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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모욕죄, ‘파놉티콘(Panopticon)’을 꿈꾸는가

by 낮달2018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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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사이버 모욕죄’ 입법 반대, 법안 철회 촉구

▲ 사이버 모욕죄 반대 전문가 선언 ⓒ 미디어스 나난

사이버 모욕죄, 표현과 민주주의

 

어제는 이른바 ‘빼빼로데이’였다. 말하자면, 어느 제과업체에서 만든 과자 이름이, 11월 11일이라는 날짜 표기와 겹치면서 무싯날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아이들과 ‘상업적’으로 만난 날이다. 이날, 법학·언론학 등 전문가 229명이 선언을 통해 정부의 ‘사이버 모욕죄’ 입법에 반대하고 법안 철회를 촉구했다고 한다.

 

말도 많던 그 ‘사이버 모욕죄’다. 한 배우의 자살을 계기로 그 배우의 이름을 붙이다가 유족의 항의를 받았던 그 법이다. 사이버 모욕죄가 ‘표현의 자유ㆍ민주주의 침해’일 뿐 아니라, ‘한국 지성의 말살 기도’라는 주장을 구태여 되뇔 필요는 없을 터이다.

 

‘OECD 국가들 대부분에서 이미 폐기되었거나 실질적으로 사문화되었고, 세계언론자유위원회(WFPC) 또한 권위주의 국가들에 폐지를 매년 요청하고 있’는 ‘모욕죄’가 ‘선진화 원년’을 표방한 2008년 한국에서 다시 신설되려는 이유야 뻔하고 뻔하다.

 

현 정부 출범 이래 여러 가지 정책 실패로 말미암은 여론의 저항이 만만찮았고, 그 소용돌이 가운데 쌍방향 매체로서 엄청난 파급력을 자랑하는 인터넷과 누리꾼들이 있었던 게다. 이 법이 겨냥하고 있는 게 연예인들이 아니라 정부나 권력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 법이 연예인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해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이 법이 가진 ‘위험성’이야 쌔고 쌨지만 ‘비(非)친고죄’로 발의된 것은 그 정점이다. 범죄의 피해자 등의 고소·고발이 ‘없어도 공소가 가능한’ 비친고죄가 수사기관의 ‘권력남용’과 누리꾼의 ‘자기 검열’ 효과를 내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미 ‘공안’이 뜨고 있는 상황, ‘수색 영장 없이 시민단체 간부의 자택 수색을 감행’하려 한 무서운 게 없는 경찰이 자신의 헌 칼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행위가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 의해서 감시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내가 그 감시 권력에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 파놉티콘. 벤담에 의해 제시된 원형 감옥. 푸코는 근대적 '감시' 또는 '규율'의 기원을 여기서 찾았다 .

‘자기 검열’의 추억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취하는 고육지책이 말하자면 ‘자기 검열’이다. 내가 절대 유쾌할 수 없는 ‘자기 검열’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이 ‘하 수상한’ 시절 덕분이다. 지금으로부터 육칠 년 전에 나는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되었고 그것은 꼼짝없는 자기 검열을 내게 강제했었다.

 

어떤 사학재단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형사 입건되면서 우리 지역의 교육감이 사퇴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뇌물 사건마다 뒷담화가 무성하기 마련이지만, 이번 사건에서 교단의 반응 중에 압도적인 게 ‘받을 걸 받아야지’였다. 뇌물을 준 사학재단이 그만큼 인심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 사학재단은 지금껏 소속 학교 교사들을 막무가내로 해임했다가 여론과 법률에 된통 당한 뒤에야 징계를 철회하고 복직시키는 등 끊임없이 물의를 일으킨 전과가 여럿이다. 육영사업자는커녕 ‘상식’도 ‘양식’도 없는 장사치일 뿐이라는 게 그들에 대한 저간의 평가다. 교육감에게 뇌물을 바친 실질적 교주는 지금 구속 중이다.

 

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당사자가 바로 그 재단이었다. 나는 어느 날 그 재단이 있는 지역의 경찰서 형사계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이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경찰과 통화하고 나서야 나는 현재 상황을 얼추 짜 맞출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도 교육청 누리집 게시판에다 그 재단에 대한 항의와 비판의 글을 올렸는데, 그게 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인가. 재단 측에서 고소를 취하해 와 사건을 종결 처리하겠다고 담당자는 내게 설명해 주었다.

