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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by 낮달2018 2020.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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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1969)

▲ 내게 대중가요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만난 이미자와 섬마을 선생님으로 다가왔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 내가 태어나 처음 만난 대중가요였다. 그리고 그 노래가 주제가였던 라디오 드라마 ‘섬마을 선생님’은 내 일상에 충격으로 다가온 ‘서사(敍事)’의 세계였다. 말하자면 이미자의 노래는 내 유년 시절에 처음으로 열린, 낯선 세계로 열린 창이었던 셈이다.

 

초등학교를 졸업 후 막 ‘마포종점’이나 ‘소양강 처녀’ 따위로 유행가에 입문하면서 나는 고향을 떠났다. 나는 인근 대도시의 중학교 전기 입시에 실패하고 후기의 한 공립 중학교에 합격한 것이다. 나는 신암동 산동네의, 삼륜 화물차 한 대를 부리던 맏형 내외의 단칸방에 얹혀살게 되었다.

 

까까머리 시절에 만난 박건의 노래들

 

그때, 라디오를 통해 익힌 대중가요가 박건의 노래들이다. 텔레비전이 일반화(우리 반 예순다섯 명 가운데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불과 서너 집에 불과했다.)되기 전이라 대중문화를 접할 수 있는 건 라디오가 유일했다. 그것도 집에 있는 트랜지스터라디오가 아니라, 주로 거리 곳곳에 성업 중이던 ‘음향기기 판매업체’에서 인도를 침범해 내어놓은 대형 스피커를 통해서였다.

 

흔히 ‘소리사’라는 상호를 달고 있었던 그 업체들은 종일 고출력의 앰프로 당시의 유행가를 마구 틀어댔고, 사람들은 꼼짝없이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즐겨야 했다. ‘소음 공해’ 따위를 인식할 만큼 사람과 시대가 깨어 있지 않던 때였었다. [관련 글 : 노래여, 그 쓸쓸한 세월의 초상이여]

 

당연히 나는 텔레비전이 아닌 라디오를 통해 박건의 노래를 익혔다. 내가 처음 배운 박건의 노래는 ‘사랑은 계절 따라’였다. 제목 그대로 계절에 따른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이 노래의 가사는 알 듯 모를 듯한 애정의 세계를 쓸쓸하게 제시했지만 나는 그것과 무관하게 가수의 독특한 음색과 멜로디에 빠졌다.

 

중학교 1학년 때인가 소풍을 가서 학급 오락 시간에 나는 이 노래를 꽤 감상적으로 불렀던 것 같다. 그 무렵 이미자, 조미미, 남진, 나훈아, 펄 시스터즈 같은 이들이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가수 박건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기껏해야 <선데이 서울> 같은 황색 주간지를 통해서 연예계 소식을 띄엄띄엄 확인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박건은 그 후로도 꽤 인기를 끈 노래를 잇달아 발표했다. 70년대 들면서 그는 만만찮은 가사의 울림을 가진 노래 ‘봄이 올 때까지’를 불렀고 1971년 ‘그 사람 이름은 잊었건만’을 발표하며 일약 스타 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것 같다.(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 당시 내가 그런 정보에 어두웠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여러 경로로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공원. 중앙의 큰 나무가 마로니에로 알려졌지만 비슷한 칠엽수다. 그래서 마로니에 없는 마로니에 공원이란다.
▲ 일반 칠엽수의 열매. 마로니에(가시칠엽수)는 꽃잎 안쪽에 붉은색 무늬가 있고 열매 표면에 성게처럼 가시가 있다.
▲ 덕수궁 석조전 옆 평성문 앞의 1호 마로니에. 수령 100년이 넘었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하 ‘그 사람’)은 박인희가 부른 박인환의 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과 흔히 혼동되기도 하지만 두 노래는 전혀 다른 곡이다.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로 이어지는 박인환의 노래는 원제가 ‘세월이 가면’이다.

 

기억이 아련하지만, 이 노래는 주로 젊은이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노래의 도입부와 중간에 들어가는 ‘루루루루’하는 여음(餘音)도 신선했고, 특히 노랫말 가운데 ‘마로니에’는 이적 정서를 더하면서 노래의 호감도를 높였다. 또 그것은 ‘임자 잃은 술잔’ 따위에 도사린 신파조 정서를 가볍게 뛰어넘게 해 주기도 했다.

 

휘파람과 허밍으로 부르던 노래

 

뒤에 나오는 ‘잎이 지던 날’로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우리는 노래에 등장하는 ‘마로니에’의 정체에 대해 설왕설래했다. 그것은 거리나 지명 같기도 했고 나무 같기도 했다. ‘마로니에’인지 ‘마로니’에 인지부터 헷갈렸는데 그게 서울 어느 거리의 가로수 이름이라는 걸 안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 40년 세월의 전후. 가수 박건(1940~   ).

마로니에(프랑스어, marronnier)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으로 칠엽수(七葉樹) 과에 딸린 갈잎큰키나무이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는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오뉴월에 흰색 바탕에 붉은 무늬가 있는 종 모양의 꽃이 핀다고 한다. [위키백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법대 자리에는 마로니에 나무가 많았다 한다. 대학이 떠난 뒤 서울시는 이곳을 ‘마로니에공원’으로 조성했다.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가 배경으로 의식한 곳이 이 ‘마로니에공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 까까머리 중학생들은 밤거리를 쏘다니면서 이 노래를 휘파람과 허밍으로 불러댔으니까.

 

그리고 40년이 훌쩍 지났다. 그때 삼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던 가수 박건(1940~ )은 칠순의 원로가 되었고 까까머리 중학생들도 이제 50대 후반의 초로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지난해 박건이 마로니에공원을 널리 알린 공로로 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는 소식이 떠 있다.

 

막상 그의 노래를 즐겨 부르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대중들은 유명 연예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라. 텔레비전도 대중화되지 못했고 인터넷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고작 가십 기사나 싣는 주간지로나 연예인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인터넷으로 확인한 이력에 따르면 박건은 전남 함평 출생이다. 1968년에 ‘두 글자’로 데뷔했고 1969년에 ‘사랑은 계절 따라’로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1970년에 ‘청포도 고향’을, 1971년에는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발표하면서 같은 해 ‘이난영 가요상’과 ‘KBS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유튜브를 검색해 보면 그는 KBS 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의 단골손님이다. 이 무대에서 이 왕년의 인기 가수가 불러주는 노래, ‘사랑은 계절 따라’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듣는 기분은 참 각별하다. 40년의 세월은 청년 시절의 그의 목소리와 음색에 대한 기억을 희미하게 지워 버렸다. 그러나 노랫말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에 실린 그 시절의 우정과 사랑과 대한 내 기억은 아직도 녹슬지 않고 아련하기만 하다.

 

 

2012. 10.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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