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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0 텃밭일기 ②] 파종 이후

by 낮달2018 2020.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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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 두 이랑이 우리 텃밭이다. 맨 앞에는 이웃에서 상추와 쑥갓 씨를 뿌려주어서 어린싹이 올라오고 있다.

텃밭에 퇴비를 뿌리고 난 뒤 이내 비닐을 덮으려고 했는데 차일피일했다. 비가 오거나, 다른 일이 겹쳐서 시간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깐 둘러본다고 들렀더니 우리 몫의 두 이랑에 얌전히 비닐이 덮여 있었다.

 

아뿔싸, 한발 늦었다. 밭 옆 학교에 근무하는 선배께서 당신네 일을 하면서 덮어 주신 것이다. 일을 덜어 고맙긴 하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다. 따로 공치사하는 대신에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제 때에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치기는 어디서나 표가 나는 법이다.

 

어린이날에 미리 처가에 들렀다 오는 길에 장모님으로부터 고추, 가지, 들깨, 땅콩 등의 모종을 얻어왔다. 돌아와 바로 옷을 갈아입고 밭에 나갔더니 선배와 동료 교사 한 분이 고구마를 심고 있었다. 뒤늦은 공치사는 거기서 했다. 여러 해 거기서 텃밭을 가꾼 분이라, 선배는 밭에 대해서 아는 게 많다.

 

지난번 일기에서 나는 ‘잘 가꾸어진 기름진 밭’이라고 했는데 이 땅에서 여러 해 농사를 지은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흙이 부드럽다고 해 다 좋은 땅은 아니지. 문제는 땅심[지력(地力)]인데, 여기는 하도 연달아 지어 먹어서 땅심이 다한 거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는 전체 이랑의 반쯤 되는 데까지 고추를 심었다. 내가 먹을 ‘청양’을 대여섯 포기, 나머지는 모두 장모님께서 권한 일반 고추를 심었다. 그리고 가지 서너 포기. 그것만 해도 여름 내내 나는 가지나물과 가지 챗국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땅콩을 심으려니까 선배가 말린다. 아마, 나중에 짐승들 좋은 일 한 셈밖에 안 될 거야. 일단 남은 부분에는 고구마를 심기로 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주말 아내는 시장에서 고구마 모종과 딸애가 주문한 파프리카 모종을 사 놓았다.

 

오후 다섯 시쯤에 우리는 밭을 다시 찾았다. 며칠 동안 자란 고추와 가지 모종은 다소곳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말을 알아듣는다면 기특하다고 듬뿍 칭찬해 주고 싶을 만큼. 우리는 남은 땅에 고구마와 파프리카 모종을 심는 작업을 한 시간가량 했다.

 

좀 억세다 싶은 고구마 줄기를 심어 놓고도 어쩐지 마음이 미덥지 않다. 물을 주고 살펴보면 녀석의 줄기는 맥없이 흙 위에 엎드려 있다. 쨍한 햇볕에 이내 생기를 잃고 마는 게 영 신경에 쓰인다. 그러나 아내는 어디서 들은풍월인지 괜찮다고 한다. 저렇게 죽는 듯하다가도 살아나는 게 고구마래요. 신경 쓸 것 없어요.

 

▲ 왼쪽 앞에는 가지 몇 포기를, 오른쪽에는 고추를 심었다. 뒤에는 고구마와 파프리카를 심었다.

그리고 사흘, 잔뜩 궁금하긴 하지만 이래저래 시간이 마땅찮다. 아내와 나는 저녁만 먹고 나면 번갈아 밭에 한번 가 보겠냐고 넌지시 제안하곤 한다. 그러나 시간이 맞지 않거나 다른 일 때문에 한 번도 같이 밭을 찾지 못했다.

 

무슨 낯선 구경이 있는 건 아니다. 며칠 만에 보면 어린 모종이 얼마간 자라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공연히 궁금해서 좀이 쑤시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농작물이 주인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 것은 이런 마음과도 이어지는 무엇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 텃밭은 우리 마을 뒤에 있는 나지막한 야산의 오른쪽 산비탈에 있다. 마을 뒤편의 언덕을 오르면 산의 밋밋한 줄기가 눈앞을 가로지른다. 그 산자락을 넘으면 꽤 널따란 분지에 아직도 농사를 짓는 밭이 펼쳐진다. 밭이 끝나는 언덕 너머에 안동의 신시가지가 있다.

 

아파트촌과 시가지 사이에 끼인 산은 동네 사람들의 산책 코스다. 밋밋하지만 나날이 신록을 더해가는 산길은 호젓하고 한적해서 좋다. 길가 무덤도 몇, 시에서 마련해 둔 벤치도 몇 눈에 띈다. 어디서나 보듯 주변은 애기똥풀이 지천이다.

 

▲ 마을 뒷산의 오솔길. 호젓하고 고요해서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 산 너머 신시가지로 가는 길옆의 묘지와 할미꽃. 지천인 노란 꽃은 애기똥풀이다.

그 산줄기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오르면 나지막한 구릉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 아래 산비탈에 우리 텃밭이 있다. 어저께는 분지 너머의 시가지에 볼일을 보러 가면서 잠깐 그 언덕길에 서서 우리 텃밭을 둘러보았다. 논두렁길은 여럿이지만 걸어서 가려면 막상 어느 길로 가야 할지는 헷갈렸다.

 

주말, 아니다. 내일 저녁쯤엔 산책 삼아 아내와 함께 걸어서 밭에 들르겠다는 생각을, 나는 며칠째 공글리고 있다.

 

 

2010. 5. 1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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