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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선돌, 구실 잃은 옛 ‘바위’들은 외롭다

by 낮달2018 2020.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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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와룡면의 ‘자웅석’과 ‘선돌’ 을 찾아서

▲ 35번 국도변의 불알 바위. 남근 형상의 이 바위는 건너편의 치마바위를 향해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

안동에 십 년 넘게 살아왔지만, 아직 안동에 대해선 모르는 게 더 많다. 이 경북 북부의 소도시가 드러내는 오늘의 모습을 살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서울의 2배가 넘는 땅덩이 곳곳에 숨은 이 땅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이다.

 

안동이 2006년부터 써 온 도시 브랜드 슬로건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다. 글쎄, 안동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구호는 다소 민망한 구호일 수도 있겠지만, 정작 외부인들에게는 좀 다르게 다가가는 모양이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는 국가 브랜드 선정위원회가 전국 기초·광역단체 246곳의 브랜드를 평가한 ‘2010 국가 브랜드 대상’에서 전통문화 브랜드 부문에서 대상을 차지했다니 말이다.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다?

 

나는 안동에서 살긴 하지만, 안동시가 특허 등록한 도시 브랜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에서 말하는 ‘정신문화’의 내용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 그건 아마도 안동이 유교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불리는 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 자웅석(雌雄石)은 다산과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녔다.

서울의 두 배가 넘는 넓이의 이 지방 소도시의 마을과 골짜기마다 들어찬 서원, 종택, 정자는 그 ‘원형’의 일부일 터이다. 그러나 안동에 그런 ‘샌님들만의 문화’만 있는 게 아니다. 선사 시대 이래 이 땅에 터 잡고 살아 온 이들의 흔적도 만만찮다. 와룡 서지리의 서낭당을 비롯하여 무려 서른두 개에 이르는 선돌은 이 도시의 내력과 역사를 은근히 드러내 주는 실마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선돌은 흔히 ‘길쭉한 자연석 또는 일부만을 가공한 기둥 모양의 돌을 땅 위에 하나 또는 몇 개를 똑바로 세워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 등으로 삼은 선사 시대의 거석기념물’로 정의된다. ‘입석(立石, menhir)’이라고도 불리는 선돌은 고인돌, 열석(列石)과 함께 대표적 거석문화의 하나다.

 

우리나라의 선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세우거나 극히 일부만을 다듬어 세운 것이 대부분이다. 드물게는 원래부터 있던 거석을 선돌로 삼는 예도 있다고 한다. 형태는 주로 둥글거나 모난 뿔 또는 기둥이다. 6m가 넘는 서산 입석동 선돌도 있지만, 대개는 높이 1∼2m짜리가 많다. ‘거석’이란 낱말이나 유럽의 거대한 선돌에 홀렸다가 우리 선돌을 보면 ‘애걔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유다.

 

선돌은 그 생김새 자체에서 드러나는 외형적 특질에서 비롯된, ‘신앙 또는 예배의 대상물’로서의 성격이 본질이다. 우뚝 솟은 선돌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외경감으로 다가갔을 수 있으리라. 예배, 기원의 대상으로서의 선돌의 성격은 원시사회에서 이루어진 정령숭배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선돌은 처음 세워진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의 기능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본다. 선사 시대의 사람들은 선돌을 통해 자연과 세계의 초자연적 힘에 대한 경배를 드러냈던 것일까. 선돌은 또 형태가 남자의 성기와 비슷해 ‘생식기숭배’ 같은 원시 신앙과 결부되기도 한다.

▲ 불알바위가 겨누고 있는 와야천 건너편의 치마바위.

근세에 이르러 선돌은 글자를 새기기도 하고 볏짚이나 새끼로 묶는 등 의인화, 신격화되면서 마을의 수호신, 기자암(祈子巖) 같은 역할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흐른 세월이 길다. 이 21세기에 더는 선돌은 숭배나 기원의 대상은 아니다. 어쩌다 ‘아들을 비는’ 사람들이 선돌의 돌조각을 긁어먹기도 했다지만 그것도 옛일이다.

 

불알바위와 치마바위, 다산과 풍요의 기원

 

선사 시대의 선돌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원과 숭배의 대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와 인지의 발달에 따라 선돌은 마을 공동체의 수호신이나 액막이, 이정표 역할 등을 맡으며 마을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선돌이 대부분 동네 입구에 서 있으면서 동네의 영역을 표시하는 기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생식과 출산의 상징이다.

