점을 관리하는 곳으로 전락해 버려서 아이들에게 현실을, 조국을, 역사를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는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반성하게 해 준 사람들께 ‘감사’하다는 아이
아이가 느꼈던 번민이 내게는 또 다른 저릿한 아픔으로 다가오는 걸 나는 알았다. 그것은 어느 날 내가 이른바 ‘침묵의 교단’을 얼마나 견딜 것인가를 고민하던 초임 교사 시절의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스스로 고백하기까지 아이가 겪었던 번민의 크기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는 얘기다.
나는 간단하게 답을 보냈다. 아이가 자신의 ‘참여로 개념 찬 대학생이 된 것이 아니’라고, 그런 환상을 가질까 봐 두려워했듯 나 역시 아이의 고백 앞에 과민하게 반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이는 이제 성장통을 앓으며 자신이 선 시대와 현실, 그 삶과 세상을 처음으로 그윽이 바라보게 된 것일 뿐이지 않은가.
“네 고민의 깊이가 내게 아주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고민하지 않는 삶은 행복할지는 몰라도 그 자신의 삶의 단 1g의 영혼도 살찌우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성숙한 시민, 인간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도 충고나 조언으로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는 없다. 언제나 스스로의 깨달음과 성찰을 통해서 사람은 변화하고 그 변화를 통해서 삶과 세상, 역사도 변해가는 것이다.
축하한다. 자신의 변화를 담담하게 바라보려는 태도는 너답구나. 단 한 차례 행진에 참여하고 저항과 분노에 동참한다고 해서 혁명가가 되는 것 아니니, 오직 의연하게 자신의 참여의 폭과 깊이를 생각하면 되겠다.”
‘축하한다’라고 했지만, 기실 나는 다소 착잡한 감정을 가누기 어려웠다. 왜 이들에게 우리는 다시 전 시대의 고민과 좌절을 안겨주어야만 했을까 하고 나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왜 이들이 숱한 사람들의 땀과 피, 그 희생 위에 만개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과실을 맘껏 향유하지 못하고 다시 스스로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선언하고 길거리에 나서게 했는지를 말이다.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많이 추워요. 선생님. 몸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저 방학하면 놀러 가도 되죠? 선생님이 많이 보고 싶어요.”
아이의 마지막 인사가 내 마음에 닿아왔다. 나도 아이에게 짧은 인사를 보냈다.
“언제 오너라.
밥도 사고 술도 사고…….
삶과 세상에 대한 한갓진 이야기를 밤새 나누도록 하자.”
글쎄, 몸을 움직이는 것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터. 그러나 K를 기다리면서 이 세밑을 보낼 수 있다면 이 연말은 조금 더 넉넉해질 수도 있겠다.
2013. 12.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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