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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부음, 궂긴 소식들

두 부음에 부쳐- 목순옥과 이윤기

by 낮달2018 2020.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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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의 부인, 전통 찻집 ‘귀천’의 주인 목순옥(1935~2010. 8. 26.)

▲ 목순옥(1935~2010) ⓒ <서울신문>
▲ 인사동에 있다는 전통 찻집 '귀천' ⓒ 맛볼

한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 ‘목순옥’(1935~2010)이라고 하면 갸웃하다가도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라면 모두가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서울 인사동에 있다는 전통 찻집 ‘귀천’의 주인이다. 숱한 시인 묵객들의 명소가 되었다는 그 찻집을 나는 이름만 들었지 가보지 못했다.

 

천상병(1930~1993)의 시를, 그의 시 ‘귀천(歸天)’을 가르치면서 나는 가끔 그이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 주곤 했다. 1967 동백림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 폐인이 된 채 행려병자로 떠돌던 천상병 시인을 구한 이가 그이였다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그를 살려내고 그의 반려가 되었던 여인……. [시 전문 텍스트 보기]

▲ 남편 천상병 시인 전집. 이 저작의 절반은 그 부인의 것이리라.

1935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목순옥 씨는 오빠 목순복의 친구였던 천 시인과 1972년 결혼했다. 그는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소박한 사람, 천상병 시인을 평생 뒷바라지하면서 남편이 시인으로 살도록 해준 아내였다.

 

그는 1985년부터 인사동에 남편의 대표작인 시 제목 ‘귀천(歸天)’을 상호로 하는 전통 찻집을 운영하면서 남편의 시작 생활을 후원했다. 남편이 1993년, 간 경변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는 남편의 시를 알리고, 문인들의 소통의 공간인 ‘귀천’을 꾸려왔다.

 

내가 아는 그이에 대한 정보는 이게 다다. 그러나 그이의 부음을 듣고 나서 그이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남편의 이름, 그 그림자처럼 살아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남편을 보내고 17년. 그이에게는 자녀 하나 없었다는 사실도 공연히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나는 마땅히 그이의 죽음을 기릴 방법이 없다. 남편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다시 한번 읊조리고 가수 이동원의 목소리로 그 노래를 다시 듣는 수밖에. 그이의 따뜻한 삶은 저세상에서도 쉼 없이 이어지리라. 편안하고 한없이 편안하게…….

 

이동원의 귀천 https://www.youtube.com/watch?reload=9&v=ye52cGyN0No

 

소설가 이윤기(1947~2010. 8. 27.)

▲ 소설가 이윤기(1947~2010)

소설가 이윤기(1947~2010) 씨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예순넷이니 너무 이른 죽음이다. 사인은 역시 심장마비다. <한겨레>는 그의 부음을 전하면서 그를 소설·번역가, 그리고 에세이스트라 칭하고 있다. 나는 그를 ‘에세이스트’라 부르는 데 동의한다. 어떤 부음 기사에서는 그를 ‘신화학자’라 부르고 있는데 글쎄, 나는 머리를 갸웃하고 말았다.

 

그에 대해서 내게 각별한 기억이 있는 이유는 내가 한때 그의 저작을 즐겨 읽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기에 시골 학교에서 도서 업무를 맡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자전적 소설 <하늘의 문>(전 3권)을 도서실에 사들였고, 단숨에 그 책을 읽어 치웠다.

 

책을 읽으며 나는 그가 내 고향 인근인 군위 우보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잖아도 마음에 들었는데 인근 동네 사람이라니까 그가 더 정겹게 느껴졌었다.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나는 소설 <하늘의 문>을 시시콜콜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글에는 군위 우보의 깡촌에서 태어나서 대구로 서울로, 그리고 미국 등을 옮아 살면서도 ‘촌놈’임을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살았던 그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나는 자기 삶을 어떤 형식으로든 미화하지 않고 거칠게 전해 준 그의 진정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최고의 번역가로 꼽힌다. 1977년에 등단했지만 7, 80년대에 그는 편집자로 번역에 매진했었다. 그가 번역한 <그리스인 조르바>를 서가에서 찾지 못한 대신, 그의 단편집 <두물머리>와 수상집 <무지개와 프리즘>, 그리고 2000년대에 그리스 로마 신화 바람을 일으킨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를 찾았다. <두물머리> 표지 한복판에 박힌 그의 흑백사진이 마치 그의 삶처럼 인상적이었다.

