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조인하다

by 낮달2018 2023. 7. 9.
728x90

[역사 공부 ‘오늘’] 1966년 7월 9일,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조인

▲ 1966년 7월 9일, 미군의 주둔에 필요한 세부절차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미 SOFA 가 조인되었다.

1966년 오늘(7월 9일), 대한민국 외무부 장관과 미합중국 국무장관 간에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미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약칭 ‘한미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이 조인되었다.

 

이 협정은 같은 해 10월 14일 국회의 비준 절차를 거쳐 1967년 2월 9일 발효되었다. 그간, 이 협정은 ‘한미행정협정’이라고 통칭하였지만, ‘행정협정’은 국회에서 정식으로 비준되지 않은 약식 조약을 지칭하므로 부적절하다는 지적에 따라 최근엔 ‘한미 SOFA’나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라고 쓴다.

 

1966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조인

 

미합중국 군대의 주둔에 필요한 시설과 구역의 제공, 반환, 경비·유지를 주 내용으로 하는 이 협정의 연원은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 안녕에 관한 행정협정’(1948. 8. 24)이다. 이 협정은 미 군정을 거쳐 정부가 수립되면서 체결되었다.

 

주한 미군의 지위에 관한 최초의 협정이었던 이 행정협정은 한국 정부가 미군의 기지 및 시설 사용권은 물론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지극히 불평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1949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종료되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에 따른 미군의 진주로 다시 ‘주둔군지위협정’이 요구되면서 1950년 7월 12일, 미군에게 모든 재판권을 부여하는 ‘주한 미군의 형사 재판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협정’(대전협정)이 체결되었다. 1952년 5월 24일에는 한국의 미군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마이어 협정)도 체결되었다.

 

한미 소파(아래 소파)는 한국전쟁 후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철수하지 않고 계속 주둔하게 된 주한 미군의 지위를 규정하는 새로운 협정이었다. 그러나 이 협정은 협상 과정만 13년(53년~66년)이 걸렸을 뿐이지, 그 내용에서는 대전협정(1950)이나 별다른 점이 없었다.

 

미군은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통하여 정부 수립 이전의 과도기 한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일시적으로 철수했던 미군은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군은 패퇴하던 한국을 도와 북한군을 휴전선 북쪽으로 밀어냄으로써 ‘자유 대한을 지켜준 군대’로 남았다.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미군과 군속(軍屬)에 의한 범죄도 끊이지 않아 소파가 발효된 첫해에만 해도 연간 2천 건 가까운 미군 범죄가 발생했다. 그러나 소파가 발효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미군 범죄에 대해 어떤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 1992년 10월, 윤금이 씨 살해사건이 발생, 살인 미군 처벌과 불평등한 소파 개정의 목소리가 커졌다.

소파가 체결되었어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미군이 ‘공무 중 사건’이라고 주장하면 재판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등 전체 발생 범죄에 대한 재판권 행사율이 0.5%에 불과했고 중대 범죄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재판권 행사율이 1%에 이르게 된 때가 1991년이었으니 실제로 미군 범죄는 방치되고 있었다.

 

미군 범죄 재판권 행사율 0.5%

 

제1차 소파 개정은 80년대에 미군의 각종 범죄행위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1988년 12월부터 협상이 시작돼 2년여 만인 1989년 2월 1일에 발효되었다. 1차 개정은 제22조 형사 관할권 중 한국의 형사 재판권 자동 포기 조항의 삭제, 제1차적 재판권 대상 범죄의 확대 등 부분적인 진전이 있었지만 실제 한국측의 권리 행사를 제한하는 조항은 그대로였다.

 

소파가 체결되어 있어도 미군 범죄에 대한 수사기관과 사법당국의 무력한 대응으로 수사와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군 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 환기된 것은 1992년 10월, 윤금이 씨 살해 사건이 발생하면서였다.

