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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텃밭일기

[2017 텃밭 일기 ①] 기어코 농약을 치고 말았다

by 낮달2018 2020.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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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농사와 농약, 그 ‘윤리적 딜레마’

▲ 텃밭의 고추는 잘 자라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진딧물이 꾀고 있고 결국 나는 약을 치고 말았다. (5.17.)

지난해 농사는 좀 늦었었다. 무엇보다 퇴직 이후 달라진 일상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좌충우돌하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 새 5월이었다. 시기를 놓쳤는데 농사가 되기는 할까, 저어하면서 텃밭에 고추와 가지, 방울토마토 등을 심은 게 5월 하순이었다.[관련 글 : 텃밭 농사, 그걸 기름 값으로 환산할 순 없다]

 

미리 이랑을 지어 검은 비닐로 씌우는 이른바 ‘멀칭’ 과정을 생략하고 시작한 농사에 우리는 잔뜩 게으름을 피웠던 것 같다. 매주 한 번꼴로 밭을 둘러보다가 여름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밭에 들르는 일이 뜸해졌던 것이다.

 

9월 중순께 다시 들렀을 때 텃밭은 바랭이와 쇠비름 같은 풀이 우거져 마치 흉가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임자의 발걸음소리가 멀어졌어도 우리 텃밭은 품은 작물을 제대로 길러냈다. 그동안 한두 줌씩 딴 고추나 가지를 빼고도 밭을 걷으면서 수확한 고추, 가지, 호박 앞에서 우리 내외는 얼마간 부끄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관련 글 : 텃밭을 걷으며]

 

지난해 농사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올 농사를 시작했다. 첫 삽을 뜬 게 4월 중순이었다. 지난해 고추를 심었던 텃밭에 퇴비로 거름을 한 뒤, 농협에서 공급해준 비닐로 멀칭 작업을 했다. 그러고 나서 지난해엔 묵혀 두었던 장독대 옆 텃밭에 웃자란 풀을 베어내는 데 좋이 두어 시간 공을 들였다.

▲ 묵은 밭은 일구고 퇴비로 거름을 하고 난 뒤, 비닐로 이랑을 싸는 멀칭 작업을 했다.
▲ 지난해 묵혀두었던 장독대 텃밭은 웃자란 풀로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이었다.
▲ 사람 손이 얼마나 대단한가. 두어 시간만에 묵정밭이 정리되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심을 작물은 고추나 가지 빼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2주 뒤에 우리는 시장에서 고추, 가지, 오이, 호박, 상추, 겨자채, 배추, 케일, 파 따위의 모종을 사와 멀칭해 놓은 밭에다 심었다. 그리고 장독대 밭에도 이랑을 내고 멀칭 작업을 했다.

 

장독대 밭은 앞의 것보다 두 배 가까이 넓다. 고민하다가 심을 게 마땅찮아서 거기도 고추를 주로 심고 마지막 두 줄은 고구마를, 주변에는 옥수수를 몇 포기 심었다. 그러고 보니 조그만 텃밭에 심은 채소가 갖가지다. 비록 몇 포기에 불과하지만 우리 텃밭은 구색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 텃밭에 고추와 가지, 케일, 겨자채, 상추 등을 심어 제법 밭의 꼴을 갖추었다.
▲ 새로 일군 밭에도 고추를 심었는데 끄트머리의 두 이랑은 고구마를 심었다.
▲ 보름쯤 지난 뒤의 장독대 밭. 고추가 키가 쑥쑥 자라고 있다.
▲ 이틀 후에는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알미늄 지지대는 지난해 쓰던 것으론 모자라 100개를 새로 샀다.
▲ 텃밭에는 돌아가면서 파도 심었다. 상추 싹이 잘 나지 않는 것 외엔 작물은 잘 자라고 있다.

5월 초순에 들러서는 고추에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지난해 썼던 것으론 모자라서 새로 100개를 구입했다. 그럭저럭 고추는 양쪽 밭의 것을 합하면 150포기에 가깝다. 처음엔 서글펐던 고추는 나날이 푸르러져 가면서 제법 고추 티를 내고 있고, 살아날 것 같지 않아 보였던 고구마도 뿌리를 착실히 내렸다.

 

때이른 ‘진딧물’의 습격

 

지난주에 밭에 들렀을 때다. 고추를 살펴보던 아내가 낙담을 했다. 고춧잎 뒷면에 까맣게 진딧물이 꾀어 있었던 것이다. 진딧물이? 벌써? 그간 경험으로 미루어 봐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대체로 고추는 끝물에 탄저가 와서 망치는 편이었는데 이제 꽃이 막 피고 있는 시기에 진딧물이라고?

 

마침 집에 들렀던 이웃 어른이 거들었다. 약 쳐야 되겠구먼. 그냥 놔두었다간 남는 게 없을 거야. 이걸 어쩌나, 우리 내외는 고민에 빠졌다. 이삼십 포기라면 어째 손으로 잡기라도 한다지만 무려 150포기다. 온 밭으로 번지는 건 시간문제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우린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거듭했다. 띄엄띄엄 4, 5년 농사 흉내를 냈지만 한 번도 약을 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래도 농사를 망치지는 않았다. 고작 텃밭 한 자락 농사를 시작한 우리가 이럴진대 제대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 농민들은 오죽하겠는가.

 

“약 사서 칩시다. 초장에 잡지 않으면 농사가 제대로 되겠수?”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 고추잎에 꾀기 시작한 진딧물을 방제하기 위해 결국 우리는 몇 종류의 농약을 구입했다.
▲ 등에 짊어지는 분무기. 일부 손을 봐서 이 분무기로 나는 난생 처음 농약을 쳤다.

이웃이 일러주는 대로 농협 농자재 판매소에 갔더니 직원은 진딧물약과 살균제, 살충제를 내어주며 섞어서 치라고 했다. 그걸 사서 돌아오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의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벗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농약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그는 나머지 작물들에는 약을 치지 않는다 했다.

 

벗은 고추 농사는 2년 이상 연작하면 안 되니까 내년에는 다른 작물을 심으라고 조언했다. 내겐 이런 문제에 대한 결벽은 없다. 흉내 내는 수준으로 짓는 농사, 남에게 파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먹을 거니 더 고민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말이다.

 

아내와 나는 의논 끝에 그리 합의를 봤다. 이번, 진딧물만 약을 친다. 나중에 다른 병충해가 오더라도 약은 이걸로 끝낸다고. 지난 수요일 아침, 텃밭에 들러 나는 세 가지 농약을 섞어 분무기에 담고 이를 짊어지고 약을 쳤다. 난생 처음 해 본 작업이었다.

▲ 장독대 밭에 심은 고구마. 처음엔 살 것 같지 않더니 이제 뿌리를 착실히 내렸다.
▲ 크게 돌봐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있는 가지. 여름내 우리집 식탁에 오를 가지를 공급해 줄 것이다.

병충해 없이 무럭무럭 자라라!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찍어 두었던 사진을 정리하며 지난 시간을 복기해 보았다. 사진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절로 넉넉해졌다. 비록 흉내에 그치는 농사지만 이 섣부른 농사가 단지 ‘기름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이유다.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때를 놓치지 않았고, 주마다 한두 번은 들러 꾸준히 살폈다. 무슨 이유에선지 파종을 했는데 싹이 잘 나지 않는 상추를 빼면 우리 텃밭의 작물들은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약은 치기 시작하면 계속 쳐야 한다는 주변의 얘기를 귓등으로 흘리며 우리는 이번 방제를 끝으로 텃밭의 작물들이 씩씩하게 자라서 다른 병충해가 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2017. 5.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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