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경쟁교육 없는 학교 만들기 캠페인’
모두 이미 알 만큼은 아는 얘기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사는 물론, 학부모도 일찌감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언론이 필요 이상의 호들갑을 떠는 걸 바라보는 기분은 좀 씁쓸하고 겸연쩍다. 그것은 마치 이미 널리 알려진 자신의 치부를 새삼 스스로 확인해야 하는 민망함 같은 것이기도 하다.
‘성적으로 줄 세우기’? 모두 아는 이야기다
교육단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남부지역 일부 학교에서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관행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는 ‘경쟁교육 없는 학교 만들기 캠페인’ 출범 후 전주·광주·마산/창원·울산·부산·대구·안동 등 남부 7개 지역에서 설명회를 개최하면서 받은, 학부모들의 ‘제보’를 통해서 확인된 것이다.
이 지역의 거의 모든 곳에서 ▶ 성적 우수자를 위한 기숙사 운영 ▶ 자율학습 강제 참석 △고등학생 토·일요일 등교 ▶ 성적 우수자 특별반 운영 ▶ 인권위에서 금지한 합격 현수막 게재 ▶ 성적순 도서관 자리 지정 표시제 등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보도자료 ☞ 바로가기]
고등학교의 줄 세우기야 구문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대구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선 급식 순서도 성적순에 따른다고 하니 할 말을 잃게 한다. 성적순으로 아이들 줄 세우기가 고등학교에서 중학교를 거쳐 초등학교에까지 내려간 셈이라 할까. 그걸 시행한 학교와 교사는 그런 결정이 얼마나 비교육적인 처사인가 하는 자의식조차 없었던 것일까.
담을 넘는 아이들을 교사에게 제보하면 상점을 주는 학교는 뭐고, 도서관에 전교 석차 순서로 학생들의 자리를 따로 지정해 놓은 학교는 또 무언가. 기숙사는 전교 30등까지만 이용할 수 있고, 이들에겐 학원강사의 특강을 제공할 뿐 아니라 기숙사에만 에어컨을 돌리는 학교, 전교 50등까지만 들어갈 수 있는 ‘유리 부스’ 자습실을 운영하는 학교는 또 무언가.
이들 ‘줄 세우기 교육’ 백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땅의 ‘입시경쟁 교육’의 결과라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걸 고스란히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 뒤에 숨기에는 문제의 심각성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 ‘예사롭지 않다’라는 진술조차도 일종의 수사(修辭)일지 모르겠다. 그것 역시 이 뒤틀린 경쟁교육을 받아들이는 걸 전제로 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현실론’은 천하무적, 고착화 단계
문제는 단순한 순환구조다. “입시경쟁 교육은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다. → 현실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면이 있다. →그건 일부 학교의 특수한 문제이니 일반화해선 곤란하다.”에서 다시 “그래도 그건 심각한 문제다.”로 다시 무한 반복되는. 그리고 답은 빤히 보이는데도 풀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이 이어지는.
정작 아이들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는 이미 이 문제에 관한 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현실론’ 뒤에 숨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는 핑계는 가히 천하무적이다. 그리하여 그런 현실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은 거의 고착화 단계로 진입하지 않았나 싶다.
2000년 이전만 해도 학교는 지금과는 달랐다.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입시교육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천연덕스럽게 펴지도 않았다. 속은 어떻든 겉으로는 ‘전인교육’, ‘인성교육’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고, 그게 강퍅한 시대, 교육의 몫이라는 걸 결코 부정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2000년을 넘기면서 학교는 1980년대 전교조가 주창한 ‘참교육’,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와 같은 구호로부터 놓여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규율로 만연하기 시작한 승자독식의 논리가 학교에까지 미쳤던 것일까.
일류 대학 진학이 지상과제로 대두되면서 80년대 이래 간신히 버텨오던 ‘공교육’은 시나브로 무장해제 되기 시작했다. 보충수업이나 야간자습 강제가 별 고민 없이 이루어지고, 그런 현실로 고무된 관리자들은 재빨리 이 경쟁교육을 가속화하는 체제를 만들어갔다.