선돌을 찾는 첫걸음을 와룡 쪽으로 든 것은 거기 유명한 자웅석(雌雄石)을 비롯하여 몇 기의 선돌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안동에서 청량산으로 가는 35번 국도변에 있는 자웅석은 속칭 ‘불알바위와 치마바위’로 이루어진 선사 시대의 거석문화(巨石文化) 유산으로 추정된다.

 

자웅석은 남자의 성기 형상을 한 불알바위와 넓게 펼쳐진 치마의 모양의 치마바위가 와야천(臥野川)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의 바위다. 불알바위는 불알 격인 두 개의 바위 받침돌 위에 남근에 해당하는 바위를 얹어놓은 형태다. 남근의 크기는 길이가 1.6m에 둘레가 3m나 된다.

 

이 남근은 국도 건너편 시내 너머의 ‘치마바위’를 비스듬하게 겨누고 있는데, 이는 사내가 마치 여인을 게슴츠레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모습에는 남근석과 여근석의 성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바위를 선사 시대의 다산신앙과 관련된 거석문화 유산이라고 보는 근거다.

 

남근석은 국도를 내면서 공사업체가 없애 버렸다가 지역 여론의 몰매를 맞고 복원한 것이니 원래의 원형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남녀의 성교를 유감(類感)함으로써 그것이 상징하는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건너편 산비탈에 얌전하게 선 치마바위를 향하여 거총하듯 치켜든 남근 형상의 바위를 세우며 선사 시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들은 어쩌면 풍작과 다산을 상상하는 기쁨으로 정신적 엑스터시 따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옛날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부자가 있었다. 이를 불쌍히 여기던 한 노파가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해 주었고 이 말을 들은 며느리가 바위에 정성을 드려서 아들을 얻었다. 그 후에 아들 못 낳는 여인들이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렸고, 아들을 낳게 해 준다고 해서 ‘아들바위’라고 불렀다…….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은 차라리 사족이다. 오히려 아들을 낳아도 약 10년 정도는 바위에 치성을 드리지 않으면 아이가 죽거나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금기가 주목된다. 이는 안동지방의 ‘삼신 신앙’과도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아기를 낳으면 첫이레·두이레·세이레 때 삼신상을 차릴 뿐만 아니라 10살이 되기 전까지는 생일날에도 삼신상을 차려준다.

 

삼신은 출산과 태아의 성장을 담당하는 신이다. 민간에서는 아이들 엉덩이의 몽고반이 ‘빨리 나가라’며 친 삼신 할멈의 손자국이라고 풀이할 만큼 익숙한 민속 신이다. 이 할멈 신은 성질이 좀 고약하다. 정작 아기의 출산을 맡은 신인데도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을 시샘한다. 아이가 예쁘거나 잘났다는 칭찬이 쏟아지면 아이를 도로 데려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경상도에서 아이를 보고 ‘예쁘다’라거나 ‘잘났다’라는 칭찬을 해선 안 된다. 굳이 하고 싶으면 ‘그놈, 밉상이네’가 고작이다. 이는 삼신의 질투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금기인 셈이다. 바위에다 10년 동안 치성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금기는 이 남근석에 부여된 지위가 삼신의 그것과 같다는 뜻이다.

▲ 탯골 논두렁에 뽕나무와 함께 서 있는 이 선돌은 높이 2.5m, 너비 0.75m 두께 0.27m의 화강암 바위다.

태리 선돌을 찾아 차를 돌렸다. 국도변에서 만난 농부는 아주 상세히 탯골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35번 국도를 버리고 동네로 빠지는 샛길로 들어 한참 달렸는데도 선돌이라고 볼 만한 돌 구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포장된 좁은 도로 오른편으로 모내기가 끝난 논이 파랗게 펼쳐진다.

 

‘수살막이’ 구실의 선돌, 이제는 한갓진 바위일 뿐

 

어디 물어볼 데도 없다. 안경을 끼고 살피자니 한참 웃자란 볏논의 논두렁에 선 전봇대와 나무 옆에 허옇게 보이는 게 돌인 것 같다. 발목까지 차는 풀을 헤치며 다가가자 왼쪽으로 10도쯤 기운 모습으로 태리 선돌이 호사가를 맞이한다.

