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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0 텃밭일기 ①] 다시 텃밭에서

by 낮달2018 2020.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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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또 텃밭을 얻었다

▲ 올해는 집 가까이에 텃밭을 얻었다. 퇴비 포대 앞의 두 이랑이 내 텃밭이다.

새로 텃밭을 얻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쯤, 거리로 치면 1km 안팎에 있는 밭이다. 말구리재 근처의 안동공고 운동장과 이어진 이 언덕배기에 있는 밭은 일종의 주말농장이다. 그동안 주로 안동공고 교사들이 분양받아 푸성귀나 고구마를 갈아 먹었던 밭이다.

 

집 가까이 있는데도 나는 정작 이 주말농장을 몰랐었다. 이 농장의 존재를 알게 된 지난해, 나는 공고에 근무하는 선배 교사께 내년에는 두세 이랑쯤 텃밭을 분양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었다. 두 이랑이 맞을지 세 이랑쯤이 나을지는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 밭을 규모를 몰랐기 때문이다.

 

한 일주일 전쯤에 나는 선배로부터 두 이랑을 받아 놓았다, 푯말을 세워두었으니 밭에 가서 확인해 보라는 전갈을 받았다. 나는 이내 밭에 들러서 내 몫으로 구획된 두 이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그때, 밭 위의 야산에서 찍은 것이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은 땅이라서 보기에도 밭은 기름져 보였다.

▲ 야산 위에서 내려다본 우리 텃밭. 기름지고 잘 가꾸어진 땅이다.
▲ 잘 구획된 이랑마다 경작자의 이름이 쓰인 팻말이 서 있다.
▲ 내 텃밭은 시뻐 보이지만 이 농사도 내겐 버겁다.

밭은 약 천여 평에 이른다는데 내 보기에는 그보다는 좀 작지 않나 싶다. 밭둑에는 두 이랑부터 서너 이랑까지 일목요연하게 구획하여 경작자의 이름을 써 놓은 푯말이 꽂혀 있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썼던 아주 정겨운 글씨체로. 거기서 내 이름자를 발견하는 것도 새로운 감흥이었다.

 

일찌감치 농사를 시작한 이들의 두둑엔 검은 비닐이 얌전하게 씌워져 있었고, 내외인 듯한 남녀가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농군도 각양각색인 법이다. 훨씬 바지런한 농군의 두둑엔 상추가 참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밭의 태반은 주인이 갈아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지난 토요일 오후에 나는 아내와 함께 농협 영농지원센터에 가서 몇 가지 농기구를 샀다. 삽과 호미, 튼튼한 모종삽을 한 자루씩, 퇴비 두 포대를 사면서 아내는 카드로 대금을 결제했다. 아주 편리한 시대이긴 하다. 그러나 대장간에서 잘 벼린 호미를 사면서 이 정보화시대의 총아인 신용카드를 쓰는 건 어쩐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부조화’ 같았다.

 

닭똥이 주성분인 퇴비는 냄새가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트렁크에 퇴비를 싣고 바로 밭으로 갔다. 퇴비를 내려놓고 밭둑에 서 있는데, 후덕한 인상의 밭 주인이 나타났다. 그가 건네준 괭이로 나는 두둑 가운데에다 골을 타고 거기다 퇴비를 고루 뿌렸다. 허리춤에 퇴비 포대를 끼고 제법 긴 이랑을 오가는데 숨이 가빴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얼치기 농사꾼 주제란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비닐은 며칠 있다가 덮으소. 바로 덮으면 가스가 찰 수도 있으니께.”

“비닐은 우리가 사야 합니까?”

“비닐은 여기 있는 걸 쓰면 돼요.”

 

밭 저편 공고의 콘크리트 담장에 잇대어 놓은 컨테이너를 가리켰다. 그게 아마 밭 주인이 한 번씩 밭에 나올 때마다 쓰는 농막인 듯했다. 연장을 거기 맡기려다가 늘 열어놓는 게 아니래서 우리는 연장을 챙겨올 수밖에 없었다.

 

이랑이 4, 50m는 좋이 될 만한 길이여서 우리는 거기 무엇을 심을 것인가를 의논해야 했다. 고추와 가지는 기본이고, 상추를 좀 심자, 그리고 남는 땅에는 고구마를 갈자. 그게 우리의 올 ‘영농계획’이 되었다. 딸애는 ‘파프리카’를 심으라고 요구했다. 좋다, 그건 언제든지 우리가 결정하는 거니까.

▲ 밭 주변 풍경. 왼쪽 야산 너머에 우리 아파트가 있다.
▲ 밭 주변 풍경. 오른편 구릉을 넘으면 안동의 신시가지가 나타난다.

올 농사는 우리 부부에겐 세 번째다. 2004년 학교 귀퉁이의 텃밭에다 고추와 가지를 심은 게 첫 농사였다. [관련 글 : 초농기(初農記), 첫 농사의 기록] 땅이 척박했고, 여름내 바랭이 등 끔찍한 잡풀과 싸워야 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때 수확한 빨간빛 고운 고춧가루의 기억은 지금도 아내를 뭉클하게 한다고 했다.

 

2008년에 안동댐 쪽의 밭 한 귀퉁이를 얻어서 지었던 두 번째 농사도 땅이 척박하기는 매일반이었다. 풀도 무시로 돋아났고 밭이 집에서 꽤 멀었다. 한 마디로 마땅찮은 텃밭이었다. 그래도 거기서 따 먹은 풋고추와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했다. 거기서도 역시 두어 근의 고춧가루를 얻었다. [관련 글 : 수확, 그리고 파농(罷農)]

 

아, 빼 먹은 게 있다. 2007년, 지금의 학교로 옮기면서 교실 앞 베란다에서 벌였던 ‘우리 반 고추 농사’다. 애당초에는 아이들과 함께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론 농사는 내 몫이었다. 간간이 풋고추를 따 먹고, 생육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 경과를 기록하는 기쁨이 적지 않은 시간이었다. [관련 글 : 장하다, 고추야]

 

예전의 기록들을 돌아다보는데 공연히 새로운 ‘뽐뿌’를 강력하게 의식한다. 아직 때는 늦지 않았으니, 올해도 학교 베란다에서 고추를 몇 포기 길러 볼까 하는. 올해는 그때보단 더 잘, 그리고 더 슬기롭게 고추를 기를 수 있지는 않을까……. 그게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 ‘뽐뿌’를 며칠간 더 앓아야 할 것 같다.

 

예정대로라면 오늘이 ‘그날’이다. 아내와 나는 오후에 우리 밭에다 비닐을 덮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오 무렵부터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가끔 창밖을 내다보는데 적은 양이지만 비는 쉬 그치지 않는다. 습관처럼 우리는 올봄의 고르지 않은 날씨를 입에 올린다.

 

밭에 나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일조량과 낮은 기온 때문에 제대로 자라고 있지 않은 농작물, 농민들의 근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다. 시골에 계신 장모님의 비닐하우스 고추 농사를 생각하며 아내와 나는 창밖을 망연히 내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2010. 4. 2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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