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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24년 뒤에 출생신고서 회수… ‘꿈’이 선명해졌다

by 낮달2018 2020.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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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교조다] ‘법외노조’ 되더라도 참교육 꿈은 변하지 않아

▲ 변한 것은 없다. 법외노조라 해도 ‘참교육 한길로 당당하게’ 갈 뿐이다. 전국교사대회 (10.19.)  현장에서

지난 10월 24일, 고용노동부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법외 노조’ 통보를 강행했습니다. 국제 기준에 어긋난다는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의 권고도, 인권침해 소지가 크다는 국내외 여론도 간단히 묵살되었지요. 이로써 1989년 ‘참교육’의 깃발을 내걸고 출범한 전교조는 1999년 합법화된 지 14년 만에 다시 법외노조가 되었습니다.

 

전교조, 14년 만에 다시 법외노조로

 

아시다시피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는 데 인용된 것은 ‘법’ 논리였지요. 노동부 장관은 “법을 지키지 않겠다는 단체에 더 이상 법에 의한 보호는 맞지 않다고 판단”해, 교육부 장관은 “노동자이기에 앞서 선생님이기 때문에 교육을 위해서라도 현행법 준수를 촉구했다”라며 ‘교원노조법상 노조 아님’을 통보했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노조원 자격 배제를 요구한 해직 조합원은 단 아홉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사학비리 고발 등으로 해직됐습니다. 전체 조합원 가운데 0.015%에 해당하는 이들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조합원들의 선택에 정부는 단칼에 나머지 6만여 명에게 주어진 ‘노동조합’의 지위를 박탈했습니다.

 

앞서 우리는 “해직자를 조합원으로 계속 인정할 경우 노조 지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노동부의 통보를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거부했습니다. 조직을 건사할 것인가, 조직 구성원인 해직 동료를 안고 갈 것인가 하는 정부의 압박에 교사들은 원칙적이고 인간적인 선택을 취했던 것이지요.

 

조합원 총투표를 앞두고 우리 학교 분회도 시외의 한 음식점에 모였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총투표와 관련된 의견을 나누었지요. 조직이 직면한 문제가 만만찮다는 걸 누군들 몰랐을까요. 그러나 모임에 앞서 이 문제를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담담했습니다.

 

분회에서는 준비된 자료로 ‘고용노동부의 시정 명령’에 대한 ‘거부’와 ‘수용’의 차이점을 쉽게 풀어주었지요. 설사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동료들은 정부가 내미는 칼끝이 정작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동료들은 정부의 압박에 대해 분노를 표했지만, 냉정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분노’와 ‘냉정’ 사이에서, 두 의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였습니다. 조심스럽게 의견을 나누는 후배 교사들을 바라보면서 제 마음은 얼마간 착잡해졌습니다.

 

1989년, 전교조 원년을 함께 한 조합원으로서 저는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던 듯합니다. 저는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얘기가 후배 교사들에게 부담스럽게 다가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1989년에 전교조 결성에 참여하고 한동안 교단을 떠나 있어야 했는데…, 서둘러 교직을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는 마당에 느닷없이 ‘법외노조’라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또, 거부든 수용이든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판단해서 투표에 참여하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선택이든 그게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라면 진실로 주체적 선택이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동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사흘 후 우리 학교 분회는 총투표를 시행했습니다. 전 동료들의 선택이 별로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선택이든 우리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날 저녁 밤늦게 날아온 메시지를 통해 전체 조합원들이 해직 동료들과 함께 가는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홉 명의 동료를 안으려고 6만이 ‘법외’를 감수하겠다…. 동료들의 선택은 그것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이긴 합니다만 저는 이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묵묵히 조합비를 내는 것 외에 따로 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지만, 동료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를 나름대로 내다보고 있었으리라 믿었습니다.

