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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산동네의 봄

by 낮달2018 2021. 4. 5.

▲ 태화동 산비탈에 자리 잡은 말구리 5길 25번지. 주인이 떠난 빈집 앞에도 어김없이 봄이 당도하였다.
▲ 어느 집 창 밖에 명자꽃이 꽃망울을 맺고 있다.

안동시 태화동 ‘말구리길’은 안동에서 가장 먼저 봄이 오는 곳이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내 생각일 뿐이다. 몇 해 전, 말구리재에 이어진 야산을 거닐다가 그해 처음으로 생강나무꽃과 매화를 만난 곳이 말구리길이기 때문이다.

 

말구리길은 태화동에서 송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말구리재’ 이쪽의 야산 아랫동네를 일컫는다. 말구리길은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지번 위주의 주소체계를 도로이름과 건물번호를 부여하여 관리하는 새로운 주소체계를 따라 붙인 이름이다.

 

‘말구리’라는 지명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다른 데는 어떤지 모르지만 태화동 말구리는 ‘말이 굴렀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말’에 ‘구르다’는 동사의 어간(‘구르-’)에 명사를 만들어주는 접사 ‘-이’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이 ‘말구리’가 된 듯하다.

 

후삼국 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경상도를 두고 다투었던 역사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른바 ‘고창(古昌, 안동의 옛 이름)전투’다. 고려는 후백제와 겨루기 위해 신라와 친선관계가 필요했고,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경상도 일대를 공격했다.

 

공산(公山, 팔공산)과 의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백제는 여세를 몰아 930년(태조 13년) 고창군을 포위·공격했다. 이에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군 병산(甁山, 지금의 와룡)으로 진격했다. 격전을 거듭한 끝에 그는 지방호족의 지지를 받아 후백제군 8천 명을 섬멸하고 승리를 거뒀다. 이 고창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왕건은 경상도 지역에서 견훤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

 

이 고창전투 가운데 지금의 송현동 네거리쯤에서도 격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싸움에 밀려 쫓기던 견훤이 말에서 굴러떨어진 고개가 바로 말구리재다. 이 고개 서쪽에 성창아파트와 안동공업고등학교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송현동이 시작된다.

 

봄이되, 아직 봄은 멀다

 

야산 이쪽의 아직도 경작하고 있는 밭 주변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퇴락한 축사 건물 등으로 어지럽다. 안동공고가 내려다보이는 야산 이쪽 비탈에도 허술한 집들이 듬성듬성 들어차 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살림살이는 알 수 없다.

 

나는 해마다 이 야산을 오르면서 봄을 맞이하곤 한다. 지난해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듯한데, 야산으로 오르는 길옆의 오래된 집들은 텅 비어 있다. 집 대문 기둥에 붙은 문패도 오래되었고, 붙은 주소도 묵은 형식이다.

 

활짝 핀 매화 가지 너머로 보이는 말구리길 25번지도 쓸쓸하다. 왼쪽 기둥에 붉은 페인트로 써 놓은 번호들은 철거업체들이 써 놓은 것일까. 주인 없는 빈집은 을씨년스럽고, 거기 쏟아지는 하오의 햇살도 외롭다. 버려진 밭에 드문드문 자라 있는 쑥과 풀이 이미 이 산동네에 당도한 봄을 알려준다.

 

매화는 상기도 마저 피지 못했다. 활짝 핀 놈보다 피지 못한 놈이 더 많다. 주인이 버리고 떠난 빈집 주변 울타리에 개나리도 아직 피다 말았다. 매화나무 앞에서 내려다보면 펼쳐지는 슬레이트 지붕 위로 봄의 대기가 희미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봄이 온다고 해도 다 봄은 아니다. 춘래불사춘의 글귀가 올해는 한결 새삼스럽다. 서해의 심해에 가라앉은 함정에 누운 젊음들과 백혈병으로 숨진 스물셋 처녀의 쉬 떠나지 못하는 영혼과 그 무게가 시방 오는 봄을 슬픔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붉은 벽돌 위에 조그맣게 핀 개나리의 날렵한 자태를 바라보며 이 거칠고 메마른 시대의 희망을 생각해 본다.

 

▲ 말구리 5길의 빈집들. 그러나 이 황량한 산동네에도 봄은 왔다.
▲ 산 아래 동네는 말구리 1길이다. 새로운 형식의 주소 표지가 선명하게 붙어 있다.
▲ 춘래불사춘, 이 거칠고 메마른 시대의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2010. 4.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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