▲ 선돌은 이제 한갓진 돌덩이에 불과하다.

태리 선돌은 높이 2.5m, 너비 0.75m 두께 0.27m의 화강암 바위다. 자연석을 평평하게 가공한 것으로 아래는 넓고 위로 올라가며 좁아지는 형태이다. 뒷면에 4개, 옆면에 1개의 성혈(性穴)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비전문가의 눈에는 그게 그거인 얼마간 ‘파인 자국’일 뿐이다.

 

저 멀리 일하고 있는 농부 두엇이 보였다. 소리 높여 이게 선돌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심드렁하게 돌아온다. 아득한 한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힘의 상징으로 숭배의 대상이었던 이 선돌은 더는 아무것도 아닌 한갓진 돌덩이에 불과한 것이다.

 

선돌은 꽤 가지를 뻗은 뽕나무와 함께 서 있다. 그 아래 생뚱맞게 서 있는 전봇대는 이 산골 마을에 이른 근대의 상징이다. 뽕나무에는 이제 막 빨갛게 익어가거나 까맣게 익은 오디가 한창이다. 돌아 나와서 바라보니 선돌이 저 혼자 서 있는 것보다 뽕나무와 의좋게 선 모습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차를 끌고 가구리로 향한다. 와룡면사무소 못미처 오른쪽으로 드는 샛길을 2, 3분쯤 달리면 가구리 마을 입구 야산 중턱에 서 있는 가구리 선돌을 만날 수 있다. 이 청동기 시대의 유적도 우람한 남근 모양을 하고 있다. 선돌의 ‘선’의 뜻이 분명하게 짚이는 바위다.

 

선돌은 마을 어귀의 개울(가구천) 너머 비스듬한 산비탈 감자밭에 서 있다. 안동 지역의 선돌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높이 3m, 너비 0.66m, 두께 0.45m이다. 측면에 이중의 원으로 된 성혈(性血) 한 개가 있다고 하는데 정작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가구리 선돌은 ‘수살막이’ 역할을 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수살막이’란 장승의 다른 이름인데, ‘수살’은 보통 ‘水殺’로 푸니 여기엔 가구 천(川)으로 들어오는 악귀를 쫓고 막는다는 신앙적인 관념이 깃들어 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 마을이 ‘배 모양’[선주형(船舟形)]이기 때문에 마을 어귀에 돛 구실을 하도록 이 선돌을 세웠다고 한다.

▲ 가구리 선돌은 높이 3m, 너비 0.66m, 두께 0.45m로 안동 지역의 선돌 중 가장 규모가 크다.
▲ 가구리 선돌은 마을 어귀에서 '수구(水口)막이' 구실을 했다.

이와 관련해서 이 마을에선 우물도 깊이 뚫지 못했다고 한다. 지나치게 깊이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나서 가라앉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원래 눕혀져 있던 것을 바로 세웠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장수가 갖고 가다가 무거워서 그냥 놓고 갔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선돌의 크기는 선돌이 가진 생산력과 어떤 관계일까. 가구리 사람들은 약 3, 4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바위 앞에 금줄을 치고 마을 제의를 지냈다고 하나 지금은 흘러간 옛이야기일 뿐이다. 인공위성을 쏘아대는 이 잘난 21세기에 초자연에 대한 경배 따위는 잊어도 좋은 여담일 뿐이다.

 

비닐을 걷어낸 하우스의 철제 골조 옆 감자밭에 쓸쓸하게 서 있는 선돌 위로 유월의 햇볕이 따갑다. 선돌 앞에서 바라보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이제 더는 이 개울을 거쳐 들 ‘수살’도 없을 것이니, 그걸 막을 ‘수살막이’도 한갓진 민속에 그칠 뿐이다. 선돌을 찾으며 만났던 주변 사람들이 선돌의 위치조차 모르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가구리를 떠나면서 일별해 본 선돌이 유독 외로워 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터이다.

 

2010. 7. 10. 낮달

 

 

선돌, 구실 잃은 옛 '바위'들은 외롭다

안동 와룡면의 '자웅석'과 '선돌' 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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