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보수단체의 ‘전교조 고발’
“야, 드디어 우린 반국가 사범이 됐데? 정년은커녕 더는 학교에 붙어 있지 못하는 거 아냐?”
며칠 전 대구에 사는 벗은 전화통에다 대고 대뜸 그렇게 말했다. 잠깐 헷갈렸다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는 전화선을 통해 좀 씁쓸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이름도 어렵고 복잡해서 금방 외워지지도 않는 어떤 단체로부터 ‘우린’ 고발을 당한 것이다.
어떤 보수단체의 전교조 고발, “이적단체 구성과 가입…”
혐의는 국가보안법 제7조 제3항인 이적단체 구성과 가입, 제7조 제4항인 이적단체 구성원의 허위사실 날조 유포 등. 어쩐지 으스스하다. 고발자는 ‘반국가교육 척결 국민연합’. 새 정부 들어서면서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으려는 보수진영의 액션은 자못 화려한데 ‘척결(剔抉)’이라는 이름도 그 액션에 어울리는 쇳내를 풍기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나쁜 부분이나 요소들을 깨끗이 없애 버림’으로 척결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마땅히 반국가교육은 척결됨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의 손가락이 왜 전교조를 향하고 있는가. ‘척결’만큼 그들의 이론도 단순 명쾌하다. 이들은 전교조의 참교육과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민족·민주·민중 교육’, 즉 ‘삼민 교육’과 같은 좌경 이적 이념이라는 것이다.
웬 삼민 교육인고 했더니 1985년 전학련 삼민투위 사건에서의 그 ‘삼민’이란다. 이들은 삼민투위의 삼민 이념은 북의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전략에 동조하는 이적 이념임이 법원의 확정판결에 의하여 판명’(반국가교육 척결 국민연합의 고발장)된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민중 교육’ 대신 ‘인간화 교육’을 선택한 것은 국민의 눈을 속이기 위한 전교조의 ‘용어 혼란 전술’이란다. (물론 전교조는 이에 대한 법률적 대응에 들어갔다.)
갑자기 머리가 띵해진다. 제대로 아이들을 가르치자고, 아이들 앞에서 떳떳한 교사가 되고자 시작한 게 참교육 운동이다. 대학 때 운동은커녕 책만 팠던 샌님들이 교단에서의 부끄러움을 통해 새롭게 참 교사로 서고자 나선 게 전교조 운동이다. 웬 ‘이념’이, ‘혁명’과 ‘전술’이 이리 난무하는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전교조가 좌경 이적단체이니 국가보안법의 이적단체 구성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고발한 사람은 정진화 전교조 위원장을 비롯해 수석 부위원장 등 모두 8명이다.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이들의 고발장 전문 어디에도 물론 우리의 이름 따위는 없다.
1989년, 조직 창립 때 뜻을 같이하여 참여하고 그 죄(?)로 4년 반 동안의 학교에서 배제되어 있었던 이력과 합법화 전후하여 몇 년간 지역 하부 조직을 맡았던 게 그나 내 경력의 전부이다. 당연히 우리가 저들의 사정권(?)에 들 리 없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는 조직 사정을 풍문으로 듣고 염려하는 게 고작인 평조합원이니 더 말할 게 없다.
대체로 이 고발 사건을 바라보는 교사들의 눈길은 모두 ‘뭥미?’에 가깝다. 우리가 ‘만화 같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수준의 반응 말이다. 그게 만개(?)한 이 땅의 민주주의의 징표인지, 아니면 보수로 퇴행하는 복고주의인지는 가늠키 어렵다. 누구는 그런 우편향을 통한 ‘좌우 균형’을 이야기하지만, 그 의견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비판’과 ‘부당한 공격과 음해’는 다르다
새삼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한갓진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만화 같은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우리가 지나온 스무 해의 시간이 마냥 허구처럼 느껴졌다. 마치 우리가 쏟았던 한 시절의 열정과 순수가 새삼 역사란 이름으로 부정되고 폄훼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떠한 상황에도 전교조를, 그리고 참교육을 역성들 생각은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창립 1세대 조합원이기 때문이고. 또 모든 조직이 그렇듯 전교조도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저질렀을 테니 대중의 비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비판받을 만한 잘못이 넘친다 해도 부당한 공격과 음해가 용납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꼭 1년이 모자란 20년 전이다. ‘민족·민주·인간화 교육’, 참교육의 깃발을 내걸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된 것은 1989년이다. 그때 친구와 나는 대구 근교의 한 사학 인문 고등학교에서 각각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해 8월, 우리는 불법 노동조합 활동 등의 이유로 해임되었다.