 

피소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전화를 끊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피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게 얼마나 성가시게 내 일상을 위협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경찰 조사를 위한 소환장이라도 받으면 내가 감당해야 할 불편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다음에 있었다. 예의 재단은 이후에도 끊임없는 교권 침해를 저질렀고, 나는 다시 교육청 게시판에 항의와 비난의 글을 올려야 했다. 나는 그런 형식에는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무언가 내 의식 속에 알 수 없는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나는 군데군데에서 글을 멈추고 내가 써야 할 단어와 구절이, 행여 저 감시자들을 자극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정리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나와 내 삶을 일정하게 규정할지도 모른다는 기분 나쁜 불안감을 다스려야 했다.

 

‘진실’로부터의 부자유, 자기 검열

 

정말이지 그건 매우 불쾌한 경험이었다. 일상에서도 누구나 자기 검열을 경험한다. 윗사람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면서 보다 부드러운 단어를 찾아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건 일종의 인간적 배려이지만, 이건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믿고 있는 진실과 그 해석으로부터 부자유였고,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정신의 굴복과 야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러저러하게 말한다면(쓴다면) 법전의 어떤 항목이 나를 범죄자로 규정하고 옭아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정말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어떠한 이유로도, 어떤 경우에도 ‘자기 검열’이 제도로서 존재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것은 ‘힘세고 사악한 타인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재생산되는 통제’인 까닭이다. 그것은 때론 제도가 만들어 놓은 ‘바른길’을 강요하고, 더러는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통해 인간의 사유를 옥죄는 것이다.

 

그런데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 속의 통제 장치는 우리가 질서에서 벗어난 생각을 할 때마다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며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우리를 옥죄어 온다. 이를 ‘제2의 본성’이라 부른다. 자유주의의 고전적인 문제의식은 자기 욕구의 충족을 방해하는 타인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제2의 본성은 힘세고 사악한 타인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스스로 재생산되는 통제, 자기 검열을 뜻한다. 이 제‘2’의 본성은 남이 만들어 놓은 ‘바른길’을 걸어가도록 강요한다. 톨레랑스는 내면에 뿌리내린 제‘2’의 본성, 몸속에 각인된 습속을 깨닫고 극복하려 한다.

    - 하승우 ‘희망의 사회윤리 톨레랑스’ 중에서

 

유례없는 인터넷 실명제의 확대 계획에 이어 입법될 ‘사이버 모욕죄’가 그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일찍이 벤담이 제시하고 푸코가 주장한, 정보기술로 구축된 감시체계, 파놉티콘(Panopticon)의 세계일까. 선언문에 드러난 전문가 집단의 우려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모욕에 대한 형사처벌 제도는 권력자가 자신의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목적으로 남용될 수 있다는 점은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혐오스러운 욕이 아니더라도, 풍자적 표현이나 비꼬는 정중한 표현, 다소 거친 표현까지도 모욕죄의 구성요건을 충족시킬 여지는 있다. 인정기준이 매우 애매한 모욕죄는 권력자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행사되거나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 ‘전문가 선언’ 중에서

 

사이버 모욕죄가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때로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을 의식하곤 한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선택한 어휘가 내 직업과 조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의식하는 편이다. 그건 한편으로는 그 글을 아이들이 읽을 수 있다는 우려이기도 하고 내 비판적 태도가 상당한 논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기도 하다.

 

사이버 모욕제가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논리를 규제하기 시작하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렵다. 엉뚱하게도 자살한 여배우의 이름을 끌어대기도 한 이 법의 규제와 통제는 결국 ‘국민의 의견 표현에 대한 통제’가 되리라는 걸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1’이 네 개나 겹치는 이른바 빼빼로 데이에 전문가 선언에 동참한 학자들의 이름과 소속을 일별해 본다. 그래도 이러한 사회적 의제에 대해 실천적 발언을 잊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위안인 셈인가.

 

2008년, 요란하게 ‘선진화 원년’을 선언한 정부와 권력이 그리는 세상은 여전히 ‘퇴행’ 중인 듯하다.

▲ 두산대백과사전 중에서

2008. 11.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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