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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초농기(初農記), 첫 농사의 기록

by 낮달2018 2019.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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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한귀퉁이의 텃밭에 지은 첫 농사

▲  고추꽃. 이 소박한 흰 꽃은 늘 고개를 숙이고 있다. ⓒ pixabay

올봄에 학교 가녘에 있는 밭의, 한 세 이랑쯤의 땅을 분양받았었습니다. 물론 이 분양은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에 대한 것입니다. 분양을 받고서 한동안은 엄두가 나지 않아 버려두었다가 가족들과 함께 일구고, 비닐을 깔고, 고추와 가지, 그리고 상추 등속을 심었지요. 이게 제대로 자라기나 할까,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채.

 

그러나, 씨앗들은 주인의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릇파릇 움을 틔워 새잎으로 자라났습니다. 의심 많은 임자는 그제야 새잎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주는 기쁨에 조금은 우쭐대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수업이 빌 때마다 거기 들러 그 녀석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보람은 남달랐지요. 농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따로 농사짓기의 경험이 없었던 제게 그런 경험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면서 시골 마을이나, 꽃이나 풀 따위를 그저 무심히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이 어떤 속살을 갖고 있는지, 그것들은 어떤 경로로 자라고, 열매를 맺는지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반진반으로, ‘이제 어떻게 늙어야 할지를 깨달았다’고, 아이들이 품 안을 떠나면, 어디 조용한 시골 학교로 부임하여, 채마밭이나 가꾸며 정년을 기다리겠다는 뻥을 치기도 했습니다. 종내에는 이 파한의 시간을 땅과의 ‘교유(交遊)’라고 표현할 만큼 기고만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다투며 자라나는 바랭이 등의 잡풀들의 공세에 기가 질렸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애당초 심을 때는 깨끗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디에 숨어 있던 풀씨들인지, 새록새록 나날이 짙어지는 그놈들의 행진은 거의 불가항력이었지요.

 

정작 작물보다 더 풍성하게 자라나는 그놈들을 볼 때마다 저는 간단히 한 번의 구제로 놈들을 평정할 농약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잡풀들에 비해 형편없는 속도로 여물어가고 있는 고추와 상추를 눈여겨볼 때마다, 성급하게 그 옆에다 구멍을 뚫고 한 줌의 비료를 유감없이 뿌리고 싶은 욕구는 또 어떠했는지요.

 

이 땅에서 사이비라도 농사꾼 되기는 이리도 어렵고 힘들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느긋한 작물과 성급한 잡풀과의 끈기 어린 싸움으로 지새야 하는 이 땅의 저 순결한 농민들을 생각했습니다. 유기농의 효능과 그 정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인내의 결과인가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병충해로 헐어가고, 말라가는 작물들을 손을 묶고 바라보아야 하는 그들 속내는 그 병충의 생채기만큼이나 타들어 갔을 터입니다.

 

개학 이후에, 드디어 여러 번에 걸쳐 수확을 했습니다. 척박한 땅에 뿌리내린 여러 종자의 고추들은 지난 여름내 무럭무럭 자라주어 그리 굵지는 않지만, 빨갛게 익어서 얼치기 농사꾼을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교무실에 비치된 위생 봉투 두 장 가득, 수확물을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지요.

▲ 2007년, 여학교로 옮겨서 근무할 때 2층 교무실 앞 베란다에서 고추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화요일(12일)에는 여름내 가꾸어 온 ‘텃밭을 놓았습니다’.(다른 지역에는 어떻게 쓰는지 모르나, 제 고향에서는 수확을 끝내고 다음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논밭을 갈아엎거나 마지막 남은 작물들의 수확을 포기하는 것을 ‘밭 놓다’로 표현합니다. 오래 손안에 두고 온 농사를 푼다[放]는 의미겠지요.)

