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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스(The Animals)와 김상국의 ‘해 뜨는 집’

by 낮달2018 2020.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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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스가 부른 ‘해 뜨는 집과 김상국의 번안곡

▲ 뉴올리언스는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가장 큰 도시로 남부 흑인 음악의 중심지다 .

상처 입은 장미들이 모여 사는 거리
눈물에 젖은 가슴들이 웃음을 파는 거리

 

애니멀스(The Animals)가 부른 ‘해 뜨는 집(The House Of The Rising Sun)’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형이 즐겨 불렀던 노랜데, 정작 나는 그 무렵에도 그 원곡을 들어본 적이 없다. 형이 흥얼거린 번안곡을 부른 국내 가수가 김상국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집에 텔레비전은 아예 없었고, 라디오를 듣는 일도 쉽지 않았던 1960년대였다. 대도시로 유학 와 형과 누나 집을 전전하던 시골 소년이 대중문화를 접하는 일은 고작 그런 형식으로만 가능했던 때였다. 나는 형을 통해 ‘해 뜨는 집’의 리듬과 가사를 익혔다.

 

40년 전 번안곡으로 만난 ‘해 뜨는 집’

무엇보다도 그 심상찮은 노랫말이 맘에 들었다. ‘상처 입은 장미’, ‘눈물에 젖은 가슴’들이 파는 ‘웃음’이 무엇인지를 형은 대충 설명해 주었으므로 나는 이 노래의 배경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형은 원곡의 가사도 간략히 일러주었던 것 같은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에 없다. 다만 나는 불우하게 자란 청년이 소년 시절의 고향을 따뜻하게 추억하는 노래 정도로 이해했던 듯하다.

▲ 영국 출신의 5인조 남성 그룹 애니멀스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나는 ‘해 뜨는 집’ 따위는 잊어버렸다. 중3 무렵에 ‘프라우드 메리(Proud Mary)’ 정도로 팝송에 입문하면서 매우 어정쩡한 형태로 미국의 대중음악을 만났다. 그 시절만 해도 팝송을 가까이한 친구들은 대부분 전축을 소유한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다. 나는 지금껏 옛날식 전축이나 엘피판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생짜배기 촌놈이다.

 

얼마 전 우연히 올드 팝송을 듣다가 ‘해 뜨는 집’을 다시 만났다. 전혀 낯설지 않은 가락이 잊고 있었던 까마득한 소년 시절의 기억을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쓸쓸하면서도 그리운 추억이었다. 아무도 몰래 겪었던 사춘기의 일탈과 방황들……. 그 노래는 내가 겪은 사춘기의 한 장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인터넷으로 확인한 것은 여러 가지다. 장르가 ‘팝 블루스’라는 ‘해 뜨는 집’의 노랫말을 원문과 함께 다시 읽었고, 이 노래를 불렀던 그룹 애니멀스(The Animals)에 대한 정보들도 꽤 실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룹 애니멀스에 대한 정보 바로 가기]

 

‘해 뜨는 집’은 1964년 영국의 5인조 남성 그룹 애니멀스가 발표해 5주 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를 만큼 큰 인기를 끈 노래다. ‘해 뜨는 집’은 원래 미국에서 구전되던 민요였는데 애니멀스의 건반주자(keyboardist) 알란 프라이스(Alan Price)가 편곡해 발표하면서 온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밥 딜런의 ‘포크 록’을 낳은 애니멀스

 

애니멀스(Animals)는 비틀즈(Beatles), 롤링 스톤스(Rolling Stones), 더 후(The Who), 킹크스(Kinks), 허맨스 허밋츠(Herman’s Hermits) 등과 손을 맞잡고 브리티시 인베이젼(영국 출신 록 가수들이 북미와 호주 등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을 거두는 경향)의 물꼬를 텄다. 이들은 블루스의 원산지인 미 본토에 블루스 붐을 일으켰다.

 

이들은 또 밥 딜런(Bob Dylan)으로 대표되는 포크록의 탄생에 동기를 부여했다. 밥 딜런이 자신의 데뷔 앨범에 수록했던 이 미국의 구전 민요를 애니멀스는 전자 기타가 울부짖는 블루스 넘버로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이 음악을 듣고 충격에 빠진 밥 딜런은 통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잡고 포크록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오르간 연주로 유명한 이 노래는 애니멀스와 밥 딜런뿐 아니라 브라더 포(Brothers Four),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 등의 가수도 불렀다고 한다. 국내에선 불우한 환경에 있는 젊은이들이 노랫말을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개사해 부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노랫말과 김상국이 부른 번안곡이 다른 것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는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가장 큰 도시다. 흑인이 인구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이 루이지애나주를 남부 흑인 음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00년대 초에 흑인 음악가들에 의해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발상지가 되었는데 루이 암스트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 미국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은 뉴올리언스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다.

‘해 뜨는 집’은 죄를 저지르며 인생을 헛되이 보낸, 늘 술에 취해 있었던 노름꾼 아비를 둔 '아들의 노래'다. 그는 자신이 자랐던 ‘해 뜨는 집’을 추억하면서 어머니들에게 말한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살지 말도록 자식들에게 말해 달라고. 그는 속죄를 위해 뉴올리언스로 돌아가고 있다.

 

해 뜨는 집이 어떤 곡절을 가진 집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허름한 집’에 모여 살던 ‘불쌍한 아이들’은 ‘나쁜 길로 빠졌고’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그는 탄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 뜨는 집’은 역설이고, 절망 속에서 애써 찾는 희망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해 뜨는 집’은 김상국이 번안해 불렀다. 그러나 노랫말이 비참한 삶을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번안곡 덕분에 원곡마저도 금지곡으로 묶였다. 60년대에 널리 불린 ‘불나비 사랑’의 가수 김상국의 목소리로 듣는 ‘해 뜨는 집’의 느낌도 그 울림이 남다르다.

 

단박에 짐작했겠지만, 번안곡은 집창촌을 배경으로 한 노래다. 뉴올리언스 젊은이의 인생 유전을 한국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선 사창가 성매매 여성들의 고단한 삶이 필요했던 것일까. 애니멀스의 원곡과 김상국이 부른 번안곡을 번갈아 들으며 우리가 건너온 지난 40년의 세월을 물끄러미 돌이켜 본다.

 

 

2012. 12. 26. 낮달

 

* 북미에 사는 블로그 이웃이 ‘해 뜨는 집’이 집창촌(brothel)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은어처럼 통용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상국의 번안 가사는 제대로 번지수를 짚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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