 

24년, ‘애송이 청년’이 50대 ‘중견’이 된 시간

 

지난 19일에는, 서울 독립문공원에서 열린 교사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명퇴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걸 아는 후배 교사는 ‘마지막 교사대회’냐고 농을 걸어왔지요. 대회장에서 복직 동료들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해직 무렵엔 20대 후반의 새파란 애송이였던 친구들이 어느새 허옇게 머리가 세거나 빠진 50대의 중견 교사가 되어 있었지요. 우리는 그냥 마주 보며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 전교조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쳐진 존재였다. 1989년 5월 연행되는 교사들

24일이나 곡기를 끊은 전교조 위원장이 쉰 목소리로 ‘참교육 한길’을 같이 달려오다 유명을 달리한 교사들의 이름을 목메어 부르기 시작했을 때, 저도 우리 곁을 서둘러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마음속에서 짚어 보았습니다.

 

배주영, 정영상, 황현자, 정관, 장성녕, 그리고 지난 2월에 세상을 버린 김창환 선생님…. 저는 한 시대의 뜨거움을 함께 한 사람들과 나눈 꿈과 세월을 떠올렸습니다.

 

배주영, 청송의 자취방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 때 그녀는 스물일곱의 처녀였지요. 한 해 뒤의 복직을 앞두고 떠난 정영상, 딸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버린 황현자는 저와 동갑내기였지요. 어린 남매를 남기고 떠날 때 정관은 불혹을 갓 넘긴 장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초등 6학년짜리 늦둥이를 남기고 졸지에 눈을 감은 우리의 친구 장성녕, 그의 막내는 올해 고2가 되었고 지난봄 혼인한 맏이는 다음 달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14년 전으로 돌아가는 역사적 퇴행을 맞닥뜨린 것은 그들이 못 다한 세월을 살아낸 탓일까요.

 

잘 다녀왔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학교 동료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저는 잠깐 혼란스러웠습니다. 시간은 돌고 돌아 마치 스무 몇 해 전으로 회귀한 것일까요. 저는 1989년 전교조 출범을 전후한 학교의 풍경과 오늘을 막연히 겹쳐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주일이 흘렀습니다. 예정대로 정부의 후속 조치가 진행된다는 보도가 줄을 이었습니다. 전교조는 법원에 ‘법외노조 통보 처분 취소 소송과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이 유례없는 노동 탄압에 맞서 싸우겠다는 도저한 결의를 밝혔습니다.

 

돌이켜보면 출생신고도 받아주지 않고, 거리로 내쳐진 아이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었습니다. 1989년 5월 28일의 일입니다.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으로 정리되는 ‘참교육’을 향한 열정과 희망 하나로 전교조에 가입한 1500명이 넘는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정권은 ‘탈퇴각서’를 요구했고, 그 종이쪽에다 차마 이름을 적을 수 없었던 이들은 거리의 교사가 되었지요.

 

5년 후인 1994년에 해직 교사들은 복직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다시 5년, 1999년 7월 1일, 드디어 전교조는 합법화되었습니다. 단체행동권이 없는 반쪽의 합법화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지난 세월을 보상받은 것처럼 기꺼워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 현재, 전교조는 스물넷의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 사람 성인의 몫을 다하게 된 이 청년에게 정부는 뒤늦게 준 출생 증명서를 회수해 버렸습니다.

 

누구는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명제를 말하지만, 이 반동(反動)을 그렇게 단순히 정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교조는 노동 운동사에 굵직한 한 획을 그은 노동조합 조직입니다. 제게 그것은 젊음의 한때를 바친 사랑이었고, 실천이었습니다. 냉소적 낭만주의자였던 국어 교사를 역사와 삶의 격랑으로 인도한 사랑이었습니다.

 

전교조, 역사와 삶의 격랑으로 인도한 ‘사랑’

 

1988년에 학교를 옮기고 교사협의회 운동에 참여했을 때, 저는 서른세 살, 훈계와 체벌을 오해했던 철없는 햇병아리 교사였지요. 서른넷에 해직되어 다섯 해 동안 거리를 떠돌다가 복직했을 때는 서른아홉, 불혹을 앞둔 때였습니다.

▲  전교조 투쟁은 모순의 교육 현장에서 들불처럼 일어선 분노의 표현이었다고 해도 좋다 .