 

마지막 수확은 40여 분쯤 걸렸습니다. 퇴비 한 포와 금비(金肥) 한 홉쯤으로 가꾸어 온 땅심[地力]은 거덜 나고, 여름내 조금씩 진행되던 탄저병(제가 아는 고추의 병충해는 이놈뿐입니다.)으로 고추들은 누렇게 변색하거나 말라 죽으면서 새끼손가락 굵기의 열매를 매단 채 힘겹게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버티어 온 내 고추들은 더러는 시들거나 말라 죽으면서도, 가을과 함께 빨갛게 익어주었습니다. 어저께는 오래 정성을 기울여 햇볕에 말린 고추를 방앗간에서 빻아 왔습니다. 네 근쯤의 분량이었는데, 그 빛깔이 너무 고와 방앗간 주인이 탄복해 마지않았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커피 병 속에 넣은 그 고춧가루는 탁하지 않은 선홍색, 너무나 고운 빛깔이었지요. 우리 내외는 기쁨과 고마움의 마음으로 그것을 오랫동안 말없이 지켜보았습니다. 우리가 지난여름에 흘린 땀이 자랑스러우면서도 부끄러웠던 까닭입니다.

▲ 올에 고향 집 텃밭에서 짓는 고추농사
▲ 어언 텃밭 농사도 10년을 훌쩍 넘기면서 이제 농사는 흉내는 얼마간 내고 있다. 지줏대를 세운 올 고추 농사.

삶으로서가 아니라 파한(破閑)으로서 땅을 일구고,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흘린 우리의 땀은 저 땅의 절대 침묵 앞에서 참으로 외람되고 민망스러운 사치가 아닐지. 그래서 땅과의 교유(交遊)라는 것도 참으로 불경한 표현인 셈입니다.

 

농민들의 삶으로서의 노동이 아닌, 한낱 파한에 지나지 않는 노동 앞에서 제가 기꺼워하는 것은 단지 수확의 열매 때문은 아니겠지요. 그것은 그 노동의 전 과정을 통해서 성취되는 인식과 자기 성장에 대한 만족감 때문일 터입니다.

 

쇠귀 신영복 선생의 “공업 노동, 분업 노동의 경험은, 노동이 이룩해내는 생산물에 대한 총합적인 가치 인식을 가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 준다는 인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하등의 신뢰나 실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은 농업노동이 갖는 그 정반대적 측면을 넉넉하게 반증해 주는 셈입니다.

 

단지, 빛깔 고운 고춧가루 몇 근 때문이 아니라, 내년에는 좀 더 넉넉하게 올보다는 갑절쯤의 땅을 얻고, 거기 잘 걸운 거름과 정성으로 땅과의 교유를 계속해 나가자고 아내와 약속하면서 나이 들수록 넉넉해지고, 너그러워지는 이 세월의 섭리를 새로이 깨닫습니다.

▲ 빨갛게 익은 고추는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2017년에 수확한 고추.

요즘은 짧은 여행길에서도 길가의 고추밭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이미 놓아버린 밭이 많지만, 한때 그 밭 가득 잘 걸운 땅에 푸르다 못해 검푸른 빛을 띠며 어른 키쯤으로 자란 고추를 상상해 보며, 스스로 행복에 겨워하고, 그걸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마음은 농부의 어진 마음 밑자락이라도 다가가는 것인지.

 

 2004. 9 .


**이 글에 쓴 이미지들은 뒷날 농사를 지으면 찍은 사진들이다.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내겐 디지털카메라가 없었고, 내가 손수 쓴 글에다 직접 사진을 붙이는 기회가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이듬해 나는 새로 농사를 짓지 못했다. 내가 첫 농사를 지었던 밭은 도로로 편입되었고, 인근에서 두어 이랑쯤이라도 땅을 빌리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첫 농사에서 풀과 싸움(사실은 시간과 싸움이었다.)이 끔찍했고, 더 부지런히 일을 해낼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3년. 올해는 고작 학교 베란다에 고추 모종 여섯 포기를 심어놓고, 거의 화초 기르듯 하고 있다. 연휴를 마치고 학교에 나갔더니, 고추 하나가 빨갛게 익어 있다. 글쎄, 익혀서 딴들 그 양이 얼마가 되겠냐만 따지 않고 죽 길러 보려 한다. 어쨌든, 아이들에게 제대로 익은 놈을 수확하는 걸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 파농기라는 제목이 걸맞은지는 모르겠다. 파(罷)는 ‘마칠 파’ 자를 써서 농사를 마쳤다는 뜻으로 썼는데, 이게 ‘파업’이라 할 때의 파의 의미로 이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아무래도 개운하지 않아 제목을 바꿨다. 초농기(初農記), 첫 농사의 기록. 굳이 뒤에 푸는 구절을 넣은 것은 ‘초농’이란 표현이 가능한지 미심쩍어서다.

                                                                           2007.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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