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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정’과 ‘통감관저’ 사이

by 낮달2018 2020.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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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관저터 표석 제막식

▲ 표석 제막식. 서울시의 동의를 못 얻어 이 표석은 무허가가 될 수도 있다. ⓒ <한겨레>

8월 29일은 꼭 1백 년 전에 나라를 빼앗긴 날이었다. ‘경술국치’라는, 저 20세기 초엽의 민족적 결기가 묻어나는 이름에 배어 있는 겨레의 분노와 한은 쉽게 잴 수 없다. 그러나 일백년 이쪽의 현재는 무심하고 심상하기만 하다. 한때는 청소년들이 ‘마이클 잭슨의 생일’로 기억한 이날은 일요일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철늦은 여름비가 내렸다.

 

그 빗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가 모여 ‘식민주의 청산과 평화실현을 위한 한일 시민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고 뉴스는 전한다. 뒤늦었지만 양국 시민들이 ‘강제병합’이 무효임을 밝히는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은 뜻깊은 일이다.

 

‘통감관저 터’ 표식 제막

 

이날 공동선언에 앞서 양국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맺어진 서울 남산의 통감관저 터에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편지와 문자 메시지가 날아온 대로다. 표석은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관련 사실을 새겼다.

 

통감관저터

일제 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표석을 세운 곳은 일본공사관, 한국 통감관저, 조선 총독관저 등 시기별로 명칭은 달리했지만 일제 침략과 식민통치의 수뇌부가 위치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일본공사관이 자리 잡았으며,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1906년 2월부터 통감관저로 사용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월요일 오후 4시, 일본의 3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와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곳에 있던 통감관저 2층에서 ‘병합조약’을 ‘불법적’으로 조인했다. 조약 체결 이후 한국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면서, 이곳 역시 통감관저에서 총독관저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39년 9월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경복궁 후원 경무대에 총독관저를 신축한 뒤, 여기에 있던 건물은 ‘병합조약’을 기념하고 역대 통감과 총독의 유물들을 전시하는 시정기념관으로 활용되었다. 병합 이후 무려 29년간 이 자리는 일본 식민통치의 본산이었으니 우리 현대사로서는 치욕의 현장이다.

▲ 통관관저. 이 건물은 일본공사관, 한국 통감관저, 조선 총독관저 등으로 쓰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그런데 이 ‘치욕’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서울시가 ‘표석 설치 자문위원회’를 열어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출한 ‘통감관저 터’보다 ‘녹천정 터’라는 명칭이 적합하다고 의견을 모은 것이다. 녹천정(鹿川亭)은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박영원이 지었다가 개항 이후 일본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자다.

 

서울시의 ‘몰역사적 인식’, 치욕스러워도 우리의 역사다

 

서울시 표석 설치 자문위원회는 “(강제합병은)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며, 국민 정서상 반감을 가지는 경향이 강하므로 (경술국치) 표석 설치는 재고해야 한다”라며 ‘통감관저 터’라는 표석 설치에 반대 의견을 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서울시 입장에 대해 시민단체와 학계는 ‘어처구니없다’라며 반발한다. 참으로 ‘몰역사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서울시와 합의 없이 표석이 세워짐으로써 앞으로 ‘녹천정 터’라는 서울시의 표석이 나란히 서게 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게 되었다. 역사에 대한 민간과 관의 시각이 늘 같을 수는 없을지라도 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을 바라보는 이 시각의 차이는 마치 지난 백 년의 세월만큼이나 깊어 보인다.

 

‘서울시’의 입장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표석 설치 자문위원회 구성원들의 의견인가, 아니면 지방정부 ‘서울시’를 대표하는 서울시장의 의견인가. 강제합병이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라는 데 이견을 달 이는 없다. 그러나 ‘그래서 반감을 가진다’는 ‘국민 정서’는 ‘누구의 것’인지 통 알 수 없다.

 

‘반감’ 따위로 역사를 넘을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를 성찰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슬기와 용기다. 맹수는 자신의 상처를 혀를 핥아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치유에 이른다고 했다. 늘 역사적 성찰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마땅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2010. 8.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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