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텃밭에 들렀다. 부지런한 농군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밭에 미리 나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이랑에 비닐을 덮어준 선배다. 그도 일찌감치 밭을 둘러보러 나온 것이다. 빠진 데 없이 잘 가꾸어진 밭은 빗속에서도 시퍼렇게 살아난 작물들의 풀빛으로 한껏 그윽해 보였다.
며칠 만인가. 한 일주일가량 못 본 사이에 밭은 무성해졌다. 감자와 고추, 상추와 쑥갓, 콩과 고구마, 토마토와 열무 따위의 작물들이 뿜어내는 생기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우리 텃밭 머리에 선배가 뿌려준 상추와 쑥갓이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아내와 나는 감격의 탄성을 내질렀다.
솎아 주어야 할 만큼 잘 자란 상추와 쑥갓 앞에서 우리는 행복했다. 고추와 가지는 이제 제법 늠름하게 자리 잡았다. 말라죽은 것처럼 보이던 고구마의 순도 조금씩 싹을 내미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흙과 햇볕, 바람과 비가 내려준 이 땅의 축복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상추 가져가서 비벼 먹어보우. 큰 양푼 같은 데다 넣고 밥하고 된장을 퍼부어 먹으면 제맛이지.”
상추를 솎는 아내 옆에서 선배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작정이다. 아직 보드라운 상추 새잎에 된장을 퍼부어 숨을 죽이고 거기 밥그릇을 엎는다. 고추장을 듬뿍 넣어서 비비면 어떤 비빔밥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막힌 맛이 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저도 몰래 침을 삼켰다.
저녁상에 여린 햇상추와 된장이 올랐다. 아내가 담근 빛깔 고운 고추장도 함께였다. 방금 끓인 된장을 놓아 우선 상추의 숨을 죽인다. 그리고 그 위에 보리밥 대신 현미밥을 한 공기 조금 못 되게 얹는다. 그리고 고추장을 듬뿍 퍼서 그 위에 올린다. 이제 남은 것은 골고루 비비는 일이다.
된장과 고추장, 그리고 밥이 어우러진 데다 숟가락으로 여러 번 치대어서 부드러워진 이 햇상추 비빔밥의 맛은 따로 설명을 ‘절(絶)’한다. 나는 가볍게 한 그릇을 비웠다.
그러나 아쉬울 때 숟가락을 놓는 것도 저 자연의 가르침에 걸맞은 일이다. 태평성대를 이르는 오래된 수사법은 ‘함포고복(含哺鼓腹)’을 노래하지만, 이 ‘함포’는 ‘정신적 배부름’일 뿐 식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한때는 맛이 아니라 ‘추억’이라는 심리적 이유로 우리는 옛날식 밥과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 절대빈곤의 시대에 우리 입맛을 길들였던 푸성귀나 보리밥 따위가 갖는 원형적인 미감(味感)은 분명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에 길 든 요즘 세대에게는 그것을 알아낼 미각이 존재하지 않겠지만.
말끝마다 ‘웰빙(well-being)’을 강조하는 시대지만 정작 그 웰빙이 채식과 자연식품에서 출발한다는 단순한 진실에 대한 이해는 짧다. 사람들은 웰빙을 ‘유기농’, ‘친환경’ 농산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값비싼 식생활’과 연결 짓는 데 더 익숙한 것이다.
우리 텃밭의 이웃들이 두세 이랑씩 작은 농사짓기에 나선 것은 스스로 짓는 농사를 통해서 생명의 본뜻을 깨닫고자 함일 터이다. 동시에 스스로 지은 농작물을 밥상에 올리는 소박한 기쁨을 위해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몇 평의 땅과 그 땅이 스스로 창조하는 열매는 저 자신뿐 아니라 자투리 시간이나마 거기 동참하는 인간들을 성장케 해 주기도 하는 것이다.
2010. 5.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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