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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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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와 ‘틀리다’의 혼동과 ‘직접 인용’ 추세

by 낮달2018 2020.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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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르다’와 ‘틀리다’의 혼동

‘다르다’와 ‘틀리다’를 섞어서 쓰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낱말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 ‘다르다’가 차이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틀리다’는 ‘맞지 않다’, 즉 어떤 사실과 어긋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다르다’를 쓸 자리에 ‘틀리다’를 쓰고 있다. ‘다르다’는 ‘같다’와, ‘틀리다’는 ‘맞다’와 반의 관계에 있다. ‘다르다’는 형용사지만, ‘틀리다’는 ‘틀린다’, ‘틀리는’, ‘틀린’처럼 활용하는 동사이다.

 

“이주 노동자는 우리와 피부가 ‘틀리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런 현상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현상은 지금 바야흐로 남하 중이다. 충청권이 그렇고 강원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직 이 현상은 충청과 강원도 어름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지만, 경북 북부지방인 안동에선 난 아직 그런 현상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두 낱말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틀리다’는 ‘가치 판단’이 아니냐고 아이들은 되묻는 것이다.

 

왜 이 두 낱말의 의미가 헛갈리기 시작했을까. 세태 탓이라고 하면 마음이 씁쓸해진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단일 민족설’이 민족적 정체성의 표지였던 시절이 너무 오래였던가. 인근 종합병원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중 열에 서너 명이 결혼 이주자에게서 태어나는 다문화 시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의식은 단일민족의 신화에 머물러 있다.

 

단일민족의 신화란 허상일 뿐, 그 의식 속에 억압과 차별과 불관용이 숨어 있다는 건 이제 정설이다. ‘다름’을 ‘틀림’으로 이해하는 이 잘못된 언어 관습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다문화 시대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 뭐, 뜻만 통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도구로서의 언어가 오히려 그 내용을 규정하는 오류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허투루 볼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직접 인용’이 넘친다

…“미국의 검역시스템의 선의를 믿자”라고 얘기하는 것은 “솔직한 태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핸드폰 팔아먹을 때, 또 자동차 몇 대 팔아먹을 때 “불리함이 있다”라는 얘기잖아요.

 

지난주 MBC 100분 토론에 패널로 출연한 대학교수의 발언이다. 정연한 논리와 핵심을 짚는 논객으로 이름난 이 경제학자는 직접 인용의 말하기가 몸에 밴 것처럼 보였다. 직접 인용이란 남의 말을 인용할 때 따옴표로 써서 인용하는 말을 자신의 말과 구분하는 형식이다.

 

반대로 ‘간접 인용’은 따옴표 없이 인용하는 내용을 내 말속에 녹여서 쓰는 방식이다. 물론 따옴표의 사용 여부가 인용의 방식을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다. 직접과 간접을 가르는 기준은 ‘원문을 그대로 옮기느냐’의 여부이다.

 

(1) 파스칼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했다. (직접 인용)
그는 “나는 바보였어.”라고 말했다.

(2) 파스칼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했다. (간접 인용)
그는 자신이 바보였다고 말했다.

 

위에서 보듯 '-라고'는 직접 인용문에 쓰는 조사이고, '-고'는 간접 인용문에 쓰는 조사다. 당연히 간접 인용을 할 때는 ‘-고’를 써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은 직접 인용의 형식으로 말하기 시작한 듯하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다.

 

위에서 예로 든 대학 교수의 발언은

 

…미국의 검역시스템의 선의를 믿자고 얘기하는 것은 솔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핸드폰 팔아먹을 때, 또 자동차 몇 대 팔아먹을 때 불리함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결국 핸드폰 팔아먹을 때, 또 자동차 몇 대 팔아먹을 때 불리하다는 얘기잖아요.

 

정도의 뜻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러한 무분별한 직접 인용 형식의 말하기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손쉬운 간접 인용 대신 복잡한 직접 인용의 말하기를 선호하게 되었을까.

 

언어 사용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이 이른바 ‘언어 경제’, 즉 말을 하는 데 들이는 노력을 줄이는 것이다. 한자어에서나 가능했던 줄여 쓰기를 한글에서도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한 지도 꽤 됐다. 아마 ‘노찾사’가 그 효시일지도 모르겠다.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다현사’(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는 고전이다.

 

요즘은 책이나 드라마·영화의 제목이 아닌 일반 문장도 줄여 쓴다. ‘즐쳐 드삼’이나 ‘즐감’, ‘열공’ 따위는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줄여 쓰기의 예다. 이런 추세에 비추면 사람들이 대화에서 굳이 직접 인용이라는 방식을 고집하게 된 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는 자신의 의견과 인용하는 내용을 엄격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현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엇길로 든 우리말을 바라보는 마음은 개운하지 않다.

 

 

2008. 6.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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