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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전근대의 교실 풍경, 그 상처의 기억들

by 낮달2018 2020.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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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조회에 참석 않는다고 학생회장에게 맞아 숨지는 사고에 부쳐

▲ 강릉, 학생들이 영정과 관을 들고 학교로 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강릉에서 고교 2학년생이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학생회장에게 맞아서 숨지는 사고가 있었단다. 모니터에 뜬 그 사고 기사의 제목을 보고 있는데도 얼른 그 내용이 짚이질 않았다. ‘조회’는 뭐고, ‘학생회장’은 뭐지? 어떻게 ‘조회’ 불참이 ‘학생회장’의 ‘구타’와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은 아직도 그런 학교가 있는가를 의아해하면서 이 참사에 머리를 흔들었다. 이야긴즉슨 사고가 일어난 학교에선 학생회장이 조회 참석을 독려할 수 있었다는 거고, 또 당연히 불참자에 대한 징벌 권한도 갖고 있었다는 거다.

 

오늘 포털에서 뉴스를 검색해 보니,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형식으로 보면 학생회장이 학생자치기구 장의 자격으로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숨진 학우의 영정과 관을 들고 병원에 집결해 학교까지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고 교장과 학생부장의 퇴진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는 이 사고가 단순한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 폭력 추방’을 요구하면서 학교 쪽의 폭력 방조, 사건 은폐 의혹도 제기했다고 한다. 이들은 또 “교내에서 교사들이 학생회장 등 학교 지도부를 시켜 구타를 유발하고 교내에 크고 작은 폭력이 잇따르는데도 그때마다 경찰을 돌려보내는 등 사태를 무마해 왔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학생들의 주장을 따르면 이는 우발적 폭력이 아니라, 학내에 만연한 폭력의 결과라는 얘기다. 특히 ‘교사들이 학생회장 등 학교 지도부를 시켜 구타를 유발’했다는 대목에서 등허리가 서늘해진다. 교육적인 의미를 떠나서 상식적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교실 풍경, 그 상처의 기억들

 

▲ 이른바 '사랑의 회초리'. 사진은 판매용 교편

이 그림은 까마득한 학창 시절의 기억을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근대화의 과실로도 지우지 못하는 전근대적 교실의 풍경, 그 상처의 기억들 말이다. 교실 안에서조차 여지없이 작동하던 그 신성한(!) 권력관계 말이다.

 

물론 그 권력의 맨 꼭대기에는 담임교사가 있는데 이 경우, 그것은 합법적이고 제도적 권력이다. 그 아래 선출되거나, 또는 선출의 형식을 빌지만 임명된 거나 진배없는 권력으로서 반장(급장)이 있다. 때에 따라서 이 권력은 부반장이나 분단장이라는 하위 권력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담임교사가 있을 때, 반장은 무력한 존재이다. 그는 고작 교사의 잔심부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일꾼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나 교사의 심부름을 하는 건 아니니 아이들은 그 심부름을 독점할 수 있는 반장의 지위를 몹시 부러워했다. 교사의 시중을 드는 대신 그는 청소 면제나 청소 감독 권한 등을 은총의 상급(賞給)으로 받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교사는 자리를 비우면서 자신의 권력을 반장이었던 내게 위임하곤 했다. 자신의 교편을 건네주면서 그는 아이들을 얌전히 자습시킬 것과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둘 것을 내게 명령했다. 글쎄, 그때 내 기분은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자랑스러워하였을 터이다.

 

위임된 권력을 어떻게 행사했는지는 기억에 아련하다. 그러나 그 교편을 담임이 그랬던 것 같은 용도로 쓰지 않은 건 확실하다. 아이들의 이름을 적는 대신 나는 ‘이름을 적을 수 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교사가 요구한 정숙을 유지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매우 협조적이었으므로 나는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필경은 다다라야 하는 갈등에 빠지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주변의 회고에 따르면 담임의 위세 뒤에 숨어 이 소 권력자가 폭력을 행사한 교실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든 교사가 자신의 권한을 아이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절대 옳지 않은 일이다. 교사는 자신의 권력 일부를 학생에게 위임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통제가 자신의 부재중에도 이루어지길 원한다. 자기 뜻대로 교실을 통제하긴 하지만 그는 학생을 수단으로 이용한 결정적인 오류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교사의 권한 일부를 위임받은 아이는 교사의 통제와 억압의 하부 기구, 하수인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은 또 한편으로 학생 집단을 위계화함으로써 학급을 수직적 명령체계로 편입시키는 군사 문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박정희 시대의 교련 교육이란 바로 그러한 병영문화를 ‘호국’이라는 전근대적 명분 아래 학교에 전면적으로 이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학교 폭력을 다룬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 사이더스

잠재적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었던 시절

 

대도시의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이제 초등학교 때와는 반대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아침마다 교문 앞에 서는 그 어깨들, 이른바 ‘규율부’라는 작은 권력자들이 암묵적으로 행사하는 폭력에 노출된 것이다. 멀쩡한 아침이니, 그들이 공개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물론 없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가 하급생 대부분에게는 위협적일뿐더러 그들에게 호명되는 것도 적잖은 심리적 위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 전상국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우상의 눈물>(1982)

이들 일종의 징벌권을 위임받은 규율부(선도부)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가 학교와 교사에겐 얼마나 생광스러운 일이었을까. 그러나 그것은 그들 앞에 벌거벗고 설 수밖에 없었던 하급생들에게는 절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전부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으스대고 싶어 했고, 그것은 바로 하급생들에게 잠재적 폭력으로 인식되곤 했으니 말이다.

 

이 전근대의 교실 풍경은 일찍이 작가 전상국이 <우상의 눈물>에서 그리고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그 면모를 드러낸 바 있다. 이문열의 소설에서 주인공 엄석대가 누렸던 권력은 결코 담임의 그것에 뒤지지 않았다. 그가 권력자로서 행사하는 폭력은 학급의 자질구레한 교칙 위반을 막고, 교실의 청결을 유지하게 하는 등 담임의 역할을 반이나 그 이하로 줄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절대 권력이란 주변의 묵인과 방조에서 비롯되며, 그렇게 형성된 부당한 권력이 합법적 제도와 질서라는 미명 아래 군림하게 되는 비극적 현실을 보여준다. 교실에서 공공연히 자행된 절대 권력 아래에서 모든 아이가 배웠던 굴종과 야합, 저항 의지의 상실이 얼마나 반교육적이며, 반문명적인가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치욕스러운 폭력,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 이문열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이른바 밀레니엄 시대,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교실이 19세기를 넘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우리의 교실 풍경은 미덥지 못하다. 공공연한 폭력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변형·왜곡된 형식의 유무형의 폭력은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 고교생이 죽음이 환기하는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이 사고는 아직도 자율이란 이름의 억압과 통제가 학교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모든 교육적 성과를 무화할 수 있는 가공할 폭력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드러내 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학교와 교실에는 폭력이 존재해서 아니 되며, 어떤 교육적 성과를 가져 온다 하더라도 그 과정의 폭력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지고 지선한 목표를 위해서라도 학생들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모든 교육의 목적이면서 과정이고 결과인 까닭이다.

 

어이없이 학생자치기구의 간부가 행사한 폭력에 희생된 학생의 죽음은 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교실 폭력이라는 제도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아직도 그런 문화를 용인하고 있는 오늘의 학교와 사회, 그 치욕스러운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 그것이 21세기 ‘학교 잔혹사’, 이 희생을 위무하는 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008. 10.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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