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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겨울 공화국’을 다시 읽으며

by 낮달2018 2020.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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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 시인의 저항시 ‘겨울 공화국’

▲ 양성우 시인의 시집들. 그의 시는 70년대를 관통하는 살아 있는 것이었다 .

뜬금없이 양성우의 시 ‘겨울 공화국’을 떠올린 것은 며칠 전이다. ‘뜬금없이’라고 는 했지만 기실 이게 뜬금없는 일만은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안다. 2015년, 40년 전 유신 독재 시절의 비유 하나가 환기하는 기시감 때문이다.

 

▲ 양성우 (1943~ )

양성우(1943~ ) 시인이 광주 YMCA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에 참석하여 이 시를 낭송한 것은 1975년 2월이었다. 그 3년 전에 박정희는 종신 집권을 위해 설계된 절대적 대통령제인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비상계엄령 아래 위헌적 절차에 의한 국민투표로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유신헌법을 확정 공포한 것은 두 달 후인 12월 27일이었다.

 

유신체제에서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선거가 아닌, 관제 기구에 불과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선출되고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무제한 연임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 확정 공포 나흘 전에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유신 독재의 막을 올렸다.

 

그해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학교에서 유신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배워야 했다. 그러나 국민은 유신체제를 쉽사리 민주주의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전대미문의 독재체제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연합(민청학련)으로, 정치인과 재야 세력은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여 조직적 투쟁에 나선 것이다.

 

1975년 2월, 시국기도회서 낭송된 시 ‘겨울 공화국’

 

1975년은 그 전해부터 발동된 이른바 ‘긴급조치’를 통해 유신에 저항하는 양심적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기 시작한 때였다. 정권은 교수, 학생, 언론인, 종교인, 문인 등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해직 등을 자행하면서 체제를 수호하는 데 광분하고 있었다.

 

2월 12일, 광주 중앙여고 교사 양성우 시인은 YMCA 강당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에 참석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열린 이 행사에서 그는 자작시 ‘겨울 공화국’을 낭송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그는 두 달 뒤에 중앙여고에서 파면되었다.

 

‘겨울 공화국’은 유신체제로 얼어붙은 한국 사회에 대한 가감 없는 비유였다. 사람들이 총칼과 군홧발로 짓밟히고 있는 ‘겨울’의 ‘한밤중’, 시인이 던지는 질문으로 시는 전개된다. 이 ‘한때를 우리들은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고.

 

‘거짓말’과 ‘채찍질’을 견뎌야 하는 ‘노예’와 ‘머슴’과 ‘허수아비’를 부끄러워하면서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사나운 자의 총끝에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한다고.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언 땅에도/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고 말이다.

 

장시 ‘노예수첩’으로 구속, 복역

 

학교에서 쫓겨난 시인은 한동안 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고은, 리영희, 문익환 등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인 1976년에 발표한 장시 ‘노예 수첩’으로 결국 구속되고 만다. ‘노예 수첩’은 에필로그, 프롤로그와 35편으로 된 장시로 시인은 이 시 때문에 국가모독 혐의와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기소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국가모독이란 시인이 ‘노예 수첩’에서 대한민국을 독재국가로 표현했기 때문에 씌워진 혐의였다. 박정희 1인 지배체제에서 권력이 곧 국가였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곧 국가모독이었던 것이다. 그는 ‘노예 수첩’을 남미의 저항문학처럼 지하에서 유통시켰다. 시인의 회고다.

 

“75년 ‘겨울공화국 시 낭송 사건’ 이후 <창작과 비평>과 <대화> 말고는 내 작품을 실어주는 잡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미 저항문학의 유통방식처럼 지하에서 시를 유통시켜야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장시 ‘노예수첩’과 ‘우리는 열 번이고 책을 던졌다’ 등을 쓴 뒤 은밀히 이를 복사해 손에서 손으로 유통시키는 방법을 썼습니다. 서울과 광주 지역의 지인들에게 시를 건네주면 그들이 이것을 재복사해 수많은 사람에게 배포했지만,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다카사키 소지 교수가 ‘노예 수첩’을 일본 시사 잡지 <세카이>(세계·이와나미서점 발행)에 갖다줘 77년 6월호에 전격적으로 실리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세카이>에 시가 실린 사실을 몰랐기에 평상시처럼 출근하다가 77년 6월 13일 오전 9시께 대한성서공회가 있는 종로서적 건물 입구에서 체포됐어요. 남산의 중앙정보부 5국 지하실로 끌려갔죠.

중정으로 끌려가니, 수사과장이란 자의 책상 위에 나에 대한 관련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심문 첫날 정보부 요원들이 군홧발로 다가오더니, “다시는 글을 못 쓰게 해 주겠다”면서 내 오른손을 짓밟아대는 바람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엄지를 제대로 못 씁니다.

     -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⑩ 이승철이 묻고 양성우가 답하다(<한겨레> 2015. 1. 18.)

▲ 제헌절 특사로 풀려나와 문인 동료들과 함께 .앞줄 푸른 남방을 입은 이가 양성우 .

시인은 2년 넘게 복역하다가 1979년 제헌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가 옥중에 있을 때 고은과 조태일 등 동료 문인들에 의해 시집 <겨울 공화국>이 출간되면서 이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판매금지 조치를 당한 <겨울 공화국>은 5공화국 때까지 금서로 남아 있어야 했다.

 

2012년 시인은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고 서울중앙지법은 국가모독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헌법재판소는 올해 10월 21일 유신 시절 국가를 비방하면 형사 처벌하도록 규정한 국가모독죄(옛 형법 104조의2)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했다. 1975년 제정된 이 법은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는 수단이란 비판을 받고 1988년 폐지된 것이었다.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체제가 무너진 뒤 시인은 198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재출범할 때 대표를 맡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이어 정치에 투신, 평화민주당 소속 13대 국회의원(서울 양천 갑, 1988~1992)을 지냈으나 14대에선 낙선하였다.

 

양성우 시인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면서 정치적으로 변신했다. 그는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에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기나긴 죽음의 시절’은 끝났는가

 

글쎄, <나무위키>에 실린 몇 줄의 이력으로 저간의 사정을 알 수는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70년대 대표적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저항 시인이 그 시절 독재정권을 잇고 있는 보수정당을 지지하게 된 정치적 선택은 김지하의 변신과는 또 다르게 마음에 쓸쓸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그가 쓴 시에 최병선이 곡을 붙인 민중가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듣는다. ‘기나긴 죽음의 시절’도 ‘흙먼지 재’도 옛일이건만 어쩐지 그것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청산의 부름에 시대의 죽음을 넘어 ‘큰 강 건너’ 떠났던 그를 생각하면서 시와 시인의 부침을, 우리네 역사와 삶의 곡절을 우울하게 돌아다본다.

 

 

2015. 11. 2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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