 

<한겨레>는 ‘궂긴 소식’에서 최재봉 기자는 그의 소설을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그의 소설은 풍부한 교양과 적절한 유머, 지혜와 교훈을 두루 갖추고 있어 ‘어른의 소설’ 또는 ‘지성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제목에서부터 대립적인 성질을 병치시키곤 하는 그의 소설에는 바보 같은 현자가 등장해 대립적인 것들이 사실은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한국적 교양 소설’이라 할 만하다.”

▲ 작가 이윤기의 저작들. 왼쪽부터 소설집, 수상집, 신화 연구서.

그의 소설 가운데 기억에 각인될 만큼의 인상적인 작품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독자로서 나는 그의 작품이 대부분 일정한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설과 다르지 않게 본론을 감추지 않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그의 수필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에세이스트’라는 호칭에 머리를 주억거린 이유다.

 

그는 영어를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로 살아왔으면서도 ‘영어 공용어화 논쟁’에서 반대편에 섰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두 자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렇게 말한다.

 

“나는 영어 조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동한다. 그러나 영어 조기 교육이 민족어 교육에 지장이 될 정도로 강화되는 것에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는다. 영어가 판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주장은 부정하지 않지만, 민족어 교육에 앞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나 민족어가 사멸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민족어라는 것은, 언어문화 현장에서 효율이 떨어진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말을 완벽하게 익히기 위해 귀국하겠다는 딸의 생각에서 민족어의 뜨거운 생명을 본다. 모국어가 완벽한 실존적 습관이 되지 않는 한, 자신은 영원한 정신적 이방인을 면하지 못한 것이라는 딸의 생각을 나는 소중하게 길어 올린다.”

   - 어머니와 클레오파트라(<무지개와 프리즘>) 중에서

 

그는 진학을 위해 상경해서도 ‘사투리 콤플렉스’는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사투리를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여긴 사람이었다.

 

“긴 서울살이에도 나는 경상도 사람이었듯이 1991년부터 시작된 미국살이에도 나는 여전히 토종 한국인이다. 국지적 사투리 문화는 내 인생의 뒷심이 될지언정 장애물은 안 된다. 내게는 어머니 말고도 ‘어매’와 ‘어무이’라는 어휘가 더 있다.

 

‘어머니’로 대체될 수 없는 ‘어매’의 문화, ‘어무이’의 문화가 내게 있다. 숲 ‘짚(깊)은 데 ’토째비(도깨비) 사는 법. 텔레비전에 평준화시키는 문화, 정말 견딜 수 없이 경망스럽다.”

  - ‘어매’와 어머니(<무지개와 프리즘>) 중에서

 

지난 6월 77명의 각계 대표 인사들이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대통령의 답변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4대강에 대한 그의 생각도 자신의 삶처럼 꾸밈없고 투박한 촌놈의 그것을 닮았을 터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10. 8. 29. 낮달


위에 소개한 작가의 에세이 ‘어머니와 클레오파트라’(<무지개와 프리즘>)에서 말한 “우리말을 완벽하게 익히기 위해 귀국하겠다는”, “모국어가 완벽한 실존적 습관이 되지 않는 한, 자신은 영원한 정신적 이방인을 면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딸이 번역가 이다희 씨인 듯하다.

 

그렇게 야무진 ‘모국어 관’을 가졌던 딸은 선친에 못잖은 훌륭한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그 또한 갸륵한 일 아닌가. [관련 기사 : “유난히 팬 많던 아버지처럼 ‘능동적 번역가’ 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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