우리는 가끔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그때가 ‘집단 광기의 시대’였다고 농을 하곤 한다. 탈퇴각서만 쓰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회유 앞에서 마치 불을 찾아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무려 1천5백 명이 넘는 교사들이 교단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누구는 ‘부화뇌동’을 운운하면서 환칠을 하려고 하지만, 그 시절에 그들은 모두 주역이었다.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삶으로 이해한 까닭이다. 학교에서 쫓겨난 교사는 물론이거니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각서를 썼던 동료들 모두가 자기 삶의 든든한 주인들이었다.
그들은 누구였나. 스스로 양심을 버릴 수 없어 생업을 버렸던 ‘대책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어진 5년여의 시간 동안 그들의 삶을 옥죄었던 고단한 삶조차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자신의 선택과 신념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리고 10년 만의 합법화…….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학교도 변하고 세상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나는 참교육의 이름으로 만난 모든 교사가 20여 년 전의 순수와 열정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음을 안다.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실존은 고민했던 사람들, 부끄러움으로 자신을 돌아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합법화 10년, 그러나 심화하는 무한경쟁 교육
서슬 푸른 탄압의 시절, 주변을 불안스레 두리번거리며 간신히 사무실로 들어서던, 겁 많던 그 교사들은 차돌 같은 참교육의 실천가로 변신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도 어느새 불혹을 훌쩍 넘긴 중견 교사가 되었다.
이른바 절차적 민주화, 환경 개선 등은 일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입시경쟁 교육’이란 본질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경쟁은 선’이라고 여기는 정권이 들어서면서 경쟁은 가파르게 심화하고 있다. 여론을 무시하고 국제중 설립을 강행하는 등, 이미 초등교육부터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참교육 선언 20여 년, 자신의 생존권과 맞바꾸었던 교사들의 꿈과 희망은 ‘경쟁과 효율’을 지고 지선의 가치로 숭배하는 ‘교육 시장주의’에 떠밀리고 있다. 일제고사 실시, 경쟁적인 규제 철폐 등 성찰 없는 질주를 계속하는 이 ‘미친 교육’ 앞에서 정작 교사들은 부끄러움과 무력감을 가누지 못한다.
교육 환경의 변화가 학교나 교사가 설 자리를 위협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학교 현장에 음습하게 도사리고 있는 관행적 모순과 맞서 싸워온 것은 전교조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교육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평등을 위해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애썼다. 나날이 위축되는 ‘공교육’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기꺼이 거리로 나서곤 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교사’와 ‘평범한 직장인’의 ‘경계’를 지킨 사람들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사회의 변화가 더는 교사를 ‘겨레의 스승’ 따위로 이해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교사가 단순히 ‘자신의 노동을 임금과 교환하는 샐러리맨’이어서는 아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요즘처럼 주변에 샐러리맨들이 넘치는 때일수록 그들의 모습이 새로워 보이는 까닭이 여기 있다.
어쨌든 그들이 학교와 교실을 상식이 기능하는 공간으로 꾸리는 데 걸린 시간이 스무 해였다. 그런데 좌절과 무력감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흘린 그들의 땀을 ‘좌경 친북’, ‘좌파’니 하며 이념적으로 재단하는 데 나는 분노에 앞서 비애를 느낀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 미래를 믿는 ‘진보’
나는 전교조가, 그 구성원이 진보적인 조직이고, 사람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진보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 그 미래를 믿는다’라는 의미에서의 진보다. 전교조는 소수 활동가의 조직이 아니라 8만 조합원 대중을 포괄하는 단체다.
누구는 전교조가 ‘수백만의 친북좌파를 길렀다고 주장’하면서 전교조를 우리 사회 ‘좌경화의 주범’으로 몰기도 한다. 글쎄, 전교조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해 준 건 고맙긴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인과율 자체를 오해하고 있다. 한 사회와 그 구성원의 삶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그야말로 지리멸렬이다. 요즘은 보통의 초등학생들도 그런 수준의 주장은 하지 않는다.
보수정권의 출범과 함께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를 들고 좌충우돌하는 저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는 ‘신우파’들이 그리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말끝마다 21세기와 ‘글로벌’을 강조하면서 철 지난 이념 논쟁을 재연해 그들이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일제고사와 학교 등급화 반대하는 소형 홍보물을 모니터 위에다 붙여 두었더니 그걸 본 반 아이가 한 마디를 건넨다. 그리곤 쑥스러운 듯,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아이들도 알 건 다 알고 있다. 모르는 건 결국 어른뿐인 것이다.
“선생님! 저 구절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아이들의 가능성을 등수에 가둘 수 없습니다.’ 히히히…….”
2008. 10.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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