 

윤씨의 참혹한 죽음이 알려지면서 살인 미군 처벌과 불평등한 소파 개정의 목소리가 커져 갔고, 시민들은 주한미군 범죄근절운동본부를 구성하여 상설 미군 범죄 신고센터를 설립하고 불평등한 소파의 문제점을 알리는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에 이루어진 소파 2차 개정은 과거보다 다소간 나아지긴 했다. 2차 개정에서는 12개 중요 범죄 유형(살인, 강간, 유괴, 방화 등)에 대하여, 피의자의 신병 인도 시기를 현행의 ‘재판 종결 후’에서 ‘기소 시’로 변경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형사 재판권 행사를 원활하게 했다.

또, 살인 또는 죄질이 나쁜(egregious) 강간을 저지른 미군 피의자를 한국 측이 체포하였을 경우, 일정한 요건 아래 당해 피의자를 미군에 신병을 인도하지 않고 계속 구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대상 범죄의 유형을 12개로 한정한 점과 기소 시 구금과 계속 구금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까다로운 전제조건이 붙어 있어 한국의 수사와 재판 권한의 제약은 여전하다. 한미 소파가 불평등 조약으로 우리 법질서에 저촉되는, 주한 미군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하는 제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소파, 미군의 특권적 지위 보장 제도

 

주한 미군뿐만 아니라 미군들의 가족, 미 군속과 그들의 가족들도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한미 소파의 적용을 받는다. 유명한 이태원 조중필 씨 살인사건의 범인인 패터슨은 미 군속(군무원)의 가족이었고,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의 알버트 맥팔랜드도 군무원이었다.

 

한미 소파에도 불구하고 미군 범죄에 대한 단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공무 집행 중에 일어난 범죄에 대해서는 미군이 재판권을 행사할 제1차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제22조 3항)라는 조항 때문이다.

 

‘공무 집행’은 이른바 ‘전가의 보도’ 조항이다. 왜냐하면 ‘공무’의 개념에 대한 합리적 판단기준이 없어 미군 당국은 자국 병사의 보호를 위해 공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공무의 증명도 미군이 발행하는 서류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한미 소파가 다시 뜨거운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02년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효순이 미선이) 압사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였다. 이 사건으로 여론이 들끓자, 우리 정부는 소파 체결 이후 최초로 미군 측에 1차적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다. [관련 글 : 두 소녀의 희생으로 드러난 불평등 한미관계]

 

그러나 미군 측은 “지금까지 미국은 세계 어디에서고 공무 중 사건에 대한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예가 없다”라며 이를 거부했다. 범죄 발생 시 미군 당국의 재판권 포기 요청에 대해 90% 이상을 포기해 온 한국 정부와 견주어지는 대목이다. 1990년부터 2001년까지 미군 범죄에 대한 한국의 재판권 행사율이 평균 3.2%에 불과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효순·미순 15년, 한 자도 못 바꾼 소파

 

한국 측의 재판권 포기 요청을 거부한 미군 당국은 기소된 병사를 군사 법정에 세웠고, 배심원단은 2명의 가해 병사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무죄 평결이 있은 지 5일 만에 이들은 짤막한 사죄 성명을 발표한 뒤 유유히 한국을 떠나갈 수 있었다.

 

미군 측은 분노한 한국 여론을 달래기 위해 부시 대통령이 주한 미 대사를 통해 간접적인 사과를 하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다시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불평등한 한미 소파의 전면 개정을 요구하며 전국에 들불처럼 번진 국민의 촛불시위에도 불구하고 15년이 넘도록 아직 소파 조항의 한 획도 바꾸지 못하고 있다.

 

한미 소파는 우리의 주권과 자주권에 관련된 사안이다.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혈맹’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그 속내는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군 범죄를 단죄하는 한국법은 미군 부대 앞에서 멈추고 있는 형국이다.

 

나토(NATO)협정과 런던협정, 미일 협정 등은 상대국이 그러한 권리 포기가 특히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1차적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할 수 있고, 1차적 권리를 가지는 국가는 호의적 고려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언제쯤 한미 소파가 현재의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나토협정처럼, 혹은 그에 근접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평등한 주둔군지위협정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역사는 그러한 권리가 한 번도 그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2017. 7. 8. 낮달

 

*참고

· <위키백과>

· 주한미군 범죄 근절운동본부 자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