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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안동 소산리와 청음 김상헌

by 낮달2018 2020.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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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대신 청음 김상헌의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 청원루(淸遠樓).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붙인 당호다.

안동 인근의 마을과 고택, 그리고 곳곳에 자리한 정자와 절집을 더듬고 거기 관한 글을 써 온 지 두어 해쯤 되었다. 블로그를 처음 시작하면서였다. 그러다 우연히 그 글을 다듬고 기워 <오마이뉴스>에 보내고 기사로 실리면서 예의 글쓰기는 힘을 받았나 보다.

 

제대로 공을 들이고 내용을 채운 글은 기사로, 그보다 가볍고 부담 없이 쓴 글은 블로그에 올리곤 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 다닌 길은 물론 아니다. 나는 내가 사는 땅의 내력이나 뜻을 이해하는 일은 이 땅의 한 귀퉁이에 깃들여 사는 사람으로서의 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양반’은 화석이 된 전근대의 신분적 표지일 뿐

 

그런데 이 땅이 이른바 ‘양반의 고장’, 그것도 꼬장꼬장한 ‘안동 양반’의 땅이다. 어지간히 허술하다 싶은 마을이라도 들어가면 고색창연한 고택과 정자가 펼쳐지는 게 이 땅이다. 자연 내 발길은 인근의 이름 있는 마을, 고택, 정자 따위를 짚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여정을 어떤 벗은 ‘양반들 흔적이나 찾아다니는 일’이라며 마뜩잖아하는 듯한데, 정작 나는 내 발길의 의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양반’을 이미 화석이 된 전근대의 신분적 표지로만 이해한다. 나는 안동의 고택과 정자를 드나들며 만나는 양반들의 삶의 흔적, 그들 문화의 자취들을 그 시대이해의 한 방편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예의 벗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만약 그 시절의 무지렁이 백성들의 삶이 양반의 그것처럼 온전히 남아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자취를 만나러 길을 떠날 거야. 문제는 그게 양반들의 정자나 고택처럼 온전히 남아 있지 않다는 데 있을 뿐이지.

 

지난 7월 초, 아들 녀석과 다녀온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素山里)에는 유력한 두 갈래의 안동 김씨 문중이 있다. 이는 보학(譜學)에 맛을 들인 호사가들에게는 호재일지 모르지만 나는 거기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 마을에는 김방경(金方慶)의 후예와 김선평(金宣平)의 후예인 두 안동 김씨가 살고 있다. 김방경은 대몽항쟁의 주력인 삼별초를 진압하고 원의 일본정벌 때 고려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무장이다. 그는 ‘선김(先金)’ 혹은 ‘구김(舊金)’이라 불리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인 경주 김씨 계열의 안동 김씨의 중시조다.

 

조선 전기에 큰 세를 떨치던 ‘구 안동 김씨’는 인조 때 영의정 김자점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그 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 ‘구김’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김시민, 숙종 때의 시인 김득신, 독립운동가 백범(白凡) 등이 있다.

 

소산리의  ‘후김(後金), 척화파 김상헌의 청원루

 

왕건을 도와 이른바 ‘안동의 삼태사’로 불리는 김선평을 시조로 하는 또 다른 안동 김씨는 흔히 ‘후김(後金)’, ‘신김(新金)’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낸 문중으로 비유되는 이들은 조선 후기의 세도 가문이다.

 

신김은 조선조에 상용(尙容)·상헌(尙憲) 형제가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상헌의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와 이른바 벌열(閥閱)로 알려졌다.

 

이들 권문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 한말의 정치가 김옥균과 청산리 대첩의 주인공 김좌진도 이 후김의 후예들이다. 구한 말의 세도정치로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가문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이 나왔다는 점이 한편으로 흥미롭다.

 

염천에 소산리를 찾은 것은 순전히 이 ‘신김’의 번성을 이끌었다는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 선생 때문이다. 나는 병자호란(1636) 때, 척화파의 거두 청음이 보였던 비분강개가 흥미로웠다. 호란 때에 청음은 예조판서였고, 최명길(1586~1647)은 호조판서였다. 둘은 전혀 다른 방책을 각각 주장했다. 청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한 주전파였던 반면 최명길은 청나라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선 주화파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난국을 화의로 건지려 했던 최명길은 눈물을 뿌리며 항복문서를 썼고, 청음은 이를 찢어버린다.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청음의 일갈에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를 주워 맞추었다.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에 대해 쉬 시비를 가리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것은 명분은 명분대로 실리는 실리대로 한 시대를 넘어서고자 했던 대신들의 선택이었던 까닭이다. 청음은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낙향해 두문불출했고 최명길은 영의정이 되어 인질로 끌려간 척화 대신과 포로 석방을 교섭하는 등 난국을 수습했다.

 

주화파 최명길과 대립과 화해

 

나라의 위기 앞에서 갈라졌던 두 사람은 그러나 몇 해 후 청나라의 감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김상헌은 1639년, 청이 명을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으로 압송되었고 3년 후, 난후를 수습하던 최명길도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 그 관련자로 선양으로 끌려간 것이다.

 

청나라로 끌려갈 때 김상헌은 예순아홉의 노인이었다. 그때 그가 남긴 시조를 새긴 돌비가 소산리 입구에 서 있다.

▲ 소산리 입구의 시비 . 청음이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남긴 시조가 새겨져 있다.
▲ 청원루. 마당에 잡풀들이 눈에 거슬렸다 .