혈기 왕성한 30대의 중후반부를 거리에서 보냈지만 저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교사로서 더 큰 허물을 저지르기 전에 전교조와 ‘참교육’을 만날 수 있었고, 그 1세대로서 곡절 많은 역사를 함께한 영광을 누렸던 까닭입니다. 물론 그 대가로 영영 잃어버린 5년여 세월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말이지요.

 

전교조 소속 조합원의 삶은, 제가 ‘평균적인 교사’가 될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전교조가 아니었다면, 저는 교사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이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은 생활인으로 문화와 안락을 적당히 즐기고 누리며 살았을 겁니다.

 

전교조가 아니었다면 ‘분단 조국’을 고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기 안에 자라는 파시즘, 가증스러운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도 이르지 못했을 테지요. 적당히 경력을 쌓고, 이런저런 삶의 조건들을 챙기면서 승진의 기회나 높은 자리를 기웃거리며 살지 않았던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전교조 출범으로부터 24년이 흘렀습니다. 열등반 담임으로 아이들이 제도적으로 열등생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서른넷의 초짜 교사는 쉰여덟의 초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교조는 24년 만에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을 빼앗겼습니다.

 

“학교는 평온합니다”

 

공식적으로 법외노조 통보에 이어 후속 조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학교는 평온합니다. 알량한 형식의 변화로 그 내용과 본질이 바뀌리라고 기대했다면 어리석은 일이지요. 1500여 명의 교사가 거리로 내몰리고 ‘닫힌 교문’ 앞에서 눈물을 씻던 24년 전에도 아무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지역의 골짜기를 누비며 참교육 소식을 나르는 전령사가 된 해직 교사 이야기는 이미 전설이 되었지요.

 

노조에 참여하지 않는 동료 교사들도 정부의 졸렬하고 퇴행적인 조치에 대해서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비록 소속은 달라도 동료들은 전교조로부터 시작된 학교의 변화, 민주주의, 교권과 학생 인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식의 바탕 위에서 50여 명의 동료들은 ‘탄압 저지’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그들의 지지와 격려가 새날을 여는 힘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변한 것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법외노조’가 되고, 단체교섭권을 잃었다고 해도 참교육을 위한 우리의 자리와 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24년 전 법외노조로 전교조를 세울 때 우리의 목표는 ‘합법적 지위’가 아닌 ‘참교육’을 위한 보다 나은 환경 조성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뿐입니다.

 

다시 들판에 서서 합법적 지위를 누린 지난 십수 년 동안의 무사와 안일, 시나브로 빠진 관료주의, 잃어버린 유연성, 녹슨 원칙과 무뎌진 성찰 등을 돌아보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처음처럼’ 겸허히 우리는 지난 24년을 다시 복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된 그 시절의 유인물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표현은 “학교를 ‘사랑과 배움의 공동체’로”였습니다. 날이 선 경쟁교육의 한가운데서 교육이 ‘희망’‘’의 다른 이름임을 확인시켜 준 구호였지요. 그것은 배주영과 정영상이, 황현자와 정관, 장성녕이 결코 버릴 수 없었던 꿈. 20년 세월에도 변하지 않고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우리의 꿈, 우리의 희망입니다.

 

대입 수능시험을 코앞에 두고 학교에서 전해 드립니다. 학교는 평온합니다. 교사들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지만, 무엇이 변하고, 변하지 않을지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변해야 하고 무엇이 변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2013. 11. 2. 낮달

 

 

24년 뒤에 출생신고서 회수... '꿈'이 선명해졌다

[나는 전교조다] '법외노조' 되더라도 참교육 꿈은 변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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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7년 후, 2020년 9월 4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는 위법하다'는 대법원판결로 전교조는 합법 지위를 회복했다. 사필귀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간 정권의 탄압으로 교단에서 쫓겨난 교사들이 견뎌야 했던 세월은 그런 한마디 논평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관련 글 : ‘교원 단결권’ 되찾는 데 7년, 그건 너무 길었다] 

 

 

‘교원 단결권’ 되찾는 데 7년, 그건 너무 길었다

전교조 합법 지위 회복에 대한 퇴직 원년 조합원의 감회 오늘 새벽, 잠에서 깨어나면서 손을 뻗어 머리맡의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4시 15분. 새로 잠들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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