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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은 훤하고, ‘심간(心肝)’은 편하다

by 낮달2018 2020.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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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은 얼굴, ‘심간(心肝)’은 심장과 간장

“원장님 심간이 아주 편하신가 보네, 이렇게 활짝 웃고 계시니. 집이 온통 불타고 있는데, 대체 어찌하겠다는 심산인지….”

 

“아이고, 어르신 요즘 신관이 훤하신데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위의 것은 지난 주말 한 일간지 기사[관련 기사 : 김명수 대법원장은 묵언수행 중?]에 나온, 어떤 변호사가 웃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진을 보면서 뇌까린 말이고 아래는 우리가 시골에서 흔히 듣곤 하던 말이다. 기사를 읽다가 나는 ‘심간’이 낯설어서 순간적으로 “어! 이거 신관을 잘못 쓴 거 아냐?”하고 생각했다.

 

‘신관’, 남의 얼굴을 높여 이르는 말

 

‘신관’은 요즘 젊은이들은 더는 쓰지 않는 말이지만, 시골에 가면 일상어처럼 쓰인다. 짐작했겠지만, 이 말은 흔히 ‘건강 상태를 말할 때’ 남의 ‘얼굴’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얼굴을 높이는 상대는 어르신들이기 쉽다. “신관이 영 그릇돼 보이는데 어디 편찮으신가요?”와 같이 쓴다.

 

위의 말에서 ‘심간’을 ‘신관’으로 바꾸어 써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하지 않은가. 잠깐이지만 내가 ‘오해’한 연유다. 바로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그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신관’은 우리말이지만 ‘심간(心肝)’은 한자어다. 두 말의 뜻은 비슷하지도 않다.

 

‘신관’은 한자어인 ‘신수(身手)’와 뜻이 통한다. 신수는 “1. 드러나 보이는 사람의 겉모양, 2.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건강 색”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통 ‘신수가 멀끔하다’, ‘신수가 피다’ 등으로 쓴다.

 

심간은 글자 그대로 ‘심장과 간’이 기본의미다. 여기서 파생한 뜻이 ‘깊은(깊이) (감추어 둔) 마음속’이다. 기사에 대법원장의 심간이 등장하는 이유는 뻔하다. 사법사상 유례없는 ‘사법 농단’으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상황인데 대법원장이 사람 좋게 웃고 있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뜻이다.

 

‘심간’은 ‘깊이 감추어둔 마음속’

 

그러나 이 낱말은 언제부터인가 쓰임새가 떨어졌다. 글쎄, 대체할 만한 우리말 어휘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렇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속내’(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사정이나 일의 실상)나 ‘속셈’(마음속으로 하는 궁리), ‘셈속’(마음속에 담긴 실제 생각)을 떠올릴 수 있으니 뜻이 꽤 다르다.

 

같은 한자어인 ‘심중(心中)’이나 ‘흉중(胸中)’으로도 대체하기 어렵다. 둘 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란 뜻이니 ‘깊은 마음속’과는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간’은 그 의미적 효용성이 있는 낱말이다. 그런데 이게 쓰임새가 준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상도 지역에서는 ‘신관’과 섞여서 일상에서 더러 쓰이기도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걸 글자로 표기한 걸 본 건 나도 처음이니 쓰임새가 준 것은 확실하다. 이런 표현들은 문학작품에서 쓰이면서 그 생명을 이어가는 게 보통이지만 젊은 작가들도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요즘은 우리말도 외국(래)어로 대체되고 있다

 

잘 안 쓰이는 한자어를 우리말로 대체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마땅한 대체어가 없는 낱말이 쓰임새가 줄면서 사어가 되어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요즘은 우리말조차도 외국어로 대체되는 형편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요즘 ‘통닭’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우리 세대밖에 없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진작에 ‘치킨’으로 바꾸어 쓰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주’는 ‘와인(wine)으로, 요리사나 주방장 대신 ‘셰프(chef)’가, ‘보살피다’ 대신 ‘케어(care)하다’가 쓰인다. 그것도 거의 일상적으로.

 

2018. 9.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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