 

‘올 동 말 동 하다’고 노래한 것은 어떤 예감이 있었던 것일까. 청음이 심양에 억류된 기간은 무려 6년이었다. (자료에 따라서는 4년으로 기술한 데도 있다.) 선양에 끌려온 청음 등은 쇠사슬에 목을 묶인 채 심문을 당하는 등의 굴욕을 강요당했다. 소현세자는 최명길을 직접 심문하라는 청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선양의 감옥에서 주전·주화론의 두 대신은 만난다. 김상헌은 최명길의 늠름한 태도에 “공의 주화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비로소 알고 마음으로 탄복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1645년에야 소현세자와 함께 선양을 떠나니, 청음은 6년, 최명길은 3년 만의 귀국길이었다.

 

청나라는 그들이 풀려날 적에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해 절을 하라고 강요했다. 최명길은 서쪽을 향해 사배의 예를 올렸지만, 김상헌은 척화파답게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나의 마음은 고리같이 둥글어서 돌아갈 줄을 안다.”라고 했던 최명길은 외형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던가.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청음이 낙향해 지낸 청원루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청음은 소산리로 낙향해 은거하였다. 그는 원래 금산촌(金山村)이었던 마을의 이름은 사치스러운 느낌이 든다고 검박한 느낌의 소산리로 바꾸었다. 말하자면 소산리는 청음의 꼬장꼬장한 성격이 빚어낸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청원루(淸遠樓)는 청음이 선양에서 돌아온 뒤 풀려난 뒤 중건한 누각으로 ‘청나라를 멀리한다’라는 뜻으로 붙인 당호다. 원래 2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현재 앞면 7칸짜리의 건물만 남아 있다. 청원루는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로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잘 관리가 되지 않은 듯 군데군데 잡풀이 나 있는 마당에 덩그렇게 선 청원루는 다소 위압적으로 보인다. 왼편의 온돌방 앞에 검은 대리석에 예의 시조를 새긴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묵은 기와집과는 그리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 신김 종택. 조선 성종 때 양소당 김영수가 지었다. 김영수는 안동김씨 소산 입향조인 비안공 삼근의 손자다 .
▲ 양소당(養素堂). 안동 김씨 종택의 사랑채다 .
▲ 동야고택. 동야 김양근이 태어난 집이다 .
▲ 선김 종택 삼소재(三素齋). 삼소는 소산(素山)에 살며 깨끗한 행실을 하고 검소한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다 .
▲ 신김의 소산 입향조 비안공 김삼근의 옛집 돈소당(敦素堂). 보백당 김계행이 자란 곳이다 .
▲ 묵제 고택. 안동김씨 문중에서 여러 대에 걸쳐서 살아온 집이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더위가 턱까지 차오른다. 신 안동 김씨 종택인 양소당, 구 안동 김씨 종택인 삼소재, 비안공 김삼근의 구택인 돈소당, 동야고택 등을 차례로 둘러본다. 정작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고택은 묵제 고택이다.

▲ 묵제 고택의 행랑채 창문

돈소당 오른편에 자리한 이 집은 안동 김씨 문중에서 여러 대에 걸쳐서 살아왔지만 언제 누가 지었는지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 본채의 평면이 옛 가옥 형태에서 많이 나타나는 ‘H’ 자형이며, 그 앞에 ‘ㅡ’ 자형 행랑채가 놓여 ‘튼 입구(口) 자형’이다. 행랑채가 초가로 복원되어 있어, 묵제 고택은 인근의 날아갈 듯한 와가 속에서 금방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집의 내부는 흉물스러웠다.

 

마을 입구에 삼구정(三龜亭)이 있다. 조선 연산군 2년(1496년) 세워진 정자로 그 이름은 십장생 중의 하나인 거북이와 같이 생긴 세 개의 바위(고인돌로 추정)가 정자 뜰에 있어서 붙인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우물마루에는 마을의 촌로 대여섯 명이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 삼구정(三龜亭). 거북이처럼 생긴 세 개의 바위가 정자 뜰에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 삼구정이란 이름이 붙게 된 거북 형상의 바위.
▲ 삼구정의 우물마루. 촌로들이 쉬고 있다 .

청음은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 효종은 볼모로 살았던 선양에서의 굴욕을 잊지 않았고 북벌을 추진했다. 그런 시기였으니 불굴의 척화신 청음 김상헌이 추앙받은 것은 당연했다.

 

청음은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지만 정작 고향 인근에 그를 모신 서원은 없다. 그가 대부분 남인인 안동 유림이 서인-노론이 내세운 청음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까닭이다.(이 부분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사노라면’의 블로그를 참조 )

 

현재 휴전선 북쪽 개성에 있는 숭양서원은 정몽주와 서경덕을 추모하고자 창건한 문충당이 모태다. 1575년 사액 되면서 서원으로 승격했고, 1668년에는 청음이 여기 배향되었다. 안동 인근에 12개소 이상의 서원이 산재하지만, 이 고집불통의 숭명 배청(崇明排淸)주의자에 내줄 틈은 없었던 모양이다.

▲ 개성의 숭양서원. 청음 김상헌은 이 서원에 배향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색당파에 대한 이해가 중세 조선 사회를 이해하는 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에 관한 관심을 꺾는 것은 앞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소산리를 떠나면서 나는 마을 앞에 펼쳐진 풍산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소산리의 안동 김씨는 물론이거니와 인근 하회의 풍산 류씨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그 들에 바쳐진 사람들의 땀과 노동과 거기서 이루어진 생산물로 유지된 봉건체제를 새삼 떠올리면서.

 

 

2008. 8.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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