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고생의 ‘이완용 양산론’
다음 아고라에 오른 한 외고생의 글이 화제다. 자신을 한영외고 2학년이라는 이 학생은 ‘외고 폐지에 찬성하며, 외고를 자율고나 자사고, 특성화고로 전환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라는 의견을 아고라에 올렸다. 또 이 학생은 외고가 ‘또 다른 이완용들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다’라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 한 외고생의 토로…“외고는 제2의 ‘이완용’ 만드는 곳”][홈플러스 이승한 회장 관련 글 : 중소상인이 '맛없는 빵을 만드는 장애인'이라고?]
말도 많은 외고, 그 과실을 누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학생이 뜻밖의 주장을 하는 데 대해서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주장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학생의 주장이 나름의 경험과 고민의 결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은 외국어고등학교에 대해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규정해 버린다.
“사실 우리나라에 외국어고등학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고라는 간판을 걸고, 마치 기업처럼 ‘외고’라는 이름을 브랜드로 활용하여 만든 입시전문학교는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외고’는 현재 한국에서 ‘입시 명문’ 또는 ‘사회적 성공의 발판’, ‘국영수 문제 풀이 잘하는 애들 집합소’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좋은 학교’, 그러니까 국영수 점수 좋은 애들 다니는 학교에 다니게 되면 분명히 그 효과를 통해 개개인의 출세, 학벌의 획득에는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우리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토론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의 출세와 사회의 발전이 반비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바보가 되었습니다.”
외고가 그 본래 목적을 잃고 명문대에 가기 위한 예비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나는 학생의 의견 가운데 ‘이완용 양산론’에 흥미로웠다. 그는 역사적으로 1%가 99%를 짓밟은 사례는 많다면서 ‘수월성의 틀에 갇힌 교육’은 또 다른 이완용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넘어갈 때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이완용을 기억하십니까? 이완용은 당시 소위 말하는 1%의 인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완용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과 함께 살던 민족을 팔아먹었습니다. 한국 민중의 이익은 싸그리 짓밟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편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오늘날 강조되는, 수월성의 틀에 갇힌 교육에서는 또 다른 이완용들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단 이완용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1%가 99%를 짓밟은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알다시피 경술국치(1910)의 주역이었던 매국노다. 그는 관계로 진출하여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통의 외교관리가 되었다. 뒤에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친러파·친일파로 변신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는 그 매국의 상급(賞給)으로 작위를 얻었고 중추원 고문으로 영화를 누렸다.
학생의 주장대로 이완용은 ‘1%의 인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1882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1887년과 1888년에 각각 외교관으로 미국을 다녀온 뒤 1895년에 학부대신이 되었다. 관계에 진출한 지 13년 만에 장관이 되었으니 그는 출세 가도를 달린 엘리트 관료였던 셈이다.
초임 시절 이래 나는 자주 ‘이완용’을 언급하곤 했다. 교육의 목적이 단순히 지적으로 능력 있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데에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국어 교과서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글이 실려 있던 시절이었다. 내 얘기는 그랬던 것 같다.
“공부? 물론 중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부는 이완용도 잘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고작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일이었지 않은가.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관점, 생각을 지니고 사는 일이다.
아이들이 내 얘기에 얼마나 공감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도 입시교육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은 보충수업과 야간자습으로 날밤을 새웠다. 그러나 나는 수업 가운데서 드문드문 그런 얘기를 곁들이곤 했는데 아이들도 그런 시간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은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속뜻을 자주 생각하곤 한다. 이로움 앞에서 의로움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이로움은 가깝고 의로움은 멀기 때문이다. 학력이 최고의 가치처럼 평가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걸 강조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게 이로운가 해로운가’가 아니라 ‘옳은가 그른가’로 판단해야 할 일이 좀 많은가. 그리고 그걸 잊지 않고 사는 것도 민주시민의 책무이지 않겠는가. 나는 아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게 ‘점수’고 ‘이해’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찌 그게 아이들만의 문제이겠는가.
아이들이 기를 쓰고 공부하는 것은 거기 자신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적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직업을 갖는 출발점이라는 걸,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기득권층에 편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 온 게 세상이고, 우리 사회인 것이다.
명문대에 학생을 보낸 학교가 현수막을 걸어 그것을 자랑하고, 얼굴도 모르는 10년 전의 졸업생이 사시나 행시를 통과했다고 현수막을 거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명문대 진학과 사법시험과 행정고시 합격이 그 개인의 영예와 입신 외에 학교나 지역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겠다.
사회의 엘리트 계급으로 성장한, 자신의 계급과 강대국의 이해를 대변하려 하는 ‘머리 까맣고 한국말을 너무 잘하는 미국인’ 이 좀 숱한가 말이다. 국민의 건강보다 미국의 쇠고기 수출업체의 이해가 더 중요하다며 관련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미국 쇠고기 홍보(미국 쇠고기는 안전하다!)에 우리 축산기금 20여억 원을 편법 지출한 농수산식품부의 고위 관료들은 정말 한국 정부의 관료가 맞기나 한 걸까.
사회의 1%라니까 생각나는 이들이 또 있다. 대리투표나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긴 건 위법이나 법의 효력은 인정한다는 절묘(?)한 줄타기를 한 헌법재판관, 그들의 머리도 썩 좋다. 그들은 1% 정도가 아니라 0.001%에 해당하는 엘리트답게 관습헌법이란 정체불명의 논리를 끌고 와서 행정수도법 위헌 결정을 한 그 사람들 아닌가.
용산참사의 선고 공판에서 ‘법과 목적의 정당성’ 운운하면서 철거민들에게 중형을 선고한 재판부도 우리 사회의 1%에 포함되는 이들이다. ‘검찰이 써 준 원고를 읽는 것 같았다’라는 유족들의 감회 앞에 웃을 수도 없는 이 목마름, 분노와 나락 같은 무력감을 어쩐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그 1%가 아니라 99%에 속해 있기 때문만일까.
‘머리 좋은 게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라는 얘기를 떠올리는 까닭은 그래서다. 외고의 수혜자이면서 그 진실을 바라본 위 학생을 새롭게 바라보는 이유도 같다. 나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아실현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직업을 갖더라도 적어도 이웃의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교과서를 편다.
2009. 10.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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