정부의 ‘교육 시장화’ 정책의 끝
학교 관리자들이 노골적으로 명문대 진학자 수에 집착하는 등 이른바 ‘공부 선수’ 키우기에 사활을 걸게 된 게 이 무렵이 아닌가 싶다. 성적이 평균 이하인 아이들은 점점 학교 교육에서 소외되고 소수의 학력 우수자에 대한 편중 지원을 당연시하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 현상이 보편화되는 과정이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더는 아이들을 주체로 세우는 교육에 대한 고민을 따로 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아이들을 학교에 오래 붙들고 있으면서 가능한 한 더 많은 시간을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으로 강제하는 방식의 학습이 무한반복으로 강요되었을 뿐이다.
학교에서는 ‘토론’과 교사들의 ‘비분강개’도 깨끗이 사라졌다. 아무도 그게 최선이라는 걸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아이들의 머릿속에다 우격다짐으로 지식을 밀어 넣는 전근대적인 방식의 교육이 일상화되었다.
그나마 체면 때문에 망설이던 지역의 공립학교가 입시 결과를 현수막으로 내걸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체제가 공식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방증이었을지도 모른다. 고교는 입학 전에 새내기를 불러 보충수업을 실시하고 정부에서 금지한 사설 모의고사를 ‘○○학원’의 이름으로 버젓이 치르기도 하는 파행이 이어졌다.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경쟁교육은 해마다 상승되면서 더 높은 강도로 일상화되었고, 이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 시장화 정책’에 힘입어 가속화되었다. 오늘의 학교가 당면한 현실은 “학교의 시장화(학원화), 교육의 계층화, 국가 차원의 학력 경쟁시스템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경쟁 교육 정책”(이영탁 참교육연구소장)의 결과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참담한 현실이라기보다 차라리 이 같은 현실에 대한 교육 주체들의 무감각과 무반응에 있는 듯하다. 일부 언론이 호들갑을 떨 뿐이지,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교사들도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정리한 ‘경쟁교육 운영 사례’를 체크 리스트 삼아 우리 학교 상황을 확인해 보았다. 모두 여섯 개의 항목 가운데 단지 두어 항목(‘성적 우수자를 위한 기숙사 운영’과 ‘성적 우수자 특별반 운영’ 등)만이 해당하지 않았다. 시골이어서 기숙사는 타 시군 아이들 중심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고, ‘성적 우수자 특별반’은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입시에서 ‘과학 중점반’ 2개 학급을 이미 선발해 놓았기 때문이다. 성적 우수자를 위한 독서실이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지정 표시제는 아니니 그나마 다행인가.
‘차별과 배제’에 익숙해진 아이들
2학년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한두 아이가 ‘문제가 있다’라며 짧게 반응했을 뿐 아이들 대부분은 덤덤하기만 했다. 아이들은 이미 이 차별적 현실을 저항 없이 받아들일 만큼 경쟁과 배제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선발고사를 거쳐 입학한 우리 아이들의 학력은 지역에서는 상위다. 이들은 성적 우수자에게 베풀어지는 특혜가 조금만 애쓰면 자신들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배제 상황은 때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성적으로 칭찬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에게 성적이 나쁜 것은 자신의 잘못일 뿐이다. 그래서 이들은 성적을 잣대로 한 차별과 배제를 저항 없이 수용하는 것이다.
차별과 배제보다 더 서글픈 것은 그게 합리적 규칙이라고 믿는 아이들의 태도고, 그걸로 자신에 주어진 특혜 또는 차별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학교를 공동체가 아니라 극심한 경쟁이 벌어지는 살벌한 정글로 만든 것은 우리 사회가 무심히 추인해 온 국가 학력 경쟁시스템이라는 걸 아이들은 물론 알지 못할 것이다.
해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의 수가 백여 명을 웃도는 현실은 이 출구 없는 경쟁교육의 산물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죽음을 전해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이래선 안 된다, 안 된다고 되뇔 뿐 세상은 어떤 해결점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경쟁에 지친 아이들이 삶을 마감하는 비극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이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펴고 있는 ‘경쟁교육 없는 학교 만들기 캠페인’은 어떤 열매를 맺을까. 그들의 의도와 문제 제기가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를 낙관할 수만은 없는 것은 그게 단순히 학교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교육’을 낳은 것은 개인이면서 사회고 사적 욕망이면서 제도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다시 순환 논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고 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문제는 역시 ‘그것’ 아닌가. 책을 덮고 나는 얌전히 교실을 나왔다. 적잖은 아이들은 문이 채 닫기기도 전에 책상 위에 일제히 엎어지고 있었다.
2